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두리 고마워] 차두리, 스스로 지운 차범근의 그림자

이현민 2015. 3. 31.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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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35)에게는 늘 '차범근(62)'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자신의 아버지이면서 한국 축구의 살아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태극마크를 달고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골(A매치 59골)을 넣었고, 독일 분데스리가에서도 전설로 남아 있다. '차붐'하면 독일 축구팬들이 다 알 정도다. 등번호 '11'은 차범근을 상징한다.

차두리는 어릴 때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차두리가 아닌 차범근의 아들로. 보는 눈도 많았고, 축구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참 쉽지 않았다. 포지션도 측면 공격수였다. 2001년 11월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았고, 이후 2002 한일 월드컵 때 4강 신화를 함께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뛰어난 피지컬을 앞세운 돌파와 드리블, 강한 슈팅까지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만 같았다.

이후 독일 분데스리가로 진출했다. 하지만 레버쿠젠, 프랑크푸르트, 마인츠 등에서 자리를 못 잡았다. 2006 독일 월드컵 출전도 무산 됐다.

절치부심한 차두리는 코블렌츠, 프라이부르크(이상 독일)에서 꾸준히 경기에 나섰다. 그리고 포지션도 공격수에서 오른쪽 수비수로 바꿨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허정무 감독의 부름을 받고 수비수로 발군의 기량을 펼치며 한국에 원정 사상 첫 16강을 안겼다. 1년 뒤 열린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3위에 오르는데 일조했다.

2013년 차두리는 돌연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FC서울로 전격 이적했다. 선수 생활을 K리그에서 마무리하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K리그에도 새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엄청난 내공과 리더십에 '역시' 차두리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승선할 뻔했으나 부상으로 홍명보 감독과 연을 맺지 못했다. 그렇게 차두리는 태극마크와 멀어졌다.

그런데 지난해 9월 슈틸리케 감독이 부임하면서 판세가 달라졌다.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주인을 못 찾은 오른쪽 수비에 차두리가 낙점된 것. 아직 더 뛸 수 있는 그를 슈틸리케 감독이 가만둘 리 없었다. 그리고 2015 호주 아시안컵에 나서 한국을 32년 만에 결승에 올려 놓았고, 값진 준우승을 이뤄냈다.

아시안컵 이후 차두리는 태극마크를 내려놓겠다는 뜻을 전했고, 슈틸리케 감독도 이를 받아들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그를 '레전드'라 칭하며, 그동안 대표팀에서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2015년 3월 31일, 등번호 '22'를 단 차두리의 마지막 40분이 흘렀다. A매치 76회 출전 기록을 남긴 채 현재가 아닌 과거의 선수가 됐다. 역대 6번째로 가장 긴 시간인 13년 4개월 동안 그는 화려하지 않지만, 대표팀에서 기량적 인성적으로 후배들이 잘 따를 수밖에 없는 선수였다.

피나는 노력 끝에 아버지의 그림자를 지웠고, '차범근 > 차두리'가 아닌, '차범근 < 차두리' 공식을 만들었다.

[인터풋볼] 이현민 기자 first10@interfootball.co.kr

Copyright ⓒ 인터풋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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