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40분에 한 건씩 찍는 '판결공장'.. 대법관 1인당 연간 3137건

이범준 기자 2015. 4. 2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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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줄일 '솔로몬의 지혜' 없나

·대법관 12명이 2013년 처리한 사건은 3만7652건이다. 시민의 목숨과 재산이 걸린 최종심 재판이 40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처럼 최고법원이 '판결공장'으로 돼버린 것은 삼세판을 좋아하는 국민성의 문제일까? 법 제도의 문제일까?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대법원의 문제를 그냥 둬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대법원 대법관실. 시민들은 물론 전국의 판사들 가운데서도 들어가 본 사람이 드물다. 대법관실은 대법원 청사 7~10층에 있다. 층마다 3개씩이다. 대법관실 안에는 사무를 돕는 부속직원 공간, 대법관을 돕는 전속 재판연구관들의 방, 마지막으로 진짜 대법관실이 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대법관이 쓰는 커다란 책상이 있고, 재판기록들이 올려져 있는 4~5인용 회의 테이블, 마주앉아 차를 마시는 의자 2개가 붙은 티테이블이 있다.

지난 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상고법원 설치에 관한 공청회'. 대법원 입장을 지지하는 이인호 중앙대 교수는 "상고제도를 조금 손봐서 사건수를 2만건으로 줄인다거나, 대법관을 3~4명 늘려 1인당 사건수를 2000건으로 낮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현재의 대법원 기능을 근본적으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대법관실에 산더미처럼 많은 기록들

그리고 대법관이 앉은 의자 뒤로 길이 10m에 달하는 대형 나무 캐비닛이 줄지어 있다. 캐비닛을 열면 그 안에 산더미처럼 기록들이 들어 있다. 대법관은 하루 종일 그 기록들을 읽는다. 퇴근시간이 되어서도 기록 읽기를 끝내지 못하기 때문에 차에서도 읽는다. 대법관에게 지급되는 차량인 에쿠스에는 고급 세단에 어울리지 않게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이 한가득 있다. 보고서에 의문을 표시하고 지시사항을 적기 위해서다. 집에 도착해서도 기록을 계속 읽는다.

대법관들은 시력 저하를 호소한다. 퇴임한 대법관들은 어김없이 "대법관 생활하면서 눈이 나빠졌다. 눈이 아파 무엇을 읽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현직 대법관들도 해마다 안경의 도수를 높이는 게 일이다. 대법관실에 마주앉아서 보면 눈이 벌겋다. 쉬는 시간에는 녹지를 쳐다보며 눈을 식힌다. 남쪽 방에서는 우면산을, 북쪽 방에서는 몽마르뜨 공원을 바라본다. 대법관들이 임기 6년 동안 대법원에 감금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이들이 이렇게 처리하는 사건 수는 실로 엄청나다. 2013년의 경우 3만7652건이었다. 대법관이 12명이므로 1인당 연간 3137.67건이다. 토·일을 제외한 주 5일 기준으로 하루 11.84건을 처리한다. 대충 잡아도 40분에 1건씩이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모든 사건을 대법관 4명으로 이뤄진 소부(小部)에서 같이 처리한다. 이렇게 계산하면 사건당 처리시간이 10분 미만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사실은 주심 대법관이 혼자 결정한다.

산술적으로 대한민국 시민의 목숨과 재산이 달린 최종심 재판은 40분도 걸리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최고법원에만 있다. 다른 나라를 보면 미국은 9명이 80여건, 일본은 15명이 5000여건, 독일은 128명이 5000여건을 다룬다. 사법시스템이 조금씩 달라 평면적인 비교가 어렵지만, 우리나라 대법원이 극단적인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달리 말하면, 대한민국 시민의 운명이 특수한 지경에 처해져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법원이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국회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판사 출신 새누리당 홍일표 의원 등 168명이 상고법원이라는 제도를 발의했다. 국회의원 과반의 발의여서 무난히 통과될 것으로 봤다. 하지만 법률 관련 소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제동이 걸렸다. 같은 판사 출신인 정의당 서기호 의원은 "상고법원 법안은 절대로 통과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상고법원 반대론자들은 그렇게 일하기 힘들면 대법관 수를 늘리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법원은 절대로 늘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런 반응에 반대론자들은 "알았다. 그럼 지금 그대로 하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상고법원 법안은 20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는 내년 4월까지는 결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거 준비국면에 접어들기 전인 올 여름이 고비다. 여름을 지나면 상고법원은 물 건너갈 가능성이 높다. 대법원은 명운을 걸고 뛰고 있지만 시민들은 무슨 일이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상고법원 법안을 주도하고 있는 대법원 한승 사법정책실장(사진)은 "상고법원이 생기면 당사자들은 훨씬 충실한 판결문을 받게 되고. 대법원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해 깊이 있는 판결을 많이 내놓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이재화 변호사는 "현재 대법원이 쌍용차 판결 같은 것은 내놓는 것은 사건이 많아서가 아니다. 보수일색의 획일적인 대법관 구성부터 바꾸라"고 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상고법원 신설이냐 vs 대법관 증원이냐

