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칼럼] 중산층 몰락 사회의 비극

이종석 논설주간 2015. 2. 24.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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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까지만 해도 A씨(55세)는 중견 금융회사의 부장급 간부였다. 상류층은 아니더라도 스스로 중산층은 된다고 자부했다. 퇴직 후 눈을 낮추면 소소한 일자리는 있겠지 싶었지만, 현실은 전쟁터였다. 재취업은 불가능했다. 중소기업 재무담당 경력채용 공고가 나오면 경쟁률이 금방 수백대 1을 넘었다. 2년여 백수생활 끝에 A씨는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더 이상 놀 수는 없지 않소. 앞으로 살 날이 얼만데..."

A씨에게 중산층은 흘러가 버린 과거가 됐다. 앞으로 빈곤층으로 더 추락하지 않는게 그에게 주어진 인생2막의 목표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주변에 흘러 넘치는 우리들 이야기다. 앞 날에 대한 희망은 커녕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절망의 세력이 늘고 있다. '은퇴파산' '반퇴'라는 말은 이미 일상어가 되어 버렸다. 올라갈 희망은 없고, 떨어질 절망만 남은 사람들의 우려가 넘친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주 발표한 '중산층의 삶의 질 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가구 대비 중산층 비중은 1990년 75%에서 2013년 67.1%로 줄었다. 같은 기간 빈곤층을 포함한 저소득층은 7.6%에서 14.3%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사회의 허리 역할을 해야 할 중산층은 줄어들고, 저소득 빈곤층은 급격히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산층 비중 67%라는 것도 믿을게 못된다. 수치로만 보면 전 국민의 67%가 중산층이라는 얘긴데, 현실과 거리가 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인 중위소득에 따라 단순 집계한 수치일 뿐이다. 중위소득은 전체 가구를 소득 순으로 줄 세웠을 때 한가운데에 있는 가구의 소득을 말한다. 이 중위소득의 50 ~ 150% 범위를 중산층으로 합산한다. 통계청이 밝힌 2013년 가구당 중위소득은 386만원이다. 월소득 193 ~ 579만원 사이면 모두 중산층으로 집계된다. 4인 가족 기준 한 달 소득이 200만원대인 가구를 과연 중산층으로 볼 수 있을까. 중산층 비중 67%는 명백한 거품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같은 중산층 비중의 수치에 있지 않다. 지금은 중산층 범주에 들지만 조만간 중산층에서 탈락할 것으로 내다보는 절망세력이 이 사회에 적지 않다는 점이다.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나갈 돈은 정해져 있고, 향후 수입은 줄어들게 뻔하고, 사회보장 기능은 미약하다. 특별한 한 방(?)이 없는한 저소득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민 다수가 현재보다 내일이 더 어려워질 것으로 내다보는 현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진짜 문제다.

중산층은 사회구조상 완충재 역할을 한다. 부유층과 빈곤층의 중간에서 갈등을 완화해주고, 소비 주체 세력으로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에서는 빈곤층도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고, 희망을 이루기 위해 성실히 노력한다. 계층사회 유지를 위한 건전한 동력이 발현되는 것이다.

반면 중산층이 몰락하고 부유층과 빈곤층만 남은 사회에선 빈곤층이 상위 계층으로 올라갈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사실상 희망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있는 자에 대한 분노'와 '없는 자에 대한 멸시'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정신적 윤리적 측면에서 시민계급이 부재한 나라,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서 중산층이 몰락한 나라는 완충 기능을 상실한 위험국가에 속한다. 한국이 그 길로 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최근 방한한 데이비드 립튼 IMF 수석부총재가 "소득불평등 심화로 한국의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며 "재분배 정책을 통해 불평등을 줄이고 중산층을 재건해야 한다"고 조언한 것은 유의미한 지적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미 재무부 차관으로 한국의 구조조정과 구제금융 전반을 지휘했던 그가 이번에는 '중산층 붕괴'를 한국의 위험요인으로 경고하고 나선 것이다.

중산층을 살리는 대안은 결국 실질소득을 늘려주는 방법 밖에 없다. 고용 확대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고, 기초임금을 올려 저소득층 주머니로 들어가는 소득을 높여줘야 한다. 태평양 건너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중산층 지원을 통해 나라경제를 살리겠다며 "중산층 경제(Middle class economics)"를 선언했다. 부자 증세, 저소득층 감세, 최저임금 인상을 대안으로 내걸었다. 바다 건너 먼나라 얘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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