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짱·미녀' 스타라 부러워? 눈물나게 힘들어요

조회수 2015. 3. 5. 11: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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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짱'이라는 말은 개인적으로 삶에 적잖게 영향을 준 단어다. 얼굴이 잘 생겨서는 절대 아니고, 스포츠 기자라는 직업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 직장이던 스포츠 전문지의 작문 시험의 주제가 바로'얼짱'이었다.

10여 년 전의 일이었으니 아마도 그 즈음부터 얼짱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아니 이미 유행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어렴풋한 기억에 중국 당나라 때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판단하던 기준인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더듬어 주제와 연결지었던 것 같다.

단지 요즘 세상에 만연한 외모 지상주의의 상징적 표현으로만 비판할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인물 판단의 첫 손에 꼽혔던 게 신수였다는 점을 강조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논지로 글을 풀어갔던 기억이 난다. 비속어로 하찮게만 볼 것이 아니라 새 단어를 만드는 신세대들의 재치도 한번쯤 살펴보자고 했던 문장도 떠오른다.

< 스포츠 스타 중에는 빼어난 외모를 갖춘 선수들이 적잖다. 종합격투기 박지혜, 송가연, 당구 차유람, 농구 우지원, 배구 고예림, 곽유화, 농구 신지현, 홍아란(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등이다. 하지만 외모만이 아닌 실력에서도 인정받기 위해 더 피나는 노력을 한다.(자료사진) >

얼기설기 작문을 마무리했는데 어쨌든 합격이 됐다. 그래선지 그렇게 시작한 기자 생활에 '얼짱'이라는 말을 꽤 많이 쓴다. 사실 멋쩍을 때가 적지 않다. 취재 분야인 스포츠란 선수가 가진 운동 능력과 기량, 재치, 감각 등을 또는 이들이 모여 전술을 종합적으로 겨루는 것인데 얼굴만 보고 해당 선수를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빠르게 그 선수를 독자들, 혹은 시청자에게 소개할 수 있다면 제일 효과적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동서와 고금,남녀와 노소를 막론하고 외모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표현, 별명을 가진 선수들은 쉽게 대중에게 인식된다. 단숨에 인기 스타가 되기도 한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이른바 '얼짱 스타'들을 여럿 봤다. 출중한 외모로 확실하게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선수들이다.

가장 최근에 본 선수가 바로 요즘 뜨고 있는 종합격투기 선수 박지혜(25 ·팀포마)다. 어제(2일) 봤다. 2년째 진행하는 CBS노컷뉴스 스포츠 팟캐스트 '뉴 스토커'에 그가 게스트로 출연했다. '얼짱'이라는 말이 진심 어울리는, 연예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외모에 스튜디오가 순간 환해졌다. (전날 2시간밖에 못 잤다는 패널 KBS N 스포츠의 모 남자 아나운서는 어느 때보다 활기에 넘쳐 녹음에 열중할 정도였다.)

< '걸그룹 해도 되겠네' 박지혜(왼쪽 두 번째)가 2일 CBS노컷뉴스 스포츠 팟캐스트 '뉴 스토커' 녹음 전 스튜디오에서 패널들과 기념 촬영을 한 모습. 필자가 살짝 앞에 섰지만 박지혜는 일반 남성보다 얼굴이 반쪽일 정도로 작다.(자료사진) >

이쯤 되면 살짝 의심이 간다. 최근 뜨거운 종합격투기의 인기를 빌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뒤 연예계로 가지 않을까 싶은, 색안경이 절로 씌워진다. 축구, 야구 등 종목은 다르나 잘 생긴 외모를 믿고 그런 식으로 옮겨간 몇몇이 떠오르기도 한다. (크게 빛을 못 보거나 불미스러운 일로 좌초되기도 한다.)

하지만 박지혜는 완강했다. "그럴 거였으면 결혼을 하지도 않았다"는 날카로운 반격으로 한방 먹였다. 박지혜는 같은 종합격투기 선수인 김지형(29 ·팀 포마)과 2013년 웨딩마치를 울렸다.(이 소식은 적잖은 팬들도 울렸을 것이다.)

'얼짱'이라는 말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자신의 전부는 아니라고 강조했다.박지혜는 "외모 덕에, 여자이기에 더 주목을 받는 것은 맞다"면서 "하지만 얼짱이 아닌 종합격투기 선수 박지혜로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얼굴은 맞아서 부어도, 부러져도 상관이 없다"는 박지혜는 스포츠 선수로서 실력과 내면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은 것이었다.

