헌병에 구타당해 정신잃었다는데 군은 자살기도 단정

2015. 4. 2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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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뉴스분석, 왜?

'전직 중사' 박준기의 투쟁(하)

▶ '중사 박준기 사건'을 지난주에 이어 보도합니다. <한겨레>는 군 수사 내용을 검증했습니다. 오류가 다량 발견되었습니다. 군은 1994년 최초 수사 이후인 2002년, 2006년, 2008년 재조사를 벌였지만 오류는 수정되지 않았습니다. 재조사조차 형식적이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이번주 "민간이 참여하는 재조사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21년 전 사건의 진실은 이제 제대로 밝혀질까요.

"제가 몇년 전 기억상실증이 왔어요. 아무것도 기억 안 나니까 전화하지 마세요." 사내는 기자의 전화를 무뚝뚝하게 끊었다. 수차례 다시 걸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전화를 받은 이는 전 헌병 수사관 김용화(가명)씨다. 그는 1998년 전역했고 현재 민간인이다. 김씨는 1994년 12월 육군 제2군단사령부에 근무하던 박준기(45·당시 24살)씨를 폭행한 사람으로 지목받고 있다.(<한겨레> 18일치 11면 참조)

박씨가 폭행당했다는 그날 헌병 김씨와 함께 근무를 섰던 또 다른 헌병 손일국(가명)씨도 <한겨레>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말이 없고, 맞았다는 사람의 말만 남았다. 누구의 말이 사실일까. 폭행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박준기씨 주장의 신빙성을 검증해 볼 단서는 군의 수사 기록뿐이다.

사건의 발단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준기씨는 1994년 12월17일 밤 강원도 춘천 시내에서 교통사고를 내어 가벼운 부상을 입고 차로 10여분 거리인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으로 왔다. 그런데 박씨는 18일 0시30분께 병원 3층 옥상 콘크리트 바닥에서 피 흘리며 쓰러진 채로 병원의 수위 홍아무개씨에 의해 발견됐다. 군은 박씨가 교통사고의 자책감으로 병원 10층에서 투신해 자살 기도를 했다고 보고 수사를 종결했다. 박씨는 당시 기억을 잃었고 군의 수사 결과를 받아들였다.

사고 2년 뒤부터 박씨는 조금씩 기억을 회복했다. 헌병 김용화씨가 자신을 발로 차 계단을 굴렀던 기억이 떠올랐다. 박씨가 입은 상처는 계단을 구른 것치고는 중상이었지만 어쨌든 폭행의 단서를 기억해낸 것이다. 박씨는 자신이 자살을 기도할 이유가 없다고 뒤늦게 주장한다. 반면 군은 박준기씨의 요청에 따라 2002년(1군단 헌병대), 2006년(육군 수사단), 2008년(군 검찰단), 2010년(육군 법무실) 진행한 재조사에서 '헌병 수사관의 폭행 혐의는 없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20m 이상에서 추락했다고 보기엔 상처 미약

'박준기 사건'의 열쇠를 풀 중요한 단서는 그가 떨어진 높이, 떨어진 창문의 폭, 방충망의 상태, 그리고 교통사고 시각 등이다. 이 네가지 부분에서 수사의 오류가 없어야 박씨의 부상이 자살 기도에 의한 것이라는 군의 주장에 설득력이 실린다. 취재 결과 군의 수사 결과에서 오류가 발견됐다.

먼저 떨어진 높이. 2군단 헌병은 1994년 초동 조사 때 박준기씨가 떨어진 높이를 15m라고 추정했다. 2007년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가 부실 수사를 지적하며 재조사를 권한 뒤 군이 행한 2008년 조사 때도 15m 높이는 유지됐다.

그러나 <한겨레>가 직접 측정한 결과 약 21m(창문으로부터 6.5층 높이)로 확인됐다.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은 한 층당 19.5㎝의 벽돌이 17개씩 사용됐다. 이를 이용해 단순 계산해 보면, 박씨가 추락한 높이는 21.54m(19.5×17×6.5)가 나온다. 군의 높이 측정 오류는 6m에 이른다. 추락 시 부상의 정도가 달라질 수 있는 수치다.

권익위의 조사 내용을 보면, 1994년 12월 당시 박씨를 직접 치료한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 응급실 당직 의사 정아무개씨는 "상해 부위가 주로 하체에 집중되어 있고 (중략) 박준기의 상해는 22m 높이에서 추락한 정도로 보기 어렵고, 낮은 층에서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했다. 20m 이상 높이에서 추락했다고 보기에는 박씨의 상처가 미약해 군이 15m 높이를 고수한 것 아닌지 박씨는 의심한다.

박준기씨가 투신자살을 기도했다고 하는 병원 10층 성당 반개방형 창문(창문 하단 손잡이를 잡아당기거나 밀어 살짝 열리도록 고안된 창문)의 열린 폭도 1994년 당시 군의 조사에서는 21㎝였다가 2006년 조사 때는 24㎝로 늘어나고 2008년 재조사 때는 30㎝까지 늘어난다.

