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농구를 대표하는 두 슈터, '작은 탱크' 최경희와 '변코비' 변연하가 대결한다면?

2015. 3. 1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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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켓코리아 = 편집부] 맞수 열전은 한국농구를 대표했던 선수들의 가상 대결을 통해 두 선수를 비교해 보는 코너이다. 창간호에 실렸던 KBL의 조니 맥도웰(전 모비스)과 트로이 길렌워터(고양 오리온스)에 이어, 2월호에서는 '작은 탱크' 최경희와 '변코비' 변연하의 대결을 그려봤다.

▲ 작은 탱크' 최경희는 누구인가?

최경희는 서울 금호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눈에 띄어 향후 자신의 인생에 이정표가 된 '농구'를 시작했다. 당시 키는 149cm. 높이가 중요한 스포츠 종목인 농구에서 가당치도(?) 않은 키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담임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다. 최경희의 운동 신경을 알아보고 농구부 가입을 권했다. 남학생 못지않은 스피드와 운동 능력을 보고 최경희를 농구부로 강력하게 추천했다. 최경희는 그렇게 '농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최경희는 농구선수로 살아남기 위해 '슛'을 지독하게 연습했다. 장신들이 즐비한 농구 코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로 '슛'을 선택했다. 최경희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매진했다. 최경희는 개인 훈련의 90%를 '슛'에 치중했다. 틈만 나면 볼을 들고 체육관을 찾았다. 밤안개를 친구삼아, 슛 연습에 매진했다.

최경희는 무학여중(해체)과 은광여고(해체)를 거쳐 1984년 동방생명(현 용인 삼성)에 입단했다. 최경희의 키(166cm)는 여전히 작았다. 하지만 탁월한 슈팅 센스로 많은 실업 팀 관계자에게 러브 콜을 받았다. 최경희의 최종 안착지는 동방생명이었다.

최경희는 당시 모 신문사와 인터뷰에서 "정말 지독히 연습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눈을 감아도 림이 선명하게 나타나더라"고 말했다. 내성적이면서 조용한 성격에 십자수가 취미였던 평범한 소녀는 초고교급 슈터라는 명성을 얻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1984년 은광여고를 졸업한 뒤 삼성생명의 전신인 동방생명에 입단해 10년 동안 여자농구를 호령했다.

당시 최경덕 동방생명 코치는 "(최)경희는 코트에만 나서면 눈이 몰렸다. 눈에 림 하나만 꽉 찰 정도로 집중력이 강했다"고 회상했다. 최경희는 농구대잔치 시절 삼성생명(1992~1993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 선수로 활약했다. 선수 시절 최경희는 김화순(현 부산 동주여고 코치)과 오미숙(은퇴), 성정아(은퇴) 등과 짝을 이뤄 삼성생명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최경희가 삼성생명에 입단하기 전 여자 농구는 박찬숙의 태평양화학(해체)과 '거인 센터' 김영희가 버텼던 한국화장품이 양분했던 시대였다. 두 선수의 존재감이 여자실업 농구 전체를 좌지우지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리고 위에 언급한 김화순, 성정아와 함께 최경희가 합류한 당시 동방생명은 두 팀을 넘어서며 여자농구계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최경희는 김화순, 성정아와 함께 농구대잔치 통산 6번의 우승(1986, 1987, 1988, 1990, 1991, 1992)을 팀에 선물했던 장본인이었고, 최고의 슈터로 자리매김했다.

최경희를 평가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키워드가 있다. 바로 '배짱'이다. 최경희는 위계질서가 강했던 당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신인 시절 슈팅을 주저하지 않았다. 선배들은 최경희의 배짱에 어이없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최경희는 굴하지 않았다. 몸 곳곳에 배어있는 '슈팅 본능'을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압박에도 불구하고, 슈팅을 포기하지 않았다.최경희는 농구대잔치 여자부 통산 최다득점(3,939점), 3점슛(5,033개), 자유투(594개), 최다경기 출장(209경기) 등의 어마어마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야말로 '전설의 슈터'이다. 배짱을 가지지 못했다면, 전설 같은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 '변코비' 변연하는 누구인가?

