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最古)의 고고학 유적지 룩소르 "5000년 고대문명에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것은 겸손뿐"

이석연 변호사 2015. 3. 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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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연 변호사의 이집트·터키 인문탐사 기행⑤]

나는 이집트에서거추장스러운 문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거기서 모든 것을 꿈꾸었고, 꿈꾸었던 모든 것을실현시킬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내가 이집트에서 보낸 시기는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순간이었기에

이집트 원정을 통하여 5000년 이집트 문명의 신비를 벗기고 이집트학(學)의 기초를 세웠던 보나파트르 나폴레옹이 황제로 취임하기 전에 읊었던 시이다. 어찌 보면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이미 황제를 꿈꾸면서 당시 세계를 제패한 람세스 2세를 닮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카이로 일대가 대(大)피라미드로 연상되는 이집트 고왕국의 중심이라면 카르나크 신전이 있는 테베는 침입자 힉소스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집트를 건설한 곳이다. 파라오 중심의 역사에서 이집트 대중의 시대, 람세스 2세의 시대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곳, 바로 테베가 오늘날의 룩소르 일대이다. 3500년 전 나일강 상류에 번성했던 왕묘와 신전의 도시, 이집트 문명의 혼과 대중적 신화가 살아 숨쉬는 룩소르를 빼면 이집트여행은 나에게 별 의미가 없다.

- 룩소르 신전

어젯밤 카이로 신공항에서부터 1시간의 비행 끝에 룩소르에 도착했다(2013년 5월5일 오후 9시10분). 훈훈한 사막의 기운이 온몸을 덮친다. 카이로 기자지역과 더불어 이집트 최대의 관광명소이자 고고학 유적지 룩소르, 기원전 1550년부터 1075년까지 500여 년간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였던 테베가 있던 곳이다. 고대 세계 아니 현대를 통틀어서도 최고(最古) 품격의 문명을 이루었던 룩소르(Luxor)의 번영에서 화려함과 품격, 사치스러움을 뜻하는 영어 'Luxury(럭셔리)'의 어원이 파생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바다.

현지인 가이드의 마중을 받아 공항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나일강변 바로 앞의 윈터팰리스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이미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관광 도시답게 사람들이 거리에서 마차를 타거나 삼삼오오 모여 얘기꽃을 피우고 있다. 카이로와는 달리 고대 유적도시다운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가 감돈다. 호객꾼들의 극성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내 산책을 하려다가 너무 피곤해서 내일을 대비해 11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 카르나크 신전 입구 양쪽에 줄지어 선 양머리 형상의 스핑크스 행렬

'Luxury'의 어원이 된 룩소르새벽 객실 발코니에서 바라본 유람선과 크고 작은 선박이 정박해 있는 호텔 앞 나일강의 정경은 투명한 하늘에 물감을 물에 헤쳐 놓은 듯 뚜렷하면서도 환상적인 이국적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 전 호텔 바로 옆에 있는 룩소르 신전을 산책, 조깅 겸해서 외부에서 둘러보았다. 정말 웅대하고 고색창연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설렘과 호기심을 돋우고 있었다. 이곳은 오후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조식을 하러 가면서 호텔 1층 벽면 사진을 보니 유명인들이 꽤 다녀간 전통 있는 호텔이었음을 직감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각국의 저명인사들이 다녀간 사진을 흑백에서 컬러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담아 전시하고 있었다. 최근에만도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수상이 투숙한 사진이 걸려 있다.