2006년(육군 수사단)과 2008년(군 검찰단) 군은 각각 한림대 성심병원 총무과 차장 최아무개(현재 퇴직)씨의 진술을 근거로 했다. 같은 최씨의 진술이 왜 24㎝에서 30㎝로 변경되는지 군은 아무런 설명이 없다. 2008년 군은 최씨의 설명을 근거로 "사고 당시 개방폭이 더 넓어 사람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구조로 확인됐다"고만 설명했다. 21㎝ 폭이라면 몸집이 큰 박씨가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하거나 창틀의 파손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논리로 보인다.

병원 개원 당시부터 창틀 관리를 맡아온 영선실(시설관리)의 김아무개(61)씨는 그러나 지난 1월 <한겨레>와 만나 군의 주장을 부인했다. 김씨는 "창틀은 내 손으로 다 제작했다. 1994년 12월 이전 병실에서 환자들이 바깥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있어 창문 열리는 폭을 12㎝로 설정해두었다. 일반 사무실 창만 21㎝까지 열리도록 했다. 창틀 구조상 21㎝ 정도가 최대 열리는 폭이고 물리적으로 30㎝는 불가능하다. (군이 내세운) 당시 총무과 차장 최씨가 잘 모르고 말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군 조사에 응한 최씨에게 해명을 들으려 했지만 그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한겨레>는 군이 1994년 당시 찍은 병원 창틀 사진을 법영상분석연구소(소장 황민구)에 보내 분석을 의뢰했다. 연구소는 2차원 사진을 3차원 영상으로 복원해 창문의 열린 폭이 21㎝ 내외라고 밝혔다. 2006년(24㎝)과 2008년(30㎝) 군의 재조사 결과와 배치되는 수치다.

1994년 사건 당시 10층 성당 창문 방충망이 찢어져 있었다고 진술한 수위장 홍아무개씨의 진술도 신빙성이 의심된다. 홍씨는 2007년 권익위 조사관에게 "방충망은 찢겨진 바 없고 밖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상태였다"고 진술해 기존 진술을 뒤집었다. 이는 박씨의 친형 박호준(가명)씨가 "현장 방문 때 방충망이 찢겨져 있지 않은 것을 봤다"고 한 증언과 일치한다. 방충망이 찢어져 있지 않았다면 창문으로의 투신은 불가능하다. 홍씨는 최근 <한겨레>와 만났지만 "군에 진술한 내용이 맞다. 다른 얘기는 더 하고 싶지 않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중사 박준기는 정말 자살기도했나군 기록 검증하자 오류가 수두룩추락 높이 15m는 실제 21m로 확인창문 열린 폭 30㎝도 실제론 21㎝사고시각도 10시30분 아닌 8시30분군은 4차례 조사했지만 박 중사에게유리한 증거는 한 차례도 제출 안해국민권익위 내부서 조작가능성 염두가해자 지목된 헌병들 인터뷰 거부한민구 국방장관은 "재조사 검토"

박 중사가 만난 헌병은 유령인가

박준기씨가 병원에 오기 전 교통사고 시각을 군은 밤 10시30분으로 발표했지만 관계자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사고 시각은 저녁 8시30분 전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교통사고 시각은 헌병의 병원 출동 시각과 연결된다.

군 수사기록을 보면, 헌병은 0시10분께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고 나서 1시간 정도 뒤인 새벽 1시께 병원에 도착했다. 교통사고 시각(밤 10시30분)으로부터는 2시간30여분 만이다. 그러나 만약 교통사고 시각이 저녁 8시30분 이전이라면 헌병의 출동 시각은 밤 11시께가 되고 박씨와 헌병의 접촉은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 된다. 박씨가 2차 상해를 입은 시각은 밤 12시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박씨가 교통사고를 낼 때 옆좌석에 앉았던 친구 김내창(가명)씨는 <한겨레>와 만나 "사고 시각을 저녁 8시30분 전으로 기억한다. 사고 나기 얼마 전 집에서 호출(삐삐)이 왔었고 내가 일찍 들어간다고 공중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있다. 밤 10시30분은 확실히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씨의 어머니도 아들에게 호출을 한 시각을 저녁 7~8시 사이로 기억하고 있었다.

김내창씨는 사고 하루 뒤(1994년 12월19일) 헌병의 조사에 응해 진술조서를 작성했다. 진술조서는 김씨가 직접 쓴 게 아니고 헌병이 질문과 답변을 모두 자필로 썼다. 김씨는 "조사를 받을 때 박준기의 자살로 몰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헌병이 박준기가 자살 기도를 한 것 같다고 제게 말했고 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답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질의응답은 조서에 담기지 않았다.

헌병은 박준기씨를 본 적 없다고 하지만 박씨는 자신을 체포하러 온 두 헌병의 인상착의, 대화 내용 등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박씨와 헌병 둘은 경찰이 신병인수인계서를 가지러 간 사이(밤 11시20분~50분) 대화를 꽤 나누었다고 한다.