변연하(35)는 WKBL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이제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지만, '변코비'를 시작으로 수많은 수식어를 자신의 이름 앞에 붙였다.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슈터라는 이유로. 1999년 용인 삼성생명 비추미에 입단한 변연하는 이후 박정은(현 용인 삼성 코치)과 이미선(현 용인 삼성), 김계령(현 용인 삼성)과 '국대 4인방'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농구 명가 삼성을 이끌었다.

그리고 FA 자격을 얻은 후 청주 KB스타즈로 이적했고, KB스타즈와 대한민국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현역 선수 중 최고로 꼽히는 클러치 슛팅력을 무기로 말이다. 한 번 터지면 무섭게 터지는 변연하의 3점슛은 WKBL 무대를 넘어, 두 번의 세계 대회에서도 폭죽처럼 3점슛을 터뜨렸고, 자신을 글로벌스타로 올려놓았다.

변연하는 부산 동주여고 졸업 당시 슈터로서 좋은 자질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삼성생명에 입단해 자신의 능력을 계속 끌어올렸다. 이미선과 박정은이라는 최고의 조력자 역시 변연하의 업그레이드에 한몫했다. 세 선수는 삼성생명의 1차 전성기였던 '최경희 시대'의 바통을 이어받아 WKBL 초창기에 우승과 준우승을 밥 먹듯 해냈다.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농구명가'의 자존심을 그대로 지켰다. 변연하는 중심에서 활약했다.

1998-99 데뷔 시즌 단 9분 만을 뛰면서 4.6점을 기록했던 변연하는 2000년 겨울 시즌 바로 프로에 적응했다. 이전 시즌에 평균 22분을 뛰면서 7.1점을 기록하며 영점을 조율한 변연하는 2000년 겨울 시즌 평균 25분이라는 플레잉 타임을 만들었고, 평균 10.5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작성했다. 데뷔 2년 만에 만든 놀라운 성장이었다.

변연하는 2001년 겨울 시즌부터 완전히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13시즌 동안 평균 13.7점이라는 놀라운 득점력을 과시하며 삼성생명을 이끌었다. 그리고 변연하는 2008-09 시즌을 앞두고 FA 자격을 획득했고, KB스타즈로 이적을 결심했다. 10년간 한 팀에 머무르며 생긴 매너리즘을 탈피하고자 했다. 변연하는 당시 "10년간 한 팀에만 있으면서 환경이나 플레이 스타일에 너무 익숙해진 느낌을 받았다. 변화가 필요해 이적을 결심했다"라는 인터뷰를 남겼다.

변연하는 KB스타즈 이적 후 첫 시즌 평균 17.2점을 만들었다. 2003년 여름 시즌(18.8점)과 2004년 겨울 시즌(19.5점)에 이어,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이후 KB스타즈를 상징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변연하는 그렇게 WKBL 시작과 함께 현재까지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슈터로 확실히 자리매김했고, 은퇴 이후에는 '전설'이 될 선수라고 할 수 있다.

▲ 센스와 정확도는 '최경희', 하드웨어와 슛 거리는 '변연하'

많은 전문가와 최경희를 지도했던 코칭 스태프, 그리고 당시 최경희를 경험했던 은퇴 선수들에게 최경희와 변연하의 비교를 부탁했다. 최경희의 팀 선배였던 차양숙 KBS N 해설위원과 팀 후배였던 정은순 KBS N 해설위원, 그리고 여자농구에 잔뼈가 굵은 박인규 KBL 감독관 등은 '대략 난감'과 비슷한 느낌의 답변을 내놓았다. 나머지 약 10명의 관계자 역시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딱 두 사람만 의견이 갈렸다. 유영주 현 KDB생명 코치는 최경희의 손을 들었고, 박건연 본지 발행인은 변연하를 선택했다.

