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북한산·보수의 청계산.. 성난 민심 쩌렁

김이삭 남상욱 안아람 채지선 김현빈 장재진 박주희 김민정 정준호 입력 2015. 3. 4. 04:53 수정 2015. 3. 4.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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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통수치는 정부.." 산에서 들어본 민심

청계산 민심 "대통령에 실망했어요"북한산 민심 "살기가 힘들어요"

'3450서울산악회' 회원들이 지난달 28일 서울 북한산 사모바위 인근에 모여 간단한 식사를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청복회' (경복고 동창회 모임) 회원들이 지난달 28일 서울 청계산을 오르고 있다. 밝지만은 않은 세상사 때문인지 발걸음들이 가볍지 않았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산은 안식처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네 이웃들은 육신을 단련하고 또 위안을 얻으려 산을 찾는다. 정상을 향한 걸음걸이는 비슷하지만 산을 찾는 이유는 제 각각일 터. 봄을 맞아 등산객들이 들려주는 산상민심(山上民心)인 산심(山心)이 궁금했다.

지난달 28일 한국일보 사건팀 기자들이 각각 서울 강남ㆍ북을 대표하는 청계산과 북한산을 둘러 봤다. 두 산은 등산객들 사이에서 '보수의 산'과 '서민의 산'으로 불리는 곳. 정치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부터 세태 비평과 삶에 대한 하소연 등 세상 사는 얘기가 등산로 초입에서 정상까지 골고루 깔려 있었다. 민심은 정치인들이 찾는 재래시장의 '바닥'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산 너머 산에도 있었다.

사진작가로 일한다는 40대 주부는 "만원 짜리 한 장 들고 가서 지금 살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간 20대 여성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등록금 얘기를 하면서 연신 긴 한숨을 내쉬었고, 수십 만원에서 한 달 월급에 맞먹는 수백 만원을 추가로 내라는 연말정산 폭탄에 직장인들은 헛웃음만 보였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도 돌아선 보수의 청계산

청계산은 '보수의 산'이다. 서울 강남과 경기 분당, 과천에 거주하는 장년층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청계산을 오른다. 젊은 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안락한 노후를 즐기려는 이들이 많다. 당연히 보수 정부에 대한 충성도는 굳건하다. 하지만 요즘 청계산 민심도 묘하게 변해 있는 분위기였다.

청계산 옛골 등산로 입구에서 만난 유동균(62)씨는 대뜸 "기대했던 대통령에게 실망했다"고 했다. 세상살이 궁금증에 대한 첫 답변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취임 초 국정수행 지지율이 67%에 달했던 박 대통령이 최근 30%대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는 "대통령에게 10점 만점에 4점 정도, 낙제점을 주고 싶다"고 했다.

왜 그럴까. 유씨 일행은 그럴 듯한 '정치 비평'을 쏟아냈다. 이들은 서울 경복고 동문으로 산에서 가까운 강남 거주자를 중심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산행을 하는데, 요즘 들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공유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고 했다. 의류사업을 하는 조용원(62)씨는 "나도 많이 줘봐야 5점이나 주겠다"며 "영남사람, 군이나 법조인 출신만 쓰지 말고 두루두루 사람을 넓게 써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박 대통령에게 집중됐던 '깜깜이 인사'에 대한 불만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다 지금은 건설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양기흥(61)씨는 "경기가 지금 최악이라는 걸 (정부가) 아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경제를 살리겠다면서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는 건 정말 어불성설이다. 불법을 바로잡는 게 당연한데, 그걸 대책이라고 내놓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다"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격앙돼 있었다.

이번 정부 비판대상에는 연말정산도 단골 메뉴였다. IT관련 업체에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모(52)씨. 그는 추가 납입해야 할 세금이 작년보다 40% 늘었다고 했다. 이씨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고 성토했다. 이씨는 소득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금 부담을 가중시키겠다는 연말정산 개편의 취지는 이해가 간다고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갑자기 돈을 많이 내라고 하니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조삼모사 우화에 등장하는 원숭이꼴이 된 거 같아 불쾌하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자신을 극우파라고 과하게 소개한 조모(75)씨도 연말정산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보완 법안을 내놓겠다는 정치권을 향해 "이랬다 저랬다 그러니까 국민들이 나라를 믿을 수 있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등산객 한 무리에서는 "스님을 모셔오면 청문회 걱정은 없을 텐데"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이완구 국무총리 등 연이은 고위 공직자에 대한 청문회 검증 논란을 비꼬는 말이었다.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으로 결정돼 폐지된 간통죄에 대한 솔직한 심경도 읽혀졌다. 이른 등산을 온 오모(39)씨는 막걸리 한 잔을 들이키며 "사랑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 애당초 나라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었다"고 폐지 찬성 입장을 드러내자, 김모(39)씨는 "이제 간통을 하고도 위자료 주면 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으로 나올 것 아니냐. 처벌할 건 처벌해야 한다"고 팽팽히 맞섰다.

