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택의 제대로축구] 언제나 그랬듯 기성용이 있었다

홍의택 2015. 4. 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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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알을 놓(넣)다', 혹은 '알을 먹이다'. 볼을 지키고 선 그 짧은 순간에 상대의 수비 자세를 확인했다. 두 명이 달려드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가랑이 사이로 볼을 빼돌리던 여유란. 썩 만족스럽지 못 했던 지난밤 뉴질랜드전(1-0 승)에도 기성용(스완지)이 있었다. 차두리(서울)의 감동적인 은퇴식도, 이재성(전북)의 시원한 결승골도 팀 전체를 등에 업고 지탱한 이 선수 덕분에 가능했다.

지난 우즈베키스탄과의 평가전(1-1 무). 슈틸리케 감독은 흥미로운 수를 제시했다. 2선 자원 김보경(위건)을 한 칸 아래 배치해 한국영과 짝을 맞춘 것. 이정협(상주)의 부상에 기성용이 투입되면서 '수비형 미드필더 김보경' 플랜은 30분 가동에 그쳤으나, 모양새는 꽤 괜찮았다. 활발히 움직이며 왼발 패스를 뿌리던 플레이에는 김보경만이 만들 수 있는 장면이 존재했다. 단, 필히 거쳐야 할 질문 '기성용만큼의 무게감을 갖출 수 있느냐'는 물음에는 확답할 수 없었다.

기성용이 한국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근거 없는 망상은 아니다. 그간 대표팀이 주 무기로 삼아온 건 단연 '압박'이다. 체력적 요소를 극대화해 더 많이 뛰며 상대 숨통을 조인다는 이 개념은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이룬 4강 위업과도 밀접하게 엮여 있다. 하지만 기성용이 들어오면서부터 이 양상도 차츰 변하기 시작한다. 볼을 안전하게 소유하고, 경기 템포를 능동적으로 통제할 능력까지 탑재한 것.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이 어린 청년(당시 21세)을 주축으로 중원 뼈대 구성했다는 건 응당 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터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 갓 둥지를 틀었을 때만 해도 외줄을 타는 느낌이었다. 중앙 수비 앞에서 볼을 잡을 때면 행여 떨어지지는 않을까 불안했다. 실제 볼을 빼앗겨 부랴부랴 후퇴한 적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볼 지키는 노하우가 붙은 지 오래, 상대 공격수보다 몇 수를 앞서 판단하고 움직인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번 뉴질랜드전에서도 압박에 고전한 장면이 있기는 했지만, 여유와 자신감에서 나오는 안정감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볼을 방출하는 과정도 훌륭하다. 그간 모험적이고도 창조적인 전진 패스가 결여됐다는 비아냥도 샀으나, 기성용이 떠안은 임무는 팀이 앞으로 나아갈 '첫 길목'을 트는 것이다. 이를 90%에 육박한 패스 성공률로 해낸다는 건 팀에 있어 엄청난 버팀목이 된다. 좋은 위치를 읽으며 시야를 확보하고, 안정된 자세로 볼 받을 채비를 한 덕에 좋은 롱패스도 심심찮게 나온다. 전반 37분, 한교원이 달려들어 얻어낸 PK도 기성용의 오른발에서 시작됐다.

3선에 두 명을 배치하는 4-2-3-1 시스템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도 상황에 따라 전방 싸움에 가세해야 한다. 엄한 타이밍에 전진했다가 팀에 민폐를 끼칠 수도 있는 고난도 작업. K리거 때부터 공격적인 역할에 익숙했기에 상대 페널티박스 앞에서 힐패스를 시도하는 등의 감각은 살아있었다. 여기에 앞으로 나와 압박하는 투쟁적인 면모도 자주 보인다. 자세를 바짝 숙인 채 다리를 쭉쭉 뻗는 격렬한 수비가 아니라 체감하는 정도는 낮지만, 팀 내 상위권에 랭크된 활동량으로 수비에 공헌하는 바가 컸다.

세트피스 상황도 흥미롭다. 스완지 초년생 시절, 동료 데 구즈만에게 킥을 맡기고 본인은 박스 안에서 기웃대던 모습이 영 어색했으나 이젠 제법 맵시가 난다. 손흥민(레버쿠젠)의 오른발 코너킥. 한국영(카타르SC)이 골키퍼를 성가시게 하는 '바람잡이'가 된 동안 기성용, 지동원(아우크스부르크), 김영권(광저우헝다), 김주영(상하이상강)은 양 골포스트로 찢어 들어갔다. 볼을 가까운 쪽으로 바짝 붙였을 때, 기성용이 주로 보인 동선은 앞으로 나가며 잘라먹는 형태. 직접 머리로 연결하거나, 혹은 수비를 끌어내던 중 헤더를 기록하기도 했다.

기복 없이 제 몫을 해낼 자원을 보유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남들에게 보여주려는 쇼맨십 짙은 축구가 아닌, 온전히 팀 내 역할에 집중한 플레이를 한다는 건 이 선수를 지켜봐 온 이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대목이다. 과한 정의감에 팀 전체를 흥분 상태로 몰고 가던 과거와 달리, 혈기를 다스리며 중후함까지 얹고 있다. '리더는 묵직해야 한다'던 말을 몸소 지켜나가고 있는 기성용, 이제 그의 나이 스물 여섯이다.

글=홍의택

사진=윤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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