유 코치는 "(최)경희 언니는 정말 농구를 잘했던 선배다. 슈팅이면 슈팅, 돌파면 돌파, 패스면 패스, 못하는 게 없던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 내가 경험했던 최경희는 정말 '상상불허'가 어울리는 선수였다. 정말 대단해 보였다. 감히 (변)연하와 비교가 안되는 선수"라며 사랑한다던 후배를 철저히 무시(?)했다. 박건연 발행인은 "일단 신장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최경희는 166cm, 혹은 더 작았다. 하지만 (변)연하는 180cm이라는 신장이 최경희와 다른 또 다른 무기이다. 농구는 신장이 무기인 운동이다. 다른 부분은 백중세라고 생각하고, 신장이 15cm 정도 더 큰 변연하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두 선수는 그렇게 쉽게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여자농구 신구(新舊) 세대를 대표하는 슈터'라는 점에 이견이 없어 보이는 답변들을 들을 수 있었다.

▲ 두 선수 공통점? 명품 슈터의 조건인 '배짱'

두 선수를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공통적으로 나온 단어가 있었다. 바로 '배짱'이었다. 배짱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혹은 농구에서 좋은 슈터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 중 하나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슈터치고 배짱에서 만점을 받지 않은 선수는 없을 정도이다. '필리핀의 영웅' 신동파(대한농구협회 부회장)가 그랬고, 대만에서 신사수(神射手)라 불렸던 '전설의 슈터' 이충희(전 원주 동부 감독)가 그랬다. 문경은(현 SK 감독)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자농구를 둘러봐도 다르지 않다. '배짱'은 김화순(현 동주여고 코치)과 이강희(현 KBL 스파터), 그리고 박정은(현 용인 삼성 코치) 등 당대를 쥐락펴락했던 슈터들에게 공통된 키워드였다.

동방생명의 팀 선배였던 차양숙 해설위원은 "(최)경희가 처음 입단했을 때 일이었죠. 막내로 게임을 나갔는데, 언니들이 패스를 하면 어떻게든 슛을 던졌죠. 정말 슛과 득점에 욕심이 많은 아이였죠. 처음에는 기가 막혔어요(웃음) 그래서 혼도 내고, 달래기도 해봤죠.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죠. 경희의 '슈팅 본능'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어요. 결국 저와 우리 팀이 지기로 했죠. 그때 '이 아이가 정말 좋은 선수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결국 최고의 슈터가 됐더라고요. 역시 슈터는 배짱이 있어야 하고, 경희는 슈팅에서 만큼은 최고의 배짱을 가지고 있었죠"라고 이야기했다.

변연하의 선배였던 박정은 삼성 코치는 차 위원과 비슷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연하가 처음 우리 팀에 들어와서 한 일이 '슈팅'이었어요. 놀랬죠. 패스가 자기한테 가기만 하면, 슛을 던지는 거죠. 처음에는 '머 이런 아이가 있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지나고 보니 인정을 하게 됐죠. 정말 겁 없이 던지는 슈팅을 머라고 할 방도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연하의 보조 역할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연하는 데뷔 2년이 지나면서 정말 대단한 슈터가 되더라구요. 배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죠"라고 이야기했다. WKBL 초창기 변연하와 함께 리그 최고의 쌍포를 이루었던 박정은 코치도 변연하의 배짱에는 혀를 내둘렀다.

같으면서도 다른 두 선수의 가상 대결은 '무승부'로 막을 내려야 할 것 같다. 많은 질문과 고증을 통해서도 두 선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이유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선수는 대한민국 여자농구를 대표하는, 그리고 지금의 여자농구가 많은 국민들이 즐겨보는 하나의 스포츠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된 토양을 제공한 장본인들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결른을 얻을 수 있었다.

현재를 돌아보면, 두 선수 정도의 클래스를 지닌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스타는 존재해야 한다. 프로가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스타 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WKBL에 최경희와 변연하의 대를 이을 슈터의 탄생을 기대해 본다.

글 = 김우석 기자, 사진 = 한국농구 100년사, WKBL 제공

[이 기사는 농구 전문 잡지로 2015년 1월 새롭게 창간한 더 바스켓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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