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379>생각의 사이

2015. 2. 2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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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생각의 사이 ―김광규(1941∼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시와 정치의 사이정치와 경제의 사이경제와 노동의 사이노동과 법의 사이법과 전쟁의 사이전쟁과 공장의 사이공장과 농사의 사이농사와 관청의 사이관청과 학문의 사이를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휴지와권력과돈과착취와형무소와폐허와공해와농약과억압과통계가남을 뿐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스페셜리스트, 한 가지 분야를 깊이 아는 사람이 대접받는다. 자기가 아는 분야 바깥의 다른 일은 전혀 몰라도 잘살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일의 '전문가'가 되려고 전력투구한다. 그러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까? 어떤 직업을 가졌건, 상황이 어떻건, 모든 사람이 제 분야만 생각하고 다른 분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세계를 상상해 보라. 스페셜리스트가 넘쳐나면 세상은 엉망이 될 테다. '오타쿠'의 세계에서는 군사 문제에만 빠삭한 사람, 정치에만 빠삭한 사람, 역사에만 빠삭한 사람을 '밀덕' '정덕' '역덕'이라 한다지. 뭐, 나는 '오타쿠'를 싫어하지 않지만, 세상이 '덕', '오타쿠'들로만 구성된다면 그 세상은 얼마나 황폐할 것인가. '휴지와/권력과/돈과/착취와/형무소와/폐허와/공해와/농약과/억압과/통계가//남을 뿐'일 테다. 왜냐고? 제가끔 자기 전문의 벽을 쌓고 들어앉아 있는 사회, 특정 분야의 지식(정보)들이 커다란 벽으로 막혀 있는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도 안 되고 타인을 이해할 수도 없을 테니까!

옛날 사람들은 어떤 일을 깊이 알지 못해도 세상일을 두루 알았다. 그처럼 제 세계에만 갇혀 있지 않고 열린 사람, 여러 분야를 두루 알면서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 생각이 치우치지 않은 사람, 요컨대 '사이'의 사람이 도태된 사회를 시인은 조곤조곤 담담히 비판한다. 쉽게 읽히면서 숨은 뜻이 씹히는 시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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