"김용화 중사는 저보다 나이가 열다섯살 정도 많았고요. 안경은 안 쓰고 광대뼈와 턱 부분이 남자답게 도드라진 느낌이었어요. 안색은 불긋불긋했어요. 키는 170㎝ 정도. 고향은 전라도 쪽이라고 들었고 내년(95년)에 상사 진급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손일국은 20대이고 결혼했었고 수사관 연수 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어요. 저는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그들은 저를 본 적 없다고만 하니 제가 본 건 유령일까요."

박준기씨는 김용화씨를 2008년 춘천경찰서에 살인미수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경찰은 김씨 소환조사를 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했다. 박씨와 친구 김내창씨의 1994년 12월18일 한림대 성심병원 의료기록에 모두 '밤 10시47분'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경찰은 이를 내원 시각으로 추정했고 박씨의 교통사고 시각을 밤 10시30분으로 추정한 군의 발표에 무게를 실었다.

그러나 의료기록을 살펴본 의료계 관계자는 다른 설명을 했다. 김대희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응급의학과 의사는 <한겨레>의 자문 요청에 "보통 의료기록은 처치가 다 끝난 뒤 쓰기에 그곳에 적혀 있는 시각을 환자의 병원 내원 시각으로 확정해선 안 된다. 박씨의 의료기록에 적힌 10시47분은 밤 10시47분에 작성된 게 아니라고 단정해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준기씨가 투신 직후 발견됐다고 하는 지점이 목격자마다 차이가 큰 것도 의문점으로 남는다. 병원 3층 옥상에 떨어져 있던 박씨를 목격한 사람은 당시 병원 수위장 홍씨와 응급실 당직 의사 정씨다.

권익위 조사 결과를 보면, 수위 홍씨는 성당 창문 직하 지점에서 박씨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의사 정씨는 그보다 14m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발견했다고 다르게 진술했다. 정씨의 설명이 맞는다면 박씨는 21m 높이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다친 채로 병원 3층 옥상으로 옮겨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군은 1994년, 2006년, 2008년, 2010년 재조사에서 의사 정씨의 진술을 한 차례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정황만으로 군의 수사가 조작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창문 열린 폭은 실제 21㎝로 확인됐지만 물리적으로 박씨의 투신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군의 수사에 설사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박준기씨가 헌병에게 폭행당했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목격자나 다른 증거가 없는 것은 박씨에게 불리한 지점이다.

다만, 군의 수사기록에 박준기씨에게 유리한 부분은 누락돼 있고 불리한 부분 위주로만 기술돼 있거나 2차 상해의 원인을 판단하는 결정적 부분에서 수사상 오류가 상당한 점은 군의 수사가 객관성과 신뢰성을 의심받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군의 박준기씨 관련 수사기록을 살펴본 배상훈 프로파일러(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는 "군은 수사 단계에서 박준기씨의 추락사고와 폭행사고 사이에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했어야 한다. 그러나 과도할 정도로 추락에 무게를 두고 근거를 수집해간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군이 찍은 현장 사진은 사건 다음날 혹은 며칠 뒤에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또 사진의 원본도 없고, 어떤 사진기로 찍었는지 기록도 없다. 수사기록에는 '혈흔이 약간 흘러 있었음'이라고 돼 있는데 사진에는 다량의 출혈 현장이 찍혔다. 군 수사기록 안에서도 서로 모순이다.

심부재 전 국민권익위원회 조사관은 "당시 권익위는 사건 조작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2007년 재조사를 군에 권고했다. 그러나 재조사 때도 군은 폭행 가해자로 의심받는 핵심 인물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했다. 군이 이 사건을 중립적으로 조사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했다"고 말했다.

국회 국방위서 진성준 의원이 추궁

2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진성준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한민구 국방부 장관에게 '박준기 사건'에 대해 "수사를 다시 하라"고 추궁했다. 한 장관은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지만, (민원인이) 군의 조사를 못 믿으면 다른 민간(기관)과 함께 확인한다든지 그런 건 가능하다. 검토해보겠다"고 답했다.

국방부가 진성준 의원에게 공개한 자료를 보면, 2010~2014년 군내 폭행 및 사망사건 관련 재조사 요청 건수는 71건에 달해 전체(601건)의 11.8%에 이른다. 열건 중 한건 이상은 군 수사의 신빙성이 의심받은 셈이다. 군에서 진행한 수사가 모두 왜곡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 한건이라도 부실 수사 정황이 드러나면 피해자들은 군 전반을 불신하게 된다. 군은 과연 중립적인 자세로, 과학수사를 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두 다리를 잃은 박준기씨는 2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남은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이 왜 이 정도로 다친 건지 몰라 답답하다. "그나마 저는 정신을 잃었다가도 나중에 깨어났으니까 군 수사가 조작됐다고 주장이라도 하지요. 윤 일병처럼 이미 숨이 끊긴 장병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건이 그냥 묻혀버렸을 겁니다."

진성준 의원은 "피해자가 군 수사 내용을 납득하지 못할 경우 민간 또는 국민권익위 같은 정부기관이 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또 군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석진 '열린 군대를 위한 시민연대' 활동가는 "대만은 헌병이 (군 검찰이 아닌) 일반 검찰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진행한다. 우리도 군 수사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춘천 군산/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전직 중사' 박준기의 투쟁 (상)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73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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