< '얼굴 상태보다 승리가 더 중요하죠' 박지혜가 지난달 프로 데뷔전 이후 멍든 두 눈에도 승리에 만족하는 포즈를 취한 모습.(자료사진) >

'당구 얼짱' 차유람 역시 그런 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지난 2006년 6월 차유람은 당시 세계적인 당구 스타인 '독거미' 자넷 리와 트릭샷 대결을 펼쳐 세간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빼어난 외모와 실력을 겸비한 차유람은 그날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1위를 차지하는 등 자넷 리보다 더 큰 관심을 모았다.

이후 차유람은 그해 도하,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뽑히는 등 실력도 인정받았다. 비록 메달은 아쉽게 따내지 못했지만 여러 차례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여자 당구계를 대표하는 스타로 거듭났다.

그런 그에게도 콤플렉스가 있었다. 바로 '당구 얼짱'이라는 타이틀이다.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은데 얼짱이라는 굴레가 너무도 끈질기다는 것이다. 속상해서 운 적도 있다고 했다. 5년 전 전국체전 당시 차유람은 "얼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녀 성적이 안 나오는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도 했다"며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털어놓았다.

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차유람은 당시 체전 우승을 차지한 뒤 "얼짱이 아닌 잘 치는 당구 선수라는 수식어를 달고 싶었다"면서 "인정을 받고 싶어 더 간절히 훈련했고 지금은 그런 수식어가 도움을 준 것 같다"고 비로소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 '저 실력으로 인정 받고 싶어요' 지난 2006년 세계적인 당구 스타 자넷 리와 트릭샷 대결로 순식간에 얼짱 스타로 떠올랐다. 사진은 당시 앳된 모습.(자료사진) >

최근 여자프로농구(WKBL)에서 뜨고 있는 신지현(하나외환), 홍아란(국민은행) 역시 '얼짱'이다. 올스타전에서는 둘이 따로 드레스를 입고 '거위의 꿈'을 합창한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공연을 앞둔 노래 연습부터 취재진이 몰릴 정도였다.

홍아란과 신지현 역시 올스타전 때 잠깐의 외도(?)를 마친 뒤에는 한결 같았다. "외모보다는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고, 뒤처지지 않는 기량을 갖추고 싶다"는 다짐이었다.

지난 시즌 프로배구 여자부도 비슷한 듀오가 있었다. 바로 곽유화(흥국생명), 고예림(한국도로공사) 등 얼짱 선수들이 올스타전에서 비보잉을 선보였고 화제를 모았다.

'얼짱' 선수들은 주로 비인기 종목에서 자주 거론되고, 기자들도 자주 용어를 쓰는 듯 싶다. 메이저 스포츠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된 종목이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얼짱'만큼 좋은 무기는 없다. 탁구 서효원(한국마사회), 펜싱 김지연(익산시청), 수영 정다래(은퇴) 등이다. (WKBL과 여자 프로배구 역시 프로이긴 하지만 야구, 축구, 남자 농구, 배구 등에 비하면 주목도가 조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 '노래는 이번 한번뿐이에요' 국민은행 홍아란(왼쪽), 하나외환 신지현이 올 시즌 여자프로농구 올스타전에서 듀엣 공연을 하는 모습.(자료사진=WKBL) >

남자 선수 중 단연 최고의 얼짱으로 꼽혔던 농구 스타 우지원 현 해설위원도 이런 서러움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연세대 시절 황태자로 군림하다 프로에서 와서 고전했던 우지원 위원은 지난 2006-07시즌 당시 모비스에서 프로 10년 만에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우승 뒤 우 위원은 "그동안 들어온 미남슈터라는 말은 어쩌면 내게 굴레였던 것 같다"면서 "10년 동안 외모만 앞세운다는 말을 듣고 항상 저평가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이번 우승으로 실력을 인정받는 것 같아 후련하다"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10여 년 전 언론사 시험 작문의 마지막은 "신언서판은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고 외모와 말솜씨, 문필, 판단력까지 이 네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한 인물이 완성되는 것"이라면서 "얼짱뿐 아니라 말짱, 글짱, 맘짱도 돼야 한다"는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귀결로 흘러갔던 기억이 난다.

'얼짱' 스포츠 스타도 마찬가지일 터. 여자인 이상, 혹은 남자라면 사람인지라 잘 생겼다는 말에 기분이 싫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모만 번지르르하고 실력이 없다"는 평가를 듣는다면 기분이 '짱' 나쁠 것이다.

그래서 더 속이 상한 채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더 뛰었을 것이다. 만약 얼짱 선수들이 자기 분야의 정상에까지 섰다면 어쩌면 그 누구보다 더 많은 땀과 노력을 쏟아부었을지 모를 일이다. 성적과 외모를 떠나 스포츠 선수는 노력하며 땀을 흘릴 때 그 얼굴이 바로 '얼짱'이다.

글=임종률 CBS노컷뉴스 체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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