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실업난 속 졸업 하지 못하는 대학생들

정혜진 기자 2015. 3. 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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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건 내 몸뚱아리 하나, 믿을 건 내 노력밖에 없는 '청년실업 백만시대'

십수 년 전 대학교 졸업식 그 날, 애꿎은 엄마에게 그렇게 짜증을 냈더랬습니다. "점심 뭐 먹고 싶니"라는 말에, "난 배 안 고프니 알아서 하시라"고 했습니다. 졸업식날 가족과의 식사는 없었습니다. 지방에서 차 타고 몇시간 걸려 오셨던 엄마는, 하지만 단 한 마디 서운한 내색 없이 한 두시간 대학 교정에 서 계시다 그렇게 집으로 가셨습니다.

미안하고 면목없어 그랬습니다. 취직도 못 했는데…

나 아닌 다른 모든 이들은 행복할 것만 같은 졸업식에 가는 게 싫었고 그런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려야 한다는 게 싫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도 그런 딸의 마음을 아셨기에 말도 안되는 자식의 짜증을 다 받아주셨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학 졸업식 취재는, 하겠다고 손을 들긴 했지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습니다. 저에게 졸업식은 그닥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인데, 그때의 나를 돌이켜보면 취업에 대해 누가 물어보는 것 자체가 화나고 짜증나고 생채기가 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어렵게 취업준비생 이른바 '취준생' 두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한 학생은 지방 일반고를 졸업하고 서울 명문대 인문계열에 입학, 3년째 졸업을 미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넉넉치 않은 가정형편에 학비며 원룸비며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어 마음은 편치 않으면서도, 명문대를 다니는 자식이 취직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어떻게 해야할 지 난감하다고 합니다.

"요즘 스펙 5종세트니 7종세트니 취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모르세요. 그러다보니 고향으로 내려와서 공무원 시험 보라고 하시고. 그 시험도 쉬운 게 아닌데…"

졸업 미루기를 3년째, 겨우 올려놨던 토익 성적표 유효기간(2년)은 야속하게 끝나버리고 요즘 다시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컴퓨터 그래픽 관련 자격증 공부도 하고, 공모전 준비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취준생 이전에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 주중에는 학교에서, 주말에는 카페에서 7~8시간씩 알바를 합니다. 학점은 다 채웠지만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취준생이라, 아침 저녁 오고 가는 학교 정문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고 합니다.

"사회에 잘 진출한 애들이, 성공한 애들이 (저 문을) 나가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되게 부럽고…"

다른 여학생은 졸업을 1년 반째 미루고 여러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사이 2월 졸업식이 두 번 지나갔습니다. 8학기 만에 딱 졸업한 친구들은 과 동기 100여 명 중에 10여 명, 대부분이 졸업을 늦추기 때문에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두 번째 졸업식 때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졸업을 했다고 합니다. 다음 졸업식 때는 아마 같이 졸업하는 친구들이 없을 거 같아 졸업식을 안 갈 거 같다고 했습니다.

조심스레 물어봤습니다. 부모님들은 졸업식 오시고 싶어하시지 않는지…

"별로 졸업에 큰 의미도 없고 취업도 못하고 졸업했는데 무슨 졸업식 사진이냐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부모님들 입장에선 졸업식 되게 오고 싶어 하세요. 학사모 쓰고 같이 사진 찍고 싶어 하시고… 근데 취업을 못한 학생 입장에서는 그런 게 좀 부담되니까 부모님도 그걸 아시고 그냥 별로 말씀을 안 하세요."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청년 미생들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 세대'를 넘어, 이제는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해야 하는 '오포 세대'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성 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게 많습니다. 스펙 3종 세트에서 시작한 취업 필요 요건들이 5종에서 7종을 지나 '스펙종합세트'가 9종까지 늘어났다는 겁니다.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 조사 결과 청년들이 취업을 위해 쌓는 스펙은 학벌·학점·토익 등 '3종 세트'에서 어학연수·자격증이 추가된 '5종 세트', 공모전 입상·인턴 경력이 포함된 '7종 세트'를 넘어서 최근에는 사회봉사·성형수술까지 해야 하는 '9종 세트'로 확대됐다고 합니다.

두 학생을 만나며 질문과 답이 오가는 동안, 자꾸만 목소리가 떨려오고 두눈이 뜨거워지려고 해서 참느라 혼났습니다. 잊고 있던 그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엄연히 나이 제한이 존재하던 시절에 여자 나이 스물 아홉, 서른을 두 달 남긴 그 때. 청년실업이라는 거대 담론이 막상 나의 문제가 됐을 때 깊이를 알 수 없던 하루 하루의 불안감, 가진 거라곤 내 몸뚱아리 하나, 할 수 있는 거라곤 노력밖에 없던 그 시절, 이 청년들도 지금 그런 시절을 살고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청년 실업 백만 시대, 대학 졸업생 2명 중 1명은 백수, 15세에서 29세 사이 청년 30%가 실업자 또는 비정규직. 이 숫자에 뭉뚱그려진 '미생' 한명 한명에게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을 겁니다. 제가 만난 두 여학생처럼 말입니다. "다음 졸업식에는 행복하게 웃고 싶다"는 그들의 소박한 소망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 청년 백수 1백만 시대…씁쓸한 대학 졸업식

▶ "졸업생 2명 중 1명은 백수" 씁쓸한 졸업식

정혜진 기자 hji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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