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재키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

스포츠한국미디어 이재호 기자 2015. 4. 1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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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한국미디어 이재호 기자] 매년 4월 15일(한국시각 16일)이면 미국 전역에서 열리는 메이저리그 15경기는 늘 기묘한 광경이 연출된다. 모든 선수들이 한결같이 등번호 `42번'을 달고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

이날은 야구팬 뿐만 아니라 온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서 언제나 살아 숨쉬고 있는 한 흑인 야구선수를 추모하는 날이다. 이름하여 '재키 로빈슨 데이'. 이제는 익숙해진 그라운드 풍경이지만 그저 야구의 기념일로 치부하기엔 너무 위대한 날이며 인물이다.

현지 시각 4월 15일이면 늘 보는 '42번'의 향연

살아 생전 인종차별의 벽을 뛰어 넘어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던 재키 로빈슨(1919~1972).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겪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의 인생은 곧 미국의 역사이기도 했다.

흑인을 짐승 취급했던 암울했던 시절에 조우한 재키 로빈슨과 브랜치 릭키

1919년 한 소작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재키 로빈슨은 UCLA 재학 시절 야구, 농구, 풋볼, 수영, 테니스 등 모든 스포츠에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는 화장실 사용은 물론, 식당이용 등 사소한 분야까지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들의 시대였기에 `니그로리그'만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절에도 시대를 역행하는 혁명가가 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을 우상으로 하고, 대학에서 코치로 활동하면서 팀의 유일한 흑인선수가 당하는 고통을 옆에서 생생히 지켜보면서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물겠다고 결심했던 브루클린 다저스(LA 다저스 전신)의 단장 브랜치 릭키가 그 주인공. 릭키는 아직 메이저리그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흑인선수를 영입해 가장 보수적이었던 야구판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릭키는 1945년 재키 로빈슨을 사무실로 불러 '검둥이는 꺼져' 등의 모욕적인 말에도 견뎌낼 수 있는 '배짱 있는 선수'가 될 수 있는지 다짐을 받았다.

재키 로빈슨이 계약서에 사인하는 모습

로빈슨의 나이 26세. 그는 백인들의 차별과 경기장에서의 차별 등을 굴하지 않는 선수가 될 것을 약속하며 마이너리그를 거쳐 1947년 고생길이 훤한 메이저리그 무대에 뛰어든 최초의 흑인선수가 된다.

42번을 달고 등장한 메이저리그 무대… 여전한 차별과 불이익

1946년 흑인선수 최초로 마이너리그에서 뛰며 백인들의 무대를 경험한 로빈슨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8년 전인 1947년 4월 15일 흑인선수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섰다. 로빈슨이 다저스의 '42번' 유니폼을 입고 뛰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2만7,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에베츠필드의 관중석에는 흑인 관중 1만4,000명이 들어차 그의 데뷔 무대를 환영했다.

그러나 누가봐도 눈에 띄었던 로빈슨은 경기장에서 관중들의 야유를 받는 것은 물론, 동료 선수들의 '우리는 재키 로빈슨과 함께 야구하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는 내용의 추방 탄원서, 상대 투수와 수비수들의 위협성 플레이, 심판의 명백한 오심 등의 불이익을 한 몸에 받아야했다. 그러나 릭키 단장과 했던 '반격하지는 않되 배짱 있는 선수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새기며 이를 악물고 뛰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그리고 감출 수 없는 실력

로빈슨은 빅리그에서 활약하며 전설로 회자되는 장면의 주인공이다. 1947년 6월 21일 신시내티 크로슬리 필드와의 경기에서 어김없이 '검둥이'라는 말 등으로 시작되는 모욕이 로빈슨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팀 동료였던 백인 유격수 피 위 리즈가 갑자기 로빈슨이 있던 1루로 향해 다가오는 기이한 행동을 했다. 그리고 리즈는 자연스럽게 로빈슨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웃으며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의 수비 위치로 돌아갔다.

