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예능이 미워요" 한국남자들 죽을 맛

채석원 기자 2015. 3. 30.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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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 요리 좀 해봐. 15분 안에 안 만들어도 돼. 해줄 수 있지?" 애인 자취방에 놀러가는 게 아니었다. 얼마 전 '냉장고를 부탁해' 재방송을 시청하며 "이야~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요리까지 잘하네"라는 감탄과 함께 장난스런 눈빛으로 자기를 위아래로 훑어봤던 애인은 일주일이 지나자 기어이 요리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몇 가지 말라비틀어진 채소와 신 김치, 냉동 생선 네다섯 마리, 거무튀튀한 돼지고기가 들어 있는 냉장고의 문을 열더니 눈을 말똥거리며 요리를 재촉하는 애인을 보며 P(40)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능 프로그램이 이렇게 얄미운 적이 있었던가.

'먹방'이 남자들을 궁지로 내몰고 있다. 지상파 뺨치는 시청률로 케이블TV 역사를 새로 쓰며 최근 종영한 tvN의 '삼시세끼'와 JTBC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성장한 '냉장고를 부탁해'의 공통점은 남자들이 요리사로 나선다는 데 있다. 독신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때문인지, 아니면 잘 생기고 유머러스한 데다 요리까지 잘하는 남자를 출연시킨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들 프로그램은 여성 시청자로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Y(여ㆍ38)씨는 "'삼시세끼'를 종종 재미있게 보고 있다"면서 "여자라면 모두 차승원 같은 남자를 데리고 살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차승원 부인이 전생에서 나를 구한 것 같다"고 했다. C(여ㆍ26)씨는 "원래 요리 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삼시세끼'나 '냉장고를 부탁해'는 뭔가 다른 것 같다. 요리보다 남자가 보인다"면서 "('냉장고를 부탁해'의) 최현석 셰프가 수줍게 웃는 걸 보면 허세마저 멋지게 보인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요리하는 남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프로그램이 남성의 가사 진출에 일조하거나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에 변화를 가져오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성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반면 남자들은 죽을 맛이다. 서울에서 열두 시간이나 떨어진 외딴 섬에서 아궁이와 숯불을 이용해 빵을 구워내는 차승원, 처치 곤란한 냉장고 속 재료로 마법을 부리듯 때깔 좋고 맛 좋은 요리를 뚝딱 내놓는 요리사를 보며 남성 시청자들은 요리 예능이 남자들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성토하고 있다. 실제로 남자들은 요리 예능을 보다보면 아내와 애인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진다고 푸념한다. 요리에 대한 관심이 취미를 넘어서는 사람이 아니고선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요리를 마치 간단하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보여주는 방송을 보며 소외감마저 느낀다는 남성도 있다. M(40)씨는 "나도 요리하는 걸 즐기는 편이지만 요리사가 아니고서야 방송에 나오는 요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나"라면서 "연애를 위해 요리까지 배워야 하는 세상이 온 거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M씨는 요리를 배울지 말지 고민하는 단계에 있지만 상당수 남성은 이미 본격적인 요리에 입문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G마켓에 따르면 최근 한 달(2월5일~3월4일) 동안 조리도구를 구매한 남성의 비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7% 늘었다. AK몰에선 지난 2월 주방용품ㆍ식기 카테고리의 남성 고객 매출이 지난해 동기 대비 130%가량 증가했다. 요리 예능이 단순 시청률을 떠나 주방기구 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된 것이다.

L(43)씨는 "남자도 마땅히 요리를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회사일로 바빠 아내 얼굴 보기도 힘든데 TV에서 나오는 음식들을 어떻게 끼니때마다 챙겨 먹을 수 있겠나"라면서 "TV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종일 뭘 먹을지만 고민하는 것 같다. 저런 생활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가능할 것 같나. 다 딴 나라 얘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채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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