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집에서] 박세리와 Q스쿨 동기, 크리스티 커의 골프 인생
세상을 살다 보면 인연(因緣)이 깊은 사람들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몇 번을 마주치게 된다. 어찌 보면 그 순간을 향해 쉼없이 달려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절묘하게 접점이 이뤄진다. '우주에는 한 치의 오차가 없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30일 벌어진 LPGA투어 KIA클래식 최종라운드가 그렇다. 1977년생 동갑내기인 박세리와 크리스티 커는 Q스쿨 동기로 투어 18년차다. 최종라운드에서 그들은 올드팬 들의 기대와 달리 치열하게 경쟁하지 못했다. 전날 코스레코드 타이 기록을 작성한 박세리가 이븐파로 점수를 줄이지 못한 반면 커는 7언더파를 몰아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들은 1997년 LPGA투어 퀄리파잉 스쿨을 공동수석으로 통과하며 인연을 맺었다. 박세리는 이듬 해 약관의 나이로 메이저 대회인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을 연속 석권해 스타덤에 오른다. 요즘 '17세의 여제' 리디아 고를 능가하는 대활약이었다. 당시 한국선수로는 유일하게 투어에 뛰어든 박세리는 이후 10년 만에 45명의 한국선수가 뛰는 골프 영토를 개척했다.
94년 전미 주니어 메이저 대회인 오렌지볼 인터내셔널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커는 이듬 해 US 웨스턴 아마추어에서 연거푸 정상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프로무대에선 좀처럼 우승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동기인 박세리의 성공을 보며 절치부심하던 커는 2002년 롱스드럭스 챌린지에서 한희원을 1타차로 누르고 첫 우승을 거뒀다. 주니어시절 80kg이 넘는 고도 비만에 안경을 쓴 외모로 놀림의 대상이던 커는 이후 30kg을 감량하며 실력은 물론 외모로도 미국을 대표하는 간판스타로 성장했다.
KIA클래식 최종 라운드로 돌아가 보자. 공교롭게도 박세리와 커는 같은 조로 경기했다. 선두 이미림에 커는 3타차, 박세리는 4타차로 뒤진 채 최종라운드를 시작했다. 두 선수 모두 마음 속에 우승을 그렸다. 하지만 결과는 갈렸다. 전반에 버디만 5개를 잡은 커는 승부의 분수령인 13~16번홀에서 4연속 버디를 잡아내며 역전우승을 완성했다. 반면 박세리의 클럽은 의욕과 달리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18번홀에서 나왔다. 커는 챔피언 퍼트를 마친 뒤 그린 주변에서 기다리던 남편 에릭과 아들 메이슨의 축하를 받았다. 이 장면을 묵묵히 지켜 보던 박세리는 우승자 커를 축하한 뒤 쓸쓸히 경기장을 빠져 나갔다. 인생은 돌고 돈다. 승부의 세계, 특히 골프는 하루 하루 결과가 다르다. 이날의 주인공은 박세리가 아니었으나 다음 주인공은 박세리일 수 있다.
이제 박세리와 커는 4월 2일 시작될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인 ANA 인스피레이션에서 메이저 우승에 도전한다. 박세리로선 대단히 중요한 경기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커 역시 메이저 대회에서 두 번 우승했으나 이 대회를 제패하지는 못했다. 골프가 그렇듯 이들이 다시 우승 경쟁을 펼칠지, 아닐지는 신(神) 만이 안다. 커는 우승 인터뷰에서 "골프는 오늘처럼 언제나 내 인생에 특별한 순간을 선사한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는 박세리의 골프 인생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골프라는 스포츠 , 인생의 축소판 맞다.[헤럴드스포츠=이강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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