이 장면에 충격을 받은 관중들은 야유를 멈췄다. '백인' 피 위 리즈의 이러한 행동은 로빈슨을 위한 배려였고 이 어깨동무 모습은 동상으로 제작되어 브루클린에 세워졌다. 이 모습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재키 로빈슨과 피 위 리즈의 어깨동무 장면의 동상

로빈슨의 실력은 감출 순 없었다. 데뷔 첫해부터 도루 29개로 리그 1위에 오르는 것은 물론 3할에 육박하는 타율(0.297)에 12홈런을 때리는 활약 속에 MVP투표 5위에 신인왕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기록했던 희생타 28개(리그 1위)는 그가 필드에서 자신보다 팀을 위해 뛰는 선수였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렇게 그는 서서히 야구장의 흑인 선수를 정착시켜 나갔고, 흑인사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미국사회를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었다.

베이브 루스가 야구를 바꿨다면 로빈슨은 미국을 바꿨다

로빈슨의 성공적인 데뷔 시즌 후 1948년에는 로이 캄파넬라가, 이듬해에는 돈 뉴컴베 같은 흑인선수들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기 시작한다. 조금씩 야구가 변화하고 있었고 미국 사회 역시 로빈슨의 의연한 모습을 본 뒤 인종차별에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로빈슨의 절정기는 1949년이었다. 타율 1위(0.342)에 도루 1위(37개), 타점(124개)과 안타(203개)에서 2위, 득점(122)에서 3위에 오르며 MVP를 수상한 것. 주루는 물론 타율, 타점 등 공격 전분야에서도 뛰어난 선수였던 것.

그래도 로빈슨의 최고의 장점은 영화 '42'에서 볼 수 있듯 빠른 발을 이용한 올라운드 플레이어로서의 능력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다 기록인 통산 19개의 홈스틸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메이저리그 10년간 로빈슨이 뛰어보지 않은 포지션은 포수, 투수, 중견수뿐이었다.

1956년 시즌이 끝나고 로빈슨이 유니폼을 벗을 당시에는 흑인선수의 숫자가 200여명까지 불어났다. 10년 전만 해도 총 400명의 메이저리그 선수 중 399명이 백인이었지만 절반 수준까지 흑인 선수들이 늘어난 것.

1997년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재키 로빈슨 데뷔 50주년을 기념해 4월 15일(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날)을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하고 이 날은 항상 그의 등번호였던 42번을 달고 모든 선수들이 그를 기리는 경기를 할 뿐아니라 42번은 전 구단 영구결번이 됐다. 2년전 마리아노 리베라(뉴욕 양키스)를 끝으로 더 이상 42번을 달수 있는 선수는 없게 됐다.

재키 로빈슨의 부인 레이첼 로빈슨이 재키 로빈슨의 기념사진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자리를 잡기까지는 '야구의 신'이라 불렸던 베이브 루스의 공이 컸다. 베이브 루스로 인해 홈런의 가치가 재조명받으며 야구가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군림하자 '농구에는 마이클 조던이 있다면 야구에는 베이브 루스가 있다'는 말까지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베이브 루스가 야구를 바꾼 건 맞다. 그러나 재키 로빈슨은 메이저리그에서 뛴 10년 동안 미국 사회를 바꿨다. 미국 사회가 바뀌면서 흑인을 대하는 전 세계인의 태도 역시 조금씩 바뀌었다.

2013시즌 메이저리그에 등록된 흑인 선수의 비율은 1959년(재키 로빈슨 은퇴 3년 후)이후 역대 최저인 7.7%에 그치며 또 다시 흑인 선수들에 대한 차별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내 야구 역시 외국인 선수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에 대한 문제는 한두 해 불거져 나온 것이 아니다. 현대인들에게 재키 로빈슨의 개척정신과 '다름'의 시선을 이겨냈던 의연한 태도,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 등으로 다시 한 번 울림이 전해지는 이유다.

사진= ⓒAFPBBNews = News1

스포츠한국미디어 이재호 기자 jay12@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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