지금 중요한 것은 대법원이 주도하는 상고법원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가 아니라, 40분짜리 최종심 재판을 그대로 두어야 할지다. 내가 지금 재판받지 않는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다. 재판은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처럼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도망가려 해도 재판은 반드시 나를 찾아오고, 내 운명은 40분 만에 법조인 한 사람 생각만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수많은 논점이 얽혀 있는 법조인들의 논리싸움이다. 어디에서 시작해도 끊임없이 반론이 나오고 제각기 설득력이 있다. 일반인들은 논쟁에 관심을 갖거나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 재판은 법률가들이 하지만 재판제도는 시민이 만드는 것이다. 이제부터 아래 Q&A를 통해 대한민국의 최종심 재판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나 자신부터 생각해 보자.

Q. 대법원 재판을 원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가.

A. '우리는 삼세판을 좋아하는 민족이라서'라는 얘기를 판사들마저 한다. 무책임하고 근거 없는 객소리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런 대안도 안 나온다. 현재까지 가장 설득력이 높은 분석은 하급심이 부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판에서 지는 사람이 그 이유를 제대로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소심으로, 상고심으로 간다는 것이다. 재판을 벌이는 동안은 인생이 지옥이다. 이런 점을 알면서도 상급심으로 가는 이유는 승소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패소 이유를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재판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대한민국 판사는 세계적으로 유능하고 부지런한 편이다. 그럼 결론은 이거다. 사건 수에 비해 판사 수가 너무 적다.

Q. 하급심 판사를 늘리면 대법원 사건 수가 줄어드나.

A. 그렇지만도 않다. 아무리 1심 재판이 충실해져도 상고심 숫자가 확 줄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많다. 근본적인 원인은 대법원 자신에게 있다. 한국 대법원은 외국 대법원이 하지 않는 '사실관계 손대기'라는 것을 해왔다. 모든 재판은 두 단계다. 사실 확정과 법률 적용이다. 가령 돈을 갚으라는 소송이라면, 돈을 진짜로 주었는지부터 확인하고, 다음으로 법률상 갚아야 하는 돈인지 판단한다. 전 세계 최고법원은 법률 적용만 본다. 사실에는 손대지 않는다. 사실은 증언을 생생하게 직접 들은 하급심 판사에게 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대법원은 사실관계에 손을 대왔다. 대법원이 결론을 바꾸어주니 사건이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Q. 대법원이 실수를 발견해 결론을 바꾸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A. 대법원은 "잘못이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급심 판사에게 보이지 않던 사실관계가 대법관에게 보인다는 것이 가능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한 전직 대법관은 "하급심 판사는 표정과 말투, 머뭇거림을 직접 본다. 하지만 대법관은 말이 글로 옮겨진 기록만 본다. 증거를 더 잘 판단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왜 사실에 손을 대 결론을 바꾸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대법원이 주요사건에서 자신들의 권한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건의 결론을 뒤집는 가장 쉬운 방법이 사실에 손을 대는 것이다. 법률 적용을 바꾸려면 판례를 뒤집어야 해 여간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현직 미국 연방대법원장 존 로버츠는"(최고법원은) 하급심의 잘못을 교정하는 기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Q.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설치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A. 간단히 말해 사건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사건이 너무 많은 게 사실이다. 118명에 이르는 연구관이 대법관을 보좌하지만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구조다. 대법관과 연구관의 비율이 비정상적이다. 대법원 재판은 연구관 재판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과로에 시달리는 연구관들이 해마다 병을 얻어 휴직하거나 입원하는 일이 반복된다. 하지만 연구관들로서는 대법관의 눈에 들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에 몸을 던진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도 너무 많다. 검찰이나 변호사 가운데 대법관을 하려는 사람이 없다. 검찰에서는 모두가 거부해 박상옥이라는 검찰을 떠난 인물을 추천해야 했다. 변호사들은 아예 대법관을 하려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교수들도 나서지 않는다. 대법관이 보수화되고 획일화하는 이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업무량이 있다.

