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노동 개혁]내부 비리 고발 '괘씸죄' A등급 학예사 "열등" 낙인 퇴출

강진구 기자 2015. 3. 2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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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성과자 해고의 함정

▲ 낯선 부서·대기발령 반복… 손쉬운 해고 압박 수단 돼'취업규칙 개악 땐 노조 동의' 규정 완화되면 불안정 심화

정부 전시기념관 시설에서 학예사로 근무해온 ㄱ씨(56·여)는 고객지원부로 발령을 받은 지 채 1년도 안돼 지난해 7월 면직됐다. 입사 후 24년간 줄곧 학예사로 일한 그는 4차례 우수근무표창을 타고 2013년 상대 인사평가에서도 'A'를 받았다. 하지만 ㄱ씨는 고객지원부로 옮긴 후 10개월 만에 실시된 특별평정에서는 직권면직 대상인 '열등' 판정을 받았다.

학예사로 A등급 평가를 받은 ㄱ씨가 갑자기 낯선 고객지원부로 전보발령을 받고 불과 1년도 안돼 면직 대상자인 '저성과자'로 낙인찍힌 이유는 뭘까.

ㄱ씨는 "1989년부터 학예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업무수행능력이나 조직화합력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기념관장이 (내부 비리를 문제삼은 사람에게) 괘씸죄를 적용해 고객지원부로 인사이동을 시키고 근거 없이 낮게 근무평정을 부여한 것"이라고 말했다.

ㄱ씨는 2013년 8월 기념관장이 주재한 전체 직원회의에서 '전시실 하청업체 선정' 비리에 대한 감사원 감사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바로 다음날 고객지원부로 인사발령이 났다고 했다. 그 직후 사측은 기념관장 지시로 학예부 내부 감사를 실시해 2년 전 있었던 사소한 일까지 들춰내 3차례 징계했고, 고객지원부에서 일하는 ㄱ씨에 대한 특별근무평정에서 '현저한 근무능력 부족자'로 몰아 면직조치했다는 것이다.

ㄱ씨의 울분은 정부가 경영계 요구를 받아들여 노사정위원회에서 추진 중인 '저성과자 해고 가이드라인'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사용자 입장에서는) 교육을 해도 근무성과가 나오지 않는 사람의 경우 다른 업무를 맡기게 하고 그래도 업무성과가 안 나오면 계약을 해지할 필요가 있다"며 통상해고 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근무능력 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저성과자는 징계 대신 통상해고를 할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상 해고 요건을 좀 더 명확히 해야 노사 간 불필요한 마찰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운영 프로그램은 이 장관 생각과 달리 사용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을 찍어내기 위한 '손쉬운 해고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공단 중소기업들을 자문하고 있는 노무사 ㄴ씨는 "기업들이 저성과자 직무향상 컨설팅을 하는 경우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이나 골치 아픈 노조 조합원들을 찍어내기 위한 합법적 수단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8월 HMC투자증권은 저성과자 위주로 신설부서(ODS)를 만들어 운영하다 팀원 20명 중 17명이 노조 조합원으로 드러나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노동행위 판정을 받은 바 있다.

현대그룹 계열사에서 20여년간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ㄷ씨(56)도 정년을 2년 정도 앞두고 영업부서로 발령받은 후 저성과자로 찍혀 퇴직한 상태다.

그는 "2년 전 회사로부터 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사 승진 누락 후 회사를 그만둘까 생각하다가 고3과 대학생인 두 딸아이를 생각해 만년 부장으로라도 정년을 마치려고 했다"며 "하지만 회사는 낯선 영업부서로 발령낸 후 실적이 좋지 않다며 사표 낼 때까지 직무향상 프로그램 참여와 대기발령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저성과자 운영 프로그램이 해고 압박 수단으로 활용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요건'을 완화하는 방안도 밀어붙이고 있다. 사실상 사용자에게 쉬운 해고를 위한 또 하나의 무기를 쥐여주는 셈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해고·임금·정년 등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이익하게 변경할 경우 과반수 노조 대표나 노동자 대표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경영계는 현행 취업규칙 변경 절차가 급격한 경영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어렵게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노동부도 '맞장구'치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현재도 과반수 노조가 없는 사업장에선 사용자가 마음먹으면 형식적인 노동자 의견 수렴을 거쳐 손쉽게 집단적 동의를 받아낼 수 있는 현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일본계 외국계투자회사인 아데카코리아는 2012년 사내 노조가 만들어지자 종전보다 금지사항 6개, 징계사유 13개, 징계해고사유 26개 조항을 신설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절차를 밀어붙여 조합원들을 대량 징계했다.

경북동부경영자협회도 2012년 60세인 정년을 56세로 단축하는 내용의 취업규칙을 직원 16명 중 14명 동의를 받아 바꾼 뒤 동의하지 않은 직원을 해고시켰다.

노동자들은 왜 불리한 취업규칙 변경에 쉽게 동의를 표시할까. 대부분 동의서에 노동자 이름을 적고 옆칸에 동의 여부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위원회는 이런 식의 '공개 기명투표 방식'의 동의 절차에 대해 "의사표현의 한 방식에 불과할 뿐 사용자가 노동자들의 자율적이고 집단적인 의사결정에 개입하거나 간섭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대부분 사용자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법원이나 노동위원회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시 아예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입장이다.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노동리뷰 3월호에서 "취업규칙은 (단체협약과 달리) 사용자의 일방결정성이라는 문제점이 있음에도 사용자의 결정권을 계속 확대하는 것은 근로조건 대등 결정을 규정한 헌법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진구 기자 kangj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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