8시경 먼저 왕들의 계곡을 찾았다. 룩소르 시내에서 애스완 방면으로 30여분 거리다. 관심 있게 공부해 둔 내용에다 가이드의 설명을 곁들이니 많은 부분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왕가의 계곡은 관광객 1인당 한 장의 티켓에 3군데 파라오 고분(무덤)의 관람만 허용하고 있다. 투탕카멘의 묘를 보려면 별도의 입장권(100 이집트 파운드)을 따로 구입해야 한다. 왕들의 계곡 입구에서부터는 사진, 비디오 등의 촬영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나는 람세스4세, 람세스6세, 메렌푸타 왕의 묘를 선택해 내부에 들어갔다. 화려한 벽화와 엄청난 크기에 말문이 닫힌다. 중국 황제들의 묘도 크고 웅장하지만 그들보다 1500~2000년 더 오래된 이집트 파라오의 그것에 비하면 오히려 비교를 삼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어 그렇게 기대하고 가보고 싶었던 소년왕 투탕카멘의 묘실로 향했다. 투탕카멘 묘실은 다른 파라오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다만 유일하게 도굴이 안 된 상태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고고학 유물들이 쏟아져 세계를 놀라게 하고 고대 이집트사를 다시 쓰게 하였던 것이다. 가장 초라하고 허약했던 한 파라오의 무덤이 이러할 진데 아직도 숨겨져 있는 수많은 파라오들의 무덤의 규모나 그 부장품은 상상을 초월한다. 고고학에서 발굴의 시대는 끝났다고들 하지만 나는 인간의 상상력과 호기심이 빛을 발하는 한 모험과 낭만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고 굳게 믿는 고고학의 아웃사이더이다. 세계 도처에서 그 지하에서는 수많은 부장품이 도전적인 모험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수천 점에 달하는 투탕카멘 묘실의 부장품들은 모두 어제 가본 카이로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묘실의 맨 끝 석실에 황금마스크를 벗겨낸 투탕카멘의 실제 미라와 황금관 두 개가 발굴 당시의 그 지점에 그대로 보존 전시되고 있었다. 바로 이 실제 미라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 온 것이다. 3400년 전에 어린 나이로 등극해 18세에 요절한 투탕카멘의 미라 앞에서 나는 잠시 묵념을 한 다음에 한참 동안 서성이면서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 카르나크 신전 입구 양쪽에 줄지어 선 양머리 형상의 스핑크스 행렬 사이로 계단을 내려가면 장엄한 열주(列柱)의 행렬이 이어지면서 이 신전의 건설자인 람세스 2세의 거상(巨像)이 나타난다.

1997년 62명 관광객 살해된 하트셉수트 신전왕들의 계곡을 빠져 나와 반대쪽 산등성이에 있는 하트셉수트 신전을 찾아갔다. 남장을 하고 수염을 단 채로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은 3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에는 별다른 벽화나 부조물은 없고 2층에 주요한 벽화 부조물들이 즐비했다. 3층은 그 뒤에 있는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뒷면을 장식하는 벽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50여 분간 관람을 마치고 신전 주변을 보니 마치 고대 세계로 온 것처럼 온통 발굴 중이거나 이미 발굴된 또 다른 작은 신전들이 주변에 즐비한 것을 보고 인간의 겸손함과 역사에 대한 경외감이 솟구친다. 저 멀리 나일강변을 따라 파랗게 물든 룩소르 평야는 과연 이곳이 사막 한가운데인가를 잠시 잊게 하고 있다. 황량한 사막의 산맥에서 문명의 최정점(最頂點)을 달성한 고대 이집트인들에 대한 관심과 존경심이 갑자기 더해간다. 왕들의 계곡을 비롯한 왕비의 계곡, 귀족의 계곡이 이처럼 50℃까지 기온이 올라가고 1년 내내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곳에 자리 잡은 것이 오히려 그들의 자취를 오늘에 남겨준 것임을 생각할 때 풍수지리적 관점에서도 묘터를 잘 잡았다고 생각된다. 비록 도굴을 막을 수는 없었을 지라도.