Q. 상고법원이 생기면 3심제 원칙에는 맞으니 문제 없지 않나.

A. 대한민국 헌법은 3심제를 보장하지 않는다. 당초 3심제라는 말이 없다. 다만 최종심을 대법원에서 한다고 정해져 있다. 그런데 상고법원 시스템은 대법원이 사건을 골라 상고법원용과 대법원용으로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상고법원이 최종심을 대법원으로 정한 헌법에 맞는지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찬반 양측의 논리가 첨예해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구체적으로 상고법원 위헌론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헌법은 국회 동의를 얻은 대법관에게 최종심을 맡겼는데, 상고법원 판사는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상고법원 판사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하급심 판사 가운데 시켜야 한다. 1·2심은 더욱 부실화되고 상고심은 더욱 많아진다. 또 상고법원을 거쳐 대법원에도 가게 한다면 4심제다. 대법원이 헌재에서 판결을 다루는 것에 반대하는 이유가 4심제다. 자가당착이다."

Q. 대법원이 '사실관계 손대기'를 그만하고 조금 기다려보면 어떤가.

A. 사건 수 통계표에서 외국의 통계와 다른 한국의 특징은 '접수사건=처리사건'이라는 점이다. 외국은 처리사건이 접수사건보다 적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접수사건의 0.8%만이 다뤄진다. 접수하지 않은 사건을 가져가 다루기도 한다. 1심에서 사실과 법률을 다루고, 2심에서 법률을 점검하고, 예외적으로 3심을 한다. 한국식 법률용어로 상고허가제다. 거의 모든 법률가들이 생각하는 최선의 대안이다. 대법원이 주요한 사건만 골라서 처리하는 게 맞다는 것이다. 상고법원에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간 대법원이 해온 관행 때문에 시민들이 강하게 반대해 도입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논리적으로는 상고허가제가 이상적이지만 시민이 원하지 않는 것을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앞으로 대법원이 역할을 잘하면 이후에 시민이 허락할 수도 있다.

Q.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있으면 대법관 수를 늘리면 되지 않나.

A. 상고법원 반대론자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불필요한 사건들을 일부 차단하고 대법관을 늘리라는 것이다. 가령 형사벌금 사건이나 소액청구 재판 같은 것은 대법원의 심리대상에서 제외하라는 것이다. 그런 작은 사건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걸린 대법원 재판이 40분 만에 끝난다고 설득하면 납득하지 못할 시민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대법원도 동의한다. 문제는 대법관 증원인데 여기에는 강하게 반대한다. 대법원은 개별적인 사건을 일일이 구제하는 곳이 아니라 법률의 적용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충분한 토론을 통해 나오는데, 현재의 12명이 넘으면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 최고재판소도 15명이고, 한국 대법원도 1969~1981년에는 15명이었다.

Q.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에 반대한다는데, 상고법원이 무산될 경우 어떻게 되나.

A. 대법관 증원 불가는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만들려고 배수의 진을 치고 공언한 것이다. 따라서 상고법원이 무산된다고 해도 대법관이 증원될 가능성은 당분간 제로다. 상고법원이 무산되면 40분짜리 재판은 계속되는 것이다. 어쩌면 30분이 될 수도 있다. 상고법원 설치와 함께 대법관 증원이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다. 대법원이 힘들어도 참겠다고 한다고 해서 그냥 두면 안 된다. 대법원이 과로사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온다. 대법원은 한계치다. 상고법원을 제안한 것 자체가 피로를 자인한 것이다. 대법원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한 이상 반드시 결론을 내야 한다. 주어진 처방전은 세 가지다. 상고허가제, 상고법원 설치, 대법관 증원. 현실적으로는 상고허가제를 제외한 두 가지다. 하나를 선택해서 약을 먹어야 한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질 시간이 없다. 대법원의 시스템 다운을 막아야 한다.

