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서의 스윙맨]15년이 지났다. 그라운드는 안전한가

이상서 2015. 4. 21.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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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 이상서]

2000년 4월 1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LG의 경기. 롯데 임수혁은 2회초 유격수 유지현의 실책으로 1루에 나간 뒤 후속 타자인 우드의 우전안타 때 2루까지 진루했으나 곧바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사진은 동료들이 응급조치를 하고 있는 모습

당대 최강의 마무리 임창용은 9회에도 올라왔다. 이름값 답게 가볍게 원아웃을 잡아냈다. 점수는 5-3 삼성의 리드. 그 누구도 롯데의 패배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임수혁이 그것을 뒤바꿔 버렸다. 대타로 타석에 들어선 임수혁은 동점 투런을 때려내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놨다. 1999년 10월 20일의 플레이오프 7차전은 결국 롯데의 차지가 됐다. 11회말 세 타자를 전부 삼진으로 처리한 주형광은 포효했고, 롯데 선수들은 마운드로 몰려 갔다. 롯데의 날이었고, 임수혁의 날이었다.

임수혁. 그의 환호가 오래갈 줄 알았다. 이제 서른을 맞이한 롯데의 전도 유망한 포수인 임수혁의 질주는 반 년만에 멈췄다. 15년 전 이맘때, 2000년 4월 18일 잠실에서 열린 LG와 롯데전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임수혁은 2회초 유격수 유지현의 실책으로 1루에 나간 뒤 후속 우드의 우전안타 때 2루까지 진루했으나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그는 2루에서 갑자기 뒤로 쓰러져 다리를 떨면서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인근의 강남시립병원으로 후송된 임수혁은 산소호흡기와 심장박동기로 응급조치를 받았으나 뇌에 산소공급이 안돼 의식을 찾지 못했다. 만일 이날, 구장 안에 구급차가 대기했다면, 그래서 응급처치가 조금만 빨랐더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임수혁은 그때까지 10경기에 출장해 19타수 5안타(타율 0.263)를 기록했고 홈런 3개를 때리며 7타점을 올렸다. 롯데가 그동안 원하던 해결사의 모습이었다.

롯데 선수들은 다음 날 모자에 흰색 유성펜으로 20이라는 숫자를 새겨쓰고 경기에 나섰다. 김명성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도 마찬가지였다. 전날 쓰러진 임수혁의 등번호를 자신들의 마음에 담겠다는 의지였다.서로 그라운드와 병실에 따로 떨어져있지만 마음은 항상 함께 있겠다는 뜻이었다. 또 전날까지 팀 분위기를 리드하며 함께 뛰던 임수혁이 하루빨리 일어나 그라운드로 돌아와주길 바라는 염원이기도 했다. 김명성 당시 롯데 감독은 이날 경기에 앞서 "수혁이의 빠른 회복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수혁이몫까지 뛰자"며 선수들에게 당부했다.

2001년 4월 18일 임수혁의 날을 맞아 사직구장에서 임선수의 아들 세현군이 시구를 하고 있다.

롯데는 이듬해 4월 18일을 임수혁의 날로 정하고 입장 수익을 그의 가족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그리고 경기 당일, 롯데-LG전이 열린 사직구장 마운드에 롯데 유니폼을 입은 꼬마가 올라섰다. 등번호는 20번. 발을 높이든 뒤 힘차게 공을 뿌리자 1만 5천여명의 관중은 기립박수로 아이를 격려했다. 공은 원바운드로 들어갔고 LG 1번타자 유지현은 헛스윙했다. 시구를 한 소년은 바로 임수혁의 장남 세현(당시 7세)군이었다. 등번호 20번은 임선수의 것이다.

경기 10여 분 전 임수혁이 활약하던 모습을 담은 비디오가 전광판에 상영되자 부인 김영주 씨는 연신 눈물을 훔쳐냈다. 세현군의 동생 여진(당시 5세)양은 "엄마, 왜 울어" 라며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롯데 선수들은 왼쪽 어깨에 '임수혁 쾌유 기원' 이라는 띠를 붙이고 경기에 나섰다. 지난 1년간 약 7천만원의 병원비를 부담했던 롯데 구단과 선수단은 올시즌 안타나 승리 등 기록을 세울 때마다 일정 금액을 '임수혁 돕기' 성금으로 내기로 결의했다.

2002년 12월 9일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찬호가 임수혁의 문병을 하고 있다.

2000년 4월 27일 삼성 이승엽이 임수혁의 쾌유를 빌며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임수혁의 비극은 법정으로까지 이어졌다. 2002년 4월 16일, 임수혁 가족이 롯데를 상대로 8억원의 민사조정을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에 제출한 것이다. 임수혁 측은 "그동안 롯데측과 보상조건을 협의해 왔으나 법정소송 유효기간인 3년이 다 되도록 합의점을 찾지 못해 공소시효 마감 하루 전인 이날 민사조정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또한 경기장 안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홈팀이었던 LG에도 민사조정을 신청했다. 이상구 당시 롯데 단장은 "구단 측에서 제시한 보상조건과 차이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재판까지 갈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같은 해 7월 9일 임수혁의 가족에게 롯데와 LG구단이 공동으로 4억여원을 배상하기로 결정됐다. 서울지법 동부지원 민사21단독 박기동 부장판사는 "임선수가 병원에 이송될 때까지 심폐소생술 등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 뇌에 산소공급이 중단되면서 뇌사상태에 빠진 것이 인정된다"며 "롯데는 선수의 안전보호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이 있으며, LG도 홈팀은 상대팀에 대한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한국야구위원회(KBO)의 규약에 따라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10년 가까이 투병 생활을 이어오던 임수혁은 결국 호흡기를 뗐다. 2010년 2월 7일 오전 8시28분. 임수혁은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 임윤빈씨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며 "(임수혁이 쓰러졌을 때) 손자 세현이가 여섯 살이었는데 곧 고1이 된다. 키도 1m82㎝나 될 만큼 컸다. 손자가 상주가 될 정도로 자라줘서 기특하고 대견하다"며 10년을 버텨준 아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부인 김씨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려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그는 "많은 분들이 남편의 쾌유를 바랐지만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며 "유족을 대표해 많은 성원을 해주신 팬 여러분과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울먹였다.

유족들은 처음에는 고인이 국가대표 시절 꽃다발을 목에 걸고 귀국하던 영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된 사진이라 2000년 4월 롯데 유니폼을 입고 홈런을 때린 뒤 홈으로 들어오던 사진으로 교체했다. 특유의 환한 웃음이 담긴 사진이었다. 임수혁이 2루를 밟지 못한 지 정확히 15년, 한국야구는 그를 잊었는가. 설령 잊었다면, 똑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는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임수혁의 날에 시구를 했던 일곱 살의 그 아이는 어느덧 22살의 청년이 됐다.

2010년 2월 7일 그라운드에서 쓰러져 뇌사 판정을 받고 9년 넘게 투병해 온 롯데 자이언츠의 임수혁이 세상을 떠났다.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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