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겨울 넘기지 못하고..' 태국인 노동자의 죽음
고된 노동·추위·빚 '삼중고'…지난해 늘어난 불법체류자 92%가 태국인
(서울=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얼른 돈 벌어서 빚갚을 생각만 했지 몸 챙길 생각은 못했을 거예요."
지난 22일 전북 정읍에 살던 태국인 노동자 A(46) 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지인은 "날씨가 안 좋아 일을 못 나가게 되면 걱정이 많았다"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이주노동자가 이 땅을 떠났지만 생계를 위해 한국으로 향하는 발길은 점점 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낯선 기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의료사각지대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 차가운 이국땅에서 맞은 죽음 = A 씨가 쓰러진 건 22일 오후 6시께.
A 씨는 숙소에서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다 갑자기 쓰러졌다. 119가 와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의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검시 결과 사인은 허혈성 심장질환(심장마비).
경찰 관계자는 "특별한 외상은 없었다"라며 "A 씨가 5개월 전 한국에 온 뒤 지인들에게 '몸이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라고 전했다.
불법체류 신분이었던 A 씨의 한국 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A 씨는 지난해 가을 3개월 단기 무비자로 한국에 오자마자 일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몸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A 씨는 입국 전 태국에서 브로커에게 우리돈 300여만 원을 건네고 한국 취업을 알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A 씨는 브로커 비용을 마련하느라 태국의 지인에게 빚을 졌고, 한국에서 번 돈은 대부분 빚을 갚는 데 들어갔다.
하지만, 전북 지역의 양파와 배추 농장 등을 돌며 일하며 받는 돈은 한 달에 100만 원이 채 안 됐다. 거기에 태국에 있는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지친 몸을 끌고 일을 했지만 A 씨의 계좌엔 장례비용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A 씨의 시신은 닷새 동안 영안실에 머물다 지역단체가 화장비용을 지원하면서 비로소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 '의료 사각지대' 불법체류자 급증 = A 씨처럼 이주노동자들은 낯선 생활 환경에서 고된 노동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은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혹독한 추위까지 견뎌내야 한다. 기후에 적응하기도 전에 열악한 노동 환경에 노출되다 보니 각종 질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주민 의료지원단체 희망의친구들 이애란 의료팀장은 "몸이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강도의 노동을 하다보니 뇌출혈이나 심장질환으로 쓰러지는 경우들이 생긴다"라며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건강관리가 힘든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과거에도 이주 노동자들이 돌연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최근 불법체류자의 급증은 이주노동자의 건강에 대한 우려를 키우고 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불법체류 외국인은 2013년 18만3천106명에서 지난해 20만8천778명으로 14% 증가했다. 이는 22만3천464명으로 정점을 찍은 2007년 이후 가장 많은 수치다.
불법체류자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고, 제대로 된 의료 지원을 받기 힘들다는 점에서 건강관리에 취약하다.
특히 지난해 늘어난 불법체류자의 92%가 우리 기후가 낯선 태국인이란 점은 이런 우려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A 씨처럼 태국인 불법체류자의 뒤에는 취업 알선 브로커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태국인공동체 위크란다 대표는 "겨울은 태국인에게 견디기 힘든 계절이지만 수백만원에 달하는 브로커 수수료를 갚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하게 된다"라며 "불법체류 신분이라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를 받기 어렵다"라고 전했다.
이주민 관련 단체가 무료 의료 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안산이주민센터 강희숙 교육팀장은 "불법체류자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고, 홀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응급상황에 취약한 경우가 많다"라며 "이들도 엄연한 노동자라는 점에서 고용주와 정부가 나서 적절한 의료정보와 교육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okk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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