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김경률.."100년 한국 당구의 개척자"

2015. 2. 2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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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률, 우물안개구리 신세 한국당구를 바꾼 인물"-국제대회 유치 및 국내선수 해외진출 교두보 놓은 개척자-사업 병행 한창 바빴던 김경률 극단적 선택…억측만 난무

[헤럴드경제=조용직 기자] 지난 22일 오후 국내 당구계에 갑작스런 비보가 날아들었다. 한국 당구를 대표하는 스타 김경률(35)의 사망이라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당구계는 한국 당구의 큰 별이 졌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 했고, 그의 이름 석자가 만 하루가 지나도록 대형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최상단에 자리할 만큼 일반 대중도 큰 관심 속에 안타까움을 쏟아냈다.

만 35세가 되는 생일인 2월 23일을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난 그는 12년간의 선수 생활동안 한국 당구에 획을 긋는 지대한 업적과 이력을 남겼다는 게 당구계의 평가다. 12년이란 경력과 35세란 나이는 50대에도 세계 탑랭커가 존재할 만큼 선수생명이 긴 당구계에서는 매우 짧고 어린 나이다. 그런데도 이 같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굵고 강렬한 실적을 냈다는 반증이다.

▶한국 당구 세계에 알린 개척자 김경률=그는 지난 2003년 2월 선수로 정식 등록한 뒤 만 2년여 만인 2005년 5월 한국 랭킹 1위에 올라선다. 초스피드로 정상을 찍은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6년 말 한국 국적의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랭킹 12위에 오르며 국제대회 시드권을 획득한다. 이것은 '우물 안의 개구리'로 100년을 넘게 보낸 한국 당구계가 마침내 '우물 밖' 세계를 향해 진출하는 일대 전환점이 된다.

대한당구연맹의 나근주 사무과장은 "한국당구연맹이 이듬해인 2007년부터 국제대회 유치에 나서게 된 것도 김경률 선수가 시드권을 획득한 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면서 "한국 선수가 국제대회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 게 바로 김경률 선수"라고 회고했다.

실제 그해 말 세계캐롬당구연맹(UMB)이 주최하는 월드컵 대회가 수원에서 한국 최초로 열렸다. 이 대회에서 16강 탈락하며 아쉬움을 남긴 그는 이듬 해 제2회 수원 월드컵대회에서 준우승하며 믿음에 보답한다. 이후로도 승승장구한 그는 2009년 세계 랭킹 8위로 뛰어올랐고, 2010년 2월 터키 안탈리아 월드컵에서 딕 야스퍼스를 꺾고 드디어 우승을 차지한다.

이는 한국 국적의 선수로는 사상 최초의 일이다. 이에 앞서 고 이상천 전 대한당구연맹 회장이 전성기 시절 월드컵 대회에서 세 차례 우승한 적이 있으나 그는 여건이 풍족한 미국 국적으로 활동했다.

2010년 세계 3위로 올라선 김경률은 2011년 첫 월드컵인 그 해 2월 터키 트라브존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한다. 이로써 역시 한국 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세계 랭킹 2위에 등극하게 된다. 김경률은 생전 "재능도 있었겠지만, 남들보다 훨씬 열심히 많은 시간을 매달린 결과"라고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그의 활약은 국내 다른 선수들에게도 큰 귀감이 됐다. 그들이 해외 진출을 결심하도록 교두보 역할을 했다. 현 세계 랭킹 1위 최성원은 김경률이 우승 물꼬를 튼 이후 2011년 아지피(AGIPI) 국제대회, 2012년 터키 월드컵에 이어 2014년 세계선수권까지 우승하는 쾌거를 거뒀다. 조재호, 강동궁도 각각 월드컵 우승 맛을 보며 국제무대에서 한국 당구의 위용을 과시했다.

당구계에서는 그가 세계 랭킹 2위에 오르고,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보다 세계 12위 진입을 가장 큰 공로로 꼽는다. 연맹 측은 "시드권이 주어지는 세계 12위 안에 들기 위해서는 3년간 꾸준히 국제 대회에 출전하면서 성적을 내야 한다. 그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도전하지 않던 해외 대회에 거의 매번 자비로 출전하면서 험난한 도전을 계속했다"면서 "이런 면에서 그는 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헌신적인 한국 당구의 개척자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입문 전부터 두각, 사업도 활발했던 그가 왜…=김경률은 선수 데뷔 전에도 이미 정상권 선수의 기량을 넘어섰던 낭중지추였다. 2001년 병역을 마친 직후 당대 최고임을 자부하던 한 베테랑 선수와 대결을 펼쳤다. 한 스포츠지는 "큐 든 자, 내게 덤벼라"라는 제목을 달아 김모 씨의 지면중계 기획 기사를 내보냈다. 김경률은 제대한 지 3개월 밖에 안 된 터라 연습량도 부족했던 상황이었지만 주변의 권유로 이 대결에 첫 도전자로 나서게 된다.

결과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1점제 100점 승부에서 김경률이 50점에 선착했고, 당대 최고수라던 김 씨는 30여점 득점에 그쳤다. 김 씨는 몸이 편찮다며 기권을 했다. 이렇게 이 스포츠지의 야심찬 장기 연재 기획물은 예고만 내보낸 채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김경률은 최근에는 선수로서 활동뿐 아니라 사업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당구계 핵심관계자에 따르면 당구대 메이커 민테이블과 협력해 당구장 개업 및 시설 컨설턴트로서, 그리고 보험업에도 나섰다. 또한 선수 매니지먼트 분야에도 뛰어들기 위해 3쿠션 당구 차세대 대표주자인 김행직과도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중이었다.

이처럼 한창 바쁘게 활동하던 김경률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구계에서는 사업부진이나 사생활에 원인이 있지 않았겠냐는둥 근거가 이런저런 억측도 나오고 있다. 지난 해 국내외 대회에서 부진했던 것과도 관련짓는 추측도 있다. 그를 잘 아는 동료 선수, 개인적 친분이 있던 동호인들의 입에서는 그가 지난 해 연말부터 감정기복이 심하게 나타나는 등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는 비록 너무 이른 때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승리시 보여주던 전매특허의 환한 웃음과 화려한 제스처는 영원히 팬들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yjc@heraldcorp.com-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헤럴드MOM 회원모집, 엄마는 가장 훌륭한 영어교사!]삼겹살, 기름 안튀는 '후라이팬' 등장금리 노마드 시대, 연리 13% 수익이 보장되는 투자처는?'시집 잘 간 스타' 명단공개, 1위부터 살펴보니…국세청 환급금, 국세청 홈피서 조회 가능…"370억 찾아가세요"나르샤, 한겨울 과감한 비키니 볼륨 몸매 공개 '이 정도였어?' 대반전수지 수지모자 소송 패소…섹시화보 '청순수지의 퇴폐미?'로또638회당첨번호…22억 1등 당첨자 "억대 세뱃돈 주겠다"레이싱 모델 차정아, 안 벗어도 '후끈' …청순 볼륨감신주아, 태국 재벌과 결혼 후 근황이…남양주 타운하우스 "힐링수" 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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