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별의 그땐 그랬지]안치용 "봉중근같은 선수, 아직도 못봤어"

박은별 2015. 4. 25.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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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안치용 제공
[이데일리 스타in 박은별 기자]1997년 6월 어느 날, 신일고 야구장에서 찍은 야구부의 사진이다. 익숙한 얼굴 두 명이 있다. 봉중근(윗줄 맨 왼쪽)과 안치용(윗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다. 당시 안치용을 비롯한 3학년 동기생들의 사진에 2학년 봉중근이 슬쩍 끼어들었단다.

안치용과 봉중근은 중학교 시절부터 잘 알던 사이다. 지금도 형, 동생으로 아주 친하게 지낸다. ‘천재’라고 불린 안치용이 지금도 동생 봉중근을 보며 흔들리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얘보다 잘하는 야구 선수는 내 평생 못 봤다.”

안치용은 설명을 이어갔다. “봉중근이 최고였다. 못하는 게 없었다. 지금까지도 내가 본 선수 중 가장 잘한다. 특히 타자로서 최고였다. 컨택 능력 최상, 선구안 최상. 봉중근에게 삼진은 없었고 매 대회 타율은 6할이 넘었고 주자 나가면 타점이었다. 마운드에 올라서도 삼진, 또 삼진이었다.”

봉중근의 방망이 솜씨는 이미 잘 알려진 바다. 봉중근 스스로도 자신감 있게 말할 정도다. 봉중근이 미국으로 진출할 당시 타자로 지목받은 줄 착각했던 것도 워낙 방망이에 대한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덕분일 것이다. 안치용은 봉중근의 성적이 마치 자기 성적인 양 자랑을 이어간다. 진짜 형 같다.

“중근이 덕분에 신일고 성적도 그때 제일 좋았다. 대통령배(4위)를 빼고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청룡기 다 우승이었다. 1997년 캐나다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타율 5할에 최다홈런 1위, 타점 1위를 다 했다. 우리 팀 성적이 6위였는데, 최우수상을 중근이가 받았다. 뭐 말 다하지 않았나 싶다. 투수보다 방망이를 쳤으면 더 잘했을 텐데. 나 뿐만 아니라 (박)용택이나 당시 중근이를 봤던 선수들은 다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이번엔 봉중근의 메이저리그 이야기로 건너갔다. “또 그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메이저리그 첫 선발 출전 상대가 애리조나 최고의 투수로 꼽혔던 커트 실링이었는데 체인지업을 제대로 받아친 적 있었다. 타구가 플라이로 잡히긴 했는데 커트 실링이 승리 투수 인터뷰에서 ‘저 동양인 친구가 투수가 맞나, 내 체인지업을 제대로 받아치더라’고 칭찬하더라. 그게 우리 중근이다.”

형처럼 봉중근에 대한 칭찬을 이어간 안치용은 순수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쉬는 날이면 선수들과 단체로 놀이공원에 가기도 하고, 봉중근과는 실내 낚시터를 즐겼단다. 생선을 잘 먹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는 재미에 푹 빠져있을 당시였다.

이제 안치용 자신의 이야기로 다시 넘어가보자. ‘야구천재’라 불리던 고등학교 시절. 안치용이 한 마디로 그때를 정리했다. “그땐 이대호처럼 치고 이대형처럼 도루하고 이종욱처럼 수비를 했었다.”

안치용은 학창시절 자신이 사기꾼이라 불린 사연들도 전했다. 채상병, 조용준 등 당시 함께 대학을 다녔던 선수들이 지금도 그를 사기꾼이라 부른다.

안치용의 말을 빌리자면 ‘내일 이대 무용과와 4:4 미팅 5시에 잡아놨으니 2시에 연대 정문에서 보자. 무스 제대로 바르고 준비해서 나와라’고, 또 ‘분식집에서 내가 살테니 모여라’고 해놓고 혼자 빠지는 등 그런 스타일이었다고 했다. 그냥 장난꾸러기였다.

그러니 주장 선거에서도 떨어졌을 수밖에 없다. 안치용은 굴욕적 사건도 하나 전했다. 고 3 당시 총 48명의 야구부원이 주장을 투표로 뽑았고, 결과는 2-46, 안치용의 대패였다. 안치용을 제치고 주장이 된 선수는 현재 현재윤 해설위원이다.

안치용은 “한 표는 내가 찍었고, 다른 한 표는 봉중근이었다. 내가 둘 다 같이 적어줬다. 그런데 31-0까지 중간투표 결과가 나오더라. 대굴욕적인 사건이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고등학교를 비롯해 단 한 번도 주장이 돼 본 적 없다. 아, 선수 은퇴를 앞두고 지난 해 SK 마무리캠프서 임시주장을 해봤다며 자랑이다. 야구인생 통틀어 주장이 되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안치용은 “재윤이는 리더십이 있었고 진중했다. 군기도 잡았는데 나는 싱거운 애였다. 뻥만 치고 다니고, 장난만 치고, 놀기만 했다”며 웃었다.

박은별 (star8420@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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