이때 나는 불현듯 하트셉수트 신전 앞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로 이곳에서 1997년 11월17일 이슬람근본주의 테러분자들에 의해서 62명의 관광객이 무차별 살해되는 참극이 발생했던 것이다. 테러분자들은 여왕신전의 왼쪽 언덕에서 갑자기 쳐들어 왔다고 한다. 그들은 아랍의 전통의상인 흰색 긴 옷 속에 무기를 감췄다가 갑자기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순식간에 문명의 참배지는 뜨거운 피로 물들었다. 신전의 왼쪽 언덕 쪽으로 따라 올라가 봤다. 산허리의 동굴 몇 군데가 눈에 들어왔다. 동굴은 아직도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래를 보니 광장에 있는 관광객들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테러분자들은 여기에 몸을 숨기고 기회를 봤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타는 듯한 뙤약볕 아래 선 채 비명에 간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면서 향후 내 여정의 순탄함이 이어지기를 기원했다.

(상) 남장을 하고 수염을 단채로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긴 하트셉수트 여왕의 신전에서는 1997년 11월 62명의 관광객이 무차별 살해되는 참극이 발생했다.

(하)윈터팰리스 호텔 객실에서 바라본 룩소르 나일강변. (사진제공 : 이석연 )

이집트문명의 백미 카르나크 신전5월 초인데도 섭씨 42℃의 찌는 듯한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다만 습기가 없고 바람이 불어와 그늘에서는 금방 땀을 식힐 수 있었다. 이어 하부 신전(Habu Temple)과 멤논(아멘호테프 3세)의 거상(巨像)을 보고 나니 어느덧 12시다. 호텔 윈터팰리스의 야외 가든에서 샐러드, 샌드위치, 빵 등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늘이지만 40도가 넘는 날씨라 후덥지근함이 몸을 감싸고 있다. 오후 일정은 더욱 기승을 부리는 더위 속에서 강행군을 했다. 저 유명한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을 둘러보는 코스다. 카르나크 신전,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나는 이집트문명 아니 인류문명의 백미(白眉)라고 말하고 싶다! 신전 입구 양쪽에 줄지어 선 양머리 형상의 스핑크스행렬 사이로 의장대의 사열을 받듯이 계단을 내려가면 장엄한 열주(列柱)의 행렬이 이어지면서 이 신전의 건설자인 람세스 2세의 거상(巨像)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아몬 신전의 134개의 거대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대열주실(Great Hypostyle Hall)은 더 이상 생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을 불허하고 있다. 1000년 후에 세워진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돌기둥은 이에 비하면 행랑채의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 돌기둥마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채색으로 새겨져 있다. 비록 많이 바래기는 했지만 채색의 아름다움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몬 대신전의 이미지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영화화한 동명의 <나일 살인사건> 화면을 통해 내게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나란히 도열하고 있는 양 조각상, 현기증이 날 것만 같은 돌기둥, 돌기둥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낙석들의 공포…. 바로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1시간 반에 걸친 카르나크 신전 관람에 이어 아침에 조깅하면서 담 밖에서 둘러봤던 룩소르 신전으로 향했다. 현재 카르나크 신전과 룩소르 신전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3㎞의 도로를 뚫을 계획이 진행 중이라고 가이드는 강조하고 있었다.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좌상(坐像)으로부터 시작되는 룩소르 신전은 카르나크 신전에 비하여 그 규모는 작지만 역시 람세스의 위대한 치적을 나타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신전 입구의 오벨리스크는 하나만 외롭게 서 있다. 다른 하나는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으로 옮겨 파리의 명물이 되었음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앞서 카르나크 신전 입구의 오벨리스크 하나는 이스탄불의 히포드롬 광장에서 관광객을 맞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뒤섞이고 강자가 약자가 되고 언젠가 약자가 다시 강자가 되면서 약탈과 지배를 반복하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후 4시경 호텔로 돌아와 로비 휴게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제 애스완으로 떠나는 오후 6시25분 열차를 타기 위해서 룩소르 역으로 갈 시간이다. 그리고 4시간 후면 이집트의 최남단에 위치한 애스완에 도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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