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임성일의 들숨날숨] 염기훈의 후반 44분 스루패스는 백패스였어야 할까

조회수 2015. 4. 20. 10:46 수정
음성재생 설정

이동통신망에서 음성 재생시
별도의 데이터 요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지난 18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시즌 첫 번째 슈퍼매치는 많은 화제를 낳았다. K리그가 자랑하는 히트 상품다운 반향이었다. 오랜만에 지상파를 통한 '명품중계'가 힘을 더해주면서 이슈가 됐는데, 역시 5-1이라는 믿기 힘든 스코어가 큰 몫을 했다.

4골 차이는 역대 슈퍼매치 최다골 차 타이기록이다. 1999년 7월 21일에 열린 맞대결에서 수원이 서울(당시 안양)을 상대로 4-0 완승을 거둔 바 있다. 수원이 기록한 5골 역시 슈퍼매치 한 팀 최다득점 타이기록이다. 2000년 4월 9일 5-4라는 대박 승부가 펼쳐질 때 수원이 5골을 넣은 이후 처음이다. 당시의 9골은 양 팀 합계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지난 18일 경기의 합계 6골은 역대 3위에 해당한다.

이처럼 슈퍼매치는 기억으로 또 기록으로 역사가 되는 경기다. 대한민국 프로축구에도 이런 라이벌 매치가 있다는 것은 꽤나 뿌듯한 일이다. 악몽 같은 패배를 당한 서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서 종료 직전 5번째 골을 만들어낸 수원의 플레이는 박수가 아깝지 않다. 73번째 슈퍼매치를 지켜보는 역사의 증인들 앞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전쟁에 비유되는 축구는 가장 원초적인 스포츠다. 공 하나만 두고 22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몸과 몸을 충돌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도구는 없다. 오로지 자신과 동료들을 믿고 상대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방식이다. 그래서 잔인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이런 축구의 '잔인한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슈퍼매치에서 나왔다.

4-1로 수원이 앞서고 있던 후반 44분이었다. 빅버드에 모인 수많은 수원 팬들은 조만간 울릴 휘슬 소리만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해 수원은 안방에서 열린 두 번의 슈퍼매치에서 모두 졌다. 2014년 4월 17일 첫 만남에서 0-1로 패했고 11월 9일 마지막 만남에서도 0-1로 졌다. 4번 충돌해 서울이 3승 1패로 앞섰다. 그 한풀이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대로 끝나도 묵은 체증이 뚫릴 것 같았던 때, 또 한 골이 터졌다.

염기훈과 정대세가 합작품을 만들었다. 염기훈의 기막힌 스루패스가 서울의 센터백 사이를 관통했고 쇄도하며 패스를 받은 정대세가 침착하게 마무리했다. 전광판에는 5-1이라는 스코어가 찍혔다. 치명타 정도가 아니라 대못을 박던 골이다.

축구는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나는 경기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1골이 터지는데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한 스포츠다. 추가시간을 감안하더라도 후반 44분에 4-1이면 승패가 뒤바뀔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결국 염기훈의 스루패스를 '많은 점수 차로 앞서고 있던 팀의 선수가 한 행동'이 발단이 된 이웃 스포츠의 '불문율 논란'에 대입한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비난의 화살을 쏘지 않았다. 외려 염기훈은 이날 최고의 선수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73번째 슈퍼매치의 슈퍼히어로는 염기훈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상대에 대한 예의'가 우선순위에 놓여야한다면 후반 44분 염기훈의 패스 방향은 서울 골문 쪽이 아닌 수원 쪽을 향해 시간을 흘려보냈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판단한다면 지켜보는 팬들에 대한 예의는 무시된 것이다.

당연히 인간적인 감정이 동할 수 있는 스코어다. 밖에서는 다 형동생이고 친구다. 하지만 필드 안에서는 달라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라이벌전은 이겨야한다'며 목 터져라 외치는 팬들 앞에서 상대가 안쓰러워 공을 돌리는 것은 기만이다. 지난해 자신들의 성지와 같은 빅버드에서 라이벌에게 두 번 모두 패하는 것을 보며 가슴에 피멍이 들었던 수원 팬들 앞에서 만약 염기훈이 백패스를 했다면? 이는 FC서울 팬들도 고마워하지 않았을 일이다.

지난해 여름 브라질에서는 세계 축구사에 다시는 없을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축구왕국' 브라질이 독일과의 4강에서 1-7이라는 믿기지 않는 점수로 패했다. 언제 어디서든 그리고 누구를 만나든 브라질 축구는 상대에게 공포를 주는 존재다. 그런데 2014년 7월 9일은 브라질 축구가 공포를 느꼈다. 우승을 노리던 스콜라리의 브라질 대표팀과 브라질 국민들은 악마를 보았다. 그리고 세상은 브라질이 처참하게 쓰러지는 역사의 현장을 보았다.

이날 브라질은 전반 30분 만에 5골이나 내줬다. 결승 진출을 자신했던 브라질 선수들은, 정말 떨고 있었다. 브라질의 황금색 유니폼이 그토록 나약한 노랑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런 브라질을 상대로 전차군단 독일은 후반에 2골을 더 넣었다. 후반 23분과 후반 33분 쉬얼레의 연속 추가골이 터졌다.

대회가 열린 장소가 브라질의 홈이었다. 남의 잔칫상을 엎는 것도 모자라 때려 부순 꼴이 됐다. 하지만 아무도 독일을 욕하지 않았다. 심지어 브라질 국민들도 독일 대표팀을 응원하는 진풍경이 나왔다. 꼬리를 내린 자국 선수들에 대한 분노였다. 동시에 마지막까지 공격하는 독일의 '잔인한 강함'에 대한 찬사였다. 끝까지 정정당당. 이것이 축구고 이것이 스포츠다.

축구는 속임수가 어렵다. 만약 속이는 게 가능하다면 그것은 일부러 열심히 뛰지 않는 것뿐이다. 5골을 넣을 수 있는데 4골만 넣는 것도 승부조작이다.

글= 임성일[뉴스1스포츠체육팀장/lastuncle@daum.net]

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