상고법원 추진하는 대법원의 속사정

사건 수를 줄이려는 대법원의 노력은 꽤 오래됐다. 법조계 고위 관계자는 "내가 재판연구관을 하던 1990년대 초반에 사건이 1만2000건이었다. 이미 당시에도 여기가 대법원이냐 장난하는 곳이냐는 말이 있었다"고 전했다. 이런 이유로 사건 수 줄이기 노력이 이어졌고, 2000년대 후반에는 고등법원 상고부 법안이 있었다. 지금의 상고법원안과 비슷하다. 정부와 국회가 합의해 성사단계에 있었다. 서울고등법원에 상고부 건물도 올렸다. 막판에 틀어진 이유가 대법관들의 사실상 반대 때문이라는 게 유력한 설이다. 당시 이 문제에 관여했던 복수의 법조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법원 사건이 줄어들면 대법관들 퇴직 이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대법관이 개업해서 돈 버는 시절도 아니잖느냐. 우리가 상고법원을 추진하는 진정성을 이해해달라." 요즘 대법원 관계자들이 하는 말이다. 아직도 전직 대법관들이 적잖게 사건을 맡고 있지만 크게 줄어든 게 사실이고, 앞으로 더욱 줄어들 것도 확실하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진정성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상고법원을 추진하는 이유를 조금 깊이 알려면, 동전의 뒷면인 대법관 증원에 반대하는 이유를 보아야 한다.

여기서 헌법재판소가 등장한다. 헌법재판관은 9명이다. 대법관이 현재의 12명보다 더 늘어나는 것은 최고법관으로서의 권위에서 밀리는 것을 뜻한다.

세계의 대법원은 나라마다 형태와 기능이 달라 쉽게 비교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법조인들 표현을 빌리면 '권리구제 법원'과 '정책 법원'으로 나뉜다. 권리구제형이란 개별 사건의 정의로운 해결을 목표하는 법원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대법원이 그렇다. 대법관이 128명이라고 하지만 일반대법원만 그렇다. 전문대법원의 대법관 숫자도 그만큼이다. 정책 법원은 사회 방향에 기준을 제시한다는 의미다. 가령 동성끼리 결혼이 가능한지, 과거사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은지 판단한다. 독일에서는 헌법재판소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헌재가 없는 미국과 일본은 연방대법원과 최고재판소가 두 가지를 모두 담당한다.

한국은 헌법재판소를 두고 있지만 헌법상 대법원과 동급이다. 독일 헌재가 독일 대법원 위에 올라 있는 것과 다르다. 하지만 우리나라 헌재는 정책 법원의 역할을 하면서 대법원의 위치를 서서히 넘어서고 있다. 대법원이 사실관계에 손을 대고 3만7000건 사건에 치여 가는 동안에 그렇게 됐다. 상고법원안이 저만치 앞서 가는 헌재를 잡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분석이 그래서 나온다. 헌재 관계자들은 "대법원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법원을 왜 도입하려는지 빤한 것 아니냐. 아일랜드에 있다는데 일단 처음 듣는 얘기이고, 설령 있다 해도 우리한테 맞지도 않는다"고 했다. 대법원 설명은 다르다. 대법원 관계자들은 "헌법에 대해서는 헌재가 정책 법원이지만 민·형사는 대법원이 정책 법원이다"라고 했다.

대법원이 헌법재판소를 의식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도입해 사건을 다수 털어낼 경우 커다란 사건 위주로 운영될 것은 분명하다. 법조계 관계자는 "대법원이 정책 법원의 역할을 하게 되면 반드시 헌재와의 통합 얘기가 나오게 된다. 정책 법원이 2개일 수는 없다"고 했다.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과거에 대법원이 헌법재판 기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행사하지 않았다. 1988년 이후 헌법재판이 이렇게 발전한 것은 대법원과의 경쟁 때문이다. 굳이 통합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추진하는 이유가 사건 수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사람들의 분석이고, 꽤 논리적인 추론이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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