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만남- 백인천] 야구 중독..건강 중독..그래서 인생중독

김재동 기자 2015. 4. 2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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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뉴스 김재동 기자]

'불멸의 4할 타자' 백인천 감독은 스스로를 야구중독자, 건강중독자라고 소개한다./사진= 김창현기자

그는 중독(中毒)이란 표현을 즐긴다. 스스로의 인생을 '야구중독' '건강중독'이란 말로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중독을 들어보니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중독은 '벽(癖)'이랄 수 있다.

명말청초를 살다간 장다이(張岱)는 '오이인전서'(五異人傳序)에서 "사람이 벽(癖)이 없으면 더불어 사귈 수 없다. 그런 사람은 깊은 정(深情)이 없기 때문이다"(人無癖, 不可與交, 以其無深情也)고 말했다. 장다이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깊은 정을 갖춘 사귈만한 사람에 틀림없다.

백인천(72) 감독은 여전했다. 1990년대에 만났으니 근 20여 년 만인데 젊은 시절 '타이슨'이라 불렸던 이답게 아직도 늠름 당당하다. 다만 3년 전 당한 고관절 골절의 여파로 걸음이 좀 불편하고 보는 이를 주눅들게 만들던 눈매가 세월의 더께에 유순해졌을 뿐이다.

아직도 깨지지 않는 프로야구 원년의 기록 4할1푼2리, 그리하여 '불멸의 4할타자' 라 불리는 백인천 감독. 그의 근황은 어떨까?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묻자 "요즘은 건강 전도사 노릇해요"라 답한다. "건강전도사요?" 되물으니 "한 번 쓰러지고 나서 그렇게 됐지"한다.

삼성라이온즈 감독이던 1996년였다. 낮경기를 마치고 귀가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저녁준비를 마친 부인의 식사하란 소리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단다. 뇌경색이었다.

삽시간에 맞은 휠체어 신세. 여기서 백인천 특유의 근성은 '이참에 건강프로가 되자'는 결심을 끌어낸다. 시덥지않게 느껴지던 병원재활을 마다하고 퇴원을 강행한다. 아들을 대동해 나간 놀이터에서 한발짝 걷기를 시도한다. 가능할 리가 없다. 바로 고꾸라져 머리를 박았다. 만류하는 아들을 다그쳐 다시 한걸음을 시도한다. 두번째 시도에선 넘어지는 순간 마비 안된 오른손이 움직여 머리를 박는 꼴사나움을 면한다. "아하!" 했단다. 처음에 머리를 박았던 건 뇌가 손을 못 쓴다는 사실을 인지 못한 탓이고 다시 해보니 이번엔 학습효과로 오른손이 움직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작은 가능성만으로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단다. 얼굴은 피범벅이 된 채 웃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심경은 어땠을까?

이후 운전기사와 함께 남한산성을 찾아 기어서 산을 오르는 훈련을 했단다. 주변사람의 시선? "내가 죽느냐 사느냐인데 그게 무슨 대수라고"가 백인천식 결론였다. 건강회복을 꿈꾸는 그에게 좌고우면할 여지는 없었다. 그의 야구인생도 그랬다. 꿈을 꾸었고 포기하지 않았다. 목표를 세웠고 일로매진했다.

본인의 야구인생을 회고하는 백인천 감독./사진= 김창현기자

대만에서 아시아선수권대회를 마치고 귀국길에 들른 동경에서 아무도 모르게 맺은 도에이(東映,현 니혼햄) 입단계약도 그렇고 타격폼을 바꾸고 3할(.315)타자에 오른 1972년도 그랬다.

도에이 입단의 경우 프로가 되겠단 꿈만 갖고 저지른 10대의 치기였다. 당시는 한-일 수교(1965년)도 이루어지지 않았었고 불과 1년전에 5.16쿠데타가 있었던 살벌한 정국였다. 18세 소년 백인천은 쿠데타 주체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부의장을 겸임하고 있던 대한체육회 이주일 회장에게 "일본에 보내달라"요구했고 마침내 프로펠러기를 타고 이승만라인을 넘어섰다.

타격폼 교체의 경우도 그렇다. 도에이에서 7년째 주전생활을 하던 1972년 새로 부임한 스기야마 사토시(杉山悟) 타격코치가 스윙 방식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하쿠(백·白의 일본 발음) 상은 분명히 3할을 칠 수 있는 타자다. 내 주문대로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그때까지 백인천은 평균타율 2할 8푼대 타자였다. '3할타자'의 꿈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스기야마코치의 조언을 받아들여 방망이를 잡은 손의 위치를 머리 옆에서 가슴 아래까지 끌어내렸다. 연습벌레다운 끊임없는 노력에도 타구는 뻗어나가지 않았다. 결국 2군으로 떨어져 혼자 배팅연습을 해야했다.

3월의 어느 휴일 두 아이와 오랜만에 외출을 하려던 그는 문득 연습이나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2군 훈련장을 찾는다. 1군 시범경기가 없어서일까 훈련장엔 공교롭게도 스기야마코치가 나와있었다. 백인천의 타격상황을 묻는 질문에 구보다 2군매니저가 딴에 위한답시고 "아주 잘 맞고 있다"고 뻥을 쳤다. 그래서 선 타석. 거짓말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안맞던 공이 펑펑 터져나갔고 바로 1군으로 콜업돼 나간 시범경기서 홈런을 2개를 쳐내고 만다. 그리고 그해 개막전부터 홈런을 치기 시작한 백인천은 시즌타율 .315로 리그 타격순위 3위에 오른다.

"인생에선 그런 순간, 그런 만남이 있다. 그 순간이 언젠가 온다는 것만 믿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70대의 중독자가 야구 후배, 인생후배에게 경험으로 전하는 충고다.

뇌경색, 반신마비란 병마와 불퇴전의 투지로 싸우던 중에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단다. 말로만 듣고 만나지 못했던 침선생이 불현듯 찾아와 막힌 혈을 뚫어주었고 오래된 팬이 찾아와 소금을 권해주었으며 4대를 이어온 한약사를 만나 어혈을 풀기도 했다고. 그렇게 건강을 회복했지만 1996년 뇌경색을 맞으면서 시작된 '건강 프로가 되자'는 그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건강을 잃어보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았지. 많은 사람이 마찬가지일 거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해봤고 성과를 보고 있는데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나눠야 마땅한 것 아뇨?" 백인천 타법은 불멸의 4할 기록을 남겼는데 백인천 건강법은 어떤 성과를 거둘까 궁금해진다.

백인천 감독의 평생을 관통하는 경구는 '노력자애(努力自愛)' 란다. 도에이 입단 당시 전통에 따라 유명한 스님을 초빙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는 글귀를 적어주었는데 당시 초빙된 태산(泰山)스님이 18세 백인천에게 건네준 글귀다. '노력하는 스스로를 사랑하라'. 그는 최근 같은 제목의 자서전을 냈다. 야구중독자이자 건강중독자인 자신의 얘기를 담았다. "의구심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고 자신의 중독인생에 촌평을 남긴 백감독은 "중독의 쾌감을 느끼려면 스스로 미쳐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참고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외롭고 고독한 싸움 끝에 맛보는 성취의 순간, 그 쾌감이야말로 인생의 가치가 아닌가 한다"고 말한다.

야구에 미쳤었고 이제는 건강에 온전히 미쳐있는 백인천 감독의 노안은 그래서 아름다워 보인다.

김재동 기자 zaitu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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