팍팍한 삶 토로하는 서민의 북한산

북한산은 정치를 화두에 올리기보다 팍팍한 살림살이 같은 삶과 직결된 아우성이 주를 이뤘다. "강남 쪽 사람들이야 사는 게 여유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여기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먹고 사는 게 중요한 서민들 아니겠느냐"는 어느 등산객의 진단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초등학교 동창모임을 왔다는 김모(46ㆍ여)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안 그랬는데, 요즘은 재래시장을 가도 물가가 너무 비싸서 함부로 지갑을 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최근 몇 달 동안 '제로'(0)에 가까운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는 언론 보도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얘기다. 그러자 장모씨가 끼어 들어 "애들 사교육비는 왜 그렇게 올라가는 건지. 주부로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주부 등산객들은 "우리도 일하고 싶다. 주부를 위한 일자리 좀 많이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잊지 않았다.

일자리에 대한 불안감은 청계산에서 좀처럼 듣기 어렵던 주제였다. 정년을 앞두고 있다는 회사원 신모(55)씨는 "퇴직 후에 재취업하는 게 어렵다"며 "자영업을 하려고 해도 만만치가 않고 자칫 은행 대출 받아서 뭔가 하려다가는 폭삭 주저앉게 될까 무섭다"고 털어놨다. 자영업을 하고 있는 김모(61)씨는 "경제가 죽어 있으니 요즘은 하루 5만원도 못 챙기는 날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청계산에 비해 등산 인구가 많은 북한산은 대학생들도 많이 찾았다. 이들의 최대 고민은 역시 높은 등록금. 이화여대 4학년인 이곤지(24)씨는 "취업도 취업이지만 반값 등록금 얘기를 친구들과 많이 한다"며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는 그렇게 얘기하더니 등록금이 고작 2% 내렸고, 대학원은 오히려 올라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말정산 논란, 담뱃값 인상 등을 거론하면서 "만만한 게 월급쟁이"라는 직장인들의 불만은 상당했다. 회사원 최모(34)씨는 "회사는 어렵다고 월급 안 올려주고, 나라는 돈 없다고 세금 올리고 하는 걸 보면서 동료들끼리 '폭동이라도 일으켜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가끔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사원 정모(31)씨는 "주변에 담배값이 오르면서 끊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지만 결국 북한산을 찾는 이유는 "사는 게 힘들어서"다. 도봉구에서 왔다는 40대 등산객은 최근 연이어 일어나 총기 살해 사건을 두고 "원인이 다 돈 때문이지 않았나. 돈이 뭔지, 오죽했으면 형제에게 총을 들이댈까. 다 살기가 팍팍해서 그렇다"고 했다.

역대 정부의 산상민심은

보수의 산 청계산에서 확인한 이번 정부 비판의 정도를 이명박(MB) 정부 때와 비교하면 시기적으로 1~2년 앞서 있다. 한 등산객은 "MB정부 초기에 청계산의 산심(山心)은 10년 만에 보수정부를 탄생시킨 일로 화기애애하기까지 했고, 3,4년이 지나서야 지금 정부에 대한 수위의 비판론이 나왔다"고 전했다. 현 정부 지지기반이던 보수층들이 일찍 마음을 돌리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노무현 정부 때 청계산에서는 초기부터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으로 등산객들이 서로의 친밀감을 확인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에는 모르는 등산객들조차 대통령 탓을 하는 말로 친교를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산의 경우 청계산처럼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아 역대 정부 별 민심이반의 정도를 비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북한산 등산객들이 팍팍해진 삶을 토로하며 정치권을 향해 던지는 냉소가 어느 정부 때보다 차갑다는 것을 확인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사건팀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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