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르고 도망까지 10초.. 치밀하게 준비한 듯

도쿄/김수혜 특파원 2015. 3. 2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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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점퍼에 아이비색 바지, 얼굴과 목 전체를 가리는 검은 복면, 기민한 몸놀림.

25일 밤 11시 50분쯤 일본 도쿄 번화가 신주쿠 한복판에 있는 주일 한국문화원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범인의 인상착의다. 26일 대사관이 공개한 CCTV 화면은 총 1분30초 분량으로 그중 범인이 등장하는 부분은 약 10초 안팎이다. 범인은 재빠른 움직임으로 문화원 보조 출입구 앞에 다가와 미리 준비한 지포 라이터 충전용 기름을 내려놓은 뒤 쭈그린 자세로 라이터를 이용해 불을 붙였다. 화면에 잡힌 기름통은 대략 500mL짜리 생수병 정도의 크기다.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제품이다. 범인은 무릎 높이로 확 불길이 솟자 곧바로 몸을 일으켜 달아났다.

일본 수도 도쿄에 있는 우리 공관이 공격당했다. 19년 만에 처음이다. 1996년 7월 일본 우익 단체 회원 소가메 신이치(十龜伸一)가 차량을 몰고 우리 대사관 정문에 돌진한 적이 있다. 그는 미리 준비한 화염병으로 차를 태운 뒤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전단을 뿌리고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우익 단체 회원들이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거나 협박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직접 공관을 공격한 적은 없다. 도쿄 이외 지역의 경우 2013년 지쓰이 마사오(實井昌雄·당시 40세·무직)라는 사람이 고베 한국총영사관에 연막탄을 던졌다. 그는 "한국 정부가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지른 중국인을 일본에 넘기지 않고 중국에 돌려보낸 데 항의한다"고 범행 동기를 댔다.

이번 방화 사건 동영상은 주로 뒷모습과 옆모습이다. 앞모습이 스칠 때 확인할 수 있는 이목구비는 두 눈 정도다. 범인이 달아난 뒤 불길은 3분 정도 활활 타다 수그러들었다. 때마침 보조 출입구 안쪽에 근무하던 한국관광공사 직원이 퇴근하러 나오다 발밑에 타오르는 불씨를 보고 119에 신고했다. 한 시간 뒤 일본 요쓰야경찰서 직원 10여명이 현장에 왔다. 26일 오전 8시에도 한 차례 다시 나왔다. 요쓰야서 경비과장은 문화원 측에 "서장이 범인을 꼭 잡으라고 했다"고 전했다.

왜 문화원을 노렸을까. 대사관에는 주로 외교관·관료·기자 등이 출입하지만 문화원은 일반인이 드나든다. 일본 경찰이 상시 배치된 대사관과 달리 그동안 문화원 경비는 민간 업체에 맡겨 자체적으로 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그동안 우익 시위는 줄곧 대사관 앞에서만 벌어졌고, 또 경비가 너무 엄하면 일반인들에게 불안감을 줄 수 있어 이렇게 해왔다"고 설명했다.

일본 내 해외 공관 중 일본 경찰이 상시 배치된 곳은 미국·중국·러시아·한국 대사관뿐이다.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은 모두 일본과 영토 분쟁을 겪고 있다. 그중 우리는 독도 문제 외에도 식민지 지배에 얽힌 역사 갈등까지 겪고 있다.

일본 우익과 혐한론자들은 중년 이상이 많다. 과시적인 집단행동을 스스럼없이 한다. 자기네끼리 모여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인종차별적 혐오 발언)'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인 가게에 들어와 장사를 방해하는 일도 최근 2~3년 새 부쩍 빈번해졌다. 17년째 도쿄 신오쿠보에서 한국 음식점을 하는 A씨는 "혐한 시위대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식당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고 나가면 일본인 단골들이 무서워서 발길을 끊게 된다"고 했다. 이들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알레르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추악한 한국이 근거 없는 거짓말로 순결한 일본을 망신 준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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