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구를 지탱한, '황금세대'를 찾아서

2015. 2. 14.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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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켓코리아 = 편집부] 한국 농구 중흥기를 이끈 세대별 최고의 멤버들을 알아보자.

한국 남자농구는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난적 이란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이후 12년 만의 아시아 정상 복귀였고, 역대 4번째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다. 문태종(39·LG), 김주성(36·동부), 양동근(33·모비스), 조성민(30·kt) 등 대표팀 선배들이 중심을 잡았고, 오세근(27·KGC인삼공사), 김선형(26·SK), 김종규(23·LG), 이종현(20·고려대) 등 젊은 선수들이 뒤를 받친 결과였다. 이처럼 한국농구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때마다 그 중심에는 황금세대들이 있었다. 한국농구의 세대별 스타들을 살펴봤다.

아시아의 시선을 끈 1970년대

한국은 1970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팀을 이끌었던 사령탑이 김영기 현 KBL 총재였다. 당시 농구대표팀의 주축을 이룬 선수들은 김인건, 신동파, 이인표, 조승연, 박한, 최종규, 유희형 등이다. 한국의 첫 번째 남자농구 전성기를 이끌어낸 주역들이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중심에는 신동파가 있었다. 신동파는 한국농구선수로는 처음으로 해외에서도 엄청난 유명세를 탄 인물이다. 지금도 필리핀에서 신동파의 존재를 알 정도로 빼어난 슈팅력을 바탕으로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인정받는 스타였다.

1970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발판으로 한국농구는 지속적으로 좋은 선수들이 배출되면서 1974년과 1978년 아시안게임에서 연속 은메달을 따냈다. 김동광 현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하승진의 아버지 하동기씨 등이 당시 멤버였다.

1978년 아시안게임에서부터 대표팀에 새롭게 가세한 인물들이 있었다. 박수교 SBS스포츠 해설위원, 신선우 현 WKBL 총재대행, 이충희 전 동부 감독 등이었다. 이들은 4년 뒤 한국에 다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선사한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자대표팀은 박수교, 이민현, 신동찬, 이충희, 박인규, 신선우, 임정명, 박종천, 안준호 등이다.

한국 농구는 1970년대부터 188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타들이 꾸준하게 배출됐고,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2개씩 획득했다. 신동파에서 시작해 이충희까지 좋은 선수들이 다수 있었다. 그 덕분에 한국은 신체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아시아무대를 호령할 수 있었다. 또한 국내에서는 한국최고의 겨울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한국농구 계보를 이을 슈퍼스타 탄생 1980년대

1980년대는 이충희를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고려대의 49연승 신화를 이끈 핵심멤버였던 이충희는 실업팀 현대에 입단 후 농구대잔치에서 무려 12차례나 득점왕에 올랐다. 현역선수 말미에는 대만까지 진출했다.

이충희와 함께 슈터 경쟁을 펼친 주인공이 있었으니 그는 연세대 출신 김현준이었다. 슛에 있어서만큼은 이충희 못지않았던 선수였다. 둘은 평생 라이벌이었다. 이충희와 김현준은 1년 선후배 사이다. 두 선수는 고려대와 연세대, 현대와 삼성이란 라이벌 팀에서 대결을 펼쳐야 했다. 김현준은 농구대잔치에서 4차례 득점왕을 차지하긴 했지만, 항상 2인자에 머물렀다. 이충희라는 거대한 산을 제대로 넘어보지 못했다. 현역을 은퇴한 뒤 삼성 코치로 재직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김현준에는 '비운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충희, 김현준이 한국농구를 주름잡는 사이 겁 없는 아이들이 탄생한다. 중앙대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끈 한기범, 김유택, 허재, 강동희 등이다. 80년대 학번들인 이들 4명은 연세대와 고려대가 양분하던 대학농구에서 중앙대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 뿐이 아니다. 농구대잔치에서도 선배들을 연파하는 엄청난 힘을 과시했다.

이들의 등장은 기아자동차 농구단의 탄생으로도 이어진다. 기아의 중심은 단연 허재다. 용산고 시절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은 허재는 한국농구에 처음 등장한 올 어라운드 플레이다. 신장은 188cm은 불과하지만 타고난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드리블에서 슈팅, 패스까지 모든 걸 갖춘 선수로 평가받았다. 한국선수 최초로 미국프로농구(NBA)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1988 서울올림픽 때는 장신들이 즐비한 유고와의 경기에서 드리블 기술과 스텝, 슈팅 등으로 한국의 공격을 모두 책임졌다. 20년 이상 지났지만 지금도 농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당시 경기 영상이 회자될 정도다.

이 때 탄생한 용어가 '허-동-택' 트리오다. 허재, 강동희, 김유택 등 3명은 중앙대와 기아자동차를 거치면서 한국농구무대를 주름잡았다. 포인트가드 강동희는 현란한 패스워크를 자랑했다.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 허재에 골밑의 책임지는 김유택은 오랜 기간 호흡을 이룬 덕분에 최고의 조직력을 뽐냈다. 20대 중반부터 전성기의 기량을 발휘하자 기아자동차는 농구대잔치에서 무려 7차례 우승한다.

하지만 국제 대회에서는 아시아 정상에 서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장신화에 성공한 중국에 번번이 밀려, 아시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다. 허재는 선수생활을 그만둘 때까지 아시아 정상을 단 한 차례로 정복하지 못했다. 1995년 아시아선수권에서 MVP로 뽑힌데 만족해야 했다.

대학농구 최고의 전성기 1990년

1990년대는 대학농구를 빼놓고는 말을 할 수 없을 듯 하다. 1980년대 중앙대학교의 센세이션 이후 연세대와 고려대는 자존심 회복을 위해 고교 유망주들을 영입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1990년대 초반 연세대는 초호화 멤버를 구축하고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90학번 문경은, 91학번 이상민, 92학번 김훈, 우지원, 93학번 서장훈까지. 이들은 연세대를 대학 최강에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농구대잔치 사상 최초로 대학이 우승하는 사건(?)을 벌이게 된다.'연세대의 라이벌' 고려대도 못지않은 호화멤버가 구축됐다. 92학번 전희철, 김병철, 93학번 양희승, 94학번 현주엽, 신기성까지. 이들은 연세대를 견제했을 뿐 아니라, 실업팀 선배들과의 대결에서도 물러섬이 없었다.

이 시기에 엄청난 농구 스타들이 배출됐다. 최고의 황금세대가 출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7cm의 장신이면서 기술까지 겸비한 서장훈과 198cm로 엄청난 탄력에 개인기술이 뛰어난 현주엽이 성인농구에 가세하면서 한국은 아시아정상 회복의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장신들이 즐비한 중국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1997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벌어진 아시아남자농구선수대회에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농구 최고의 황금세대의 출연은 1997년 프로농구 출범으로 이어졌다. 엄청난 인기에 편승, 기존의 실업팀이 이외에도 팀 창단과 함께 프로에 뛰어드는 구단들이 적지 않았다. 대학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선수들이 졸업한 뒤 프로무대로 뛰어들면서 더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프로농구는 한국 프로스포츠 가운데 출범 후 가장 안정된 출발을 보였고, 흥행 면에서도 최고를 달렸다. 겨울 스포츠로는 적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2000년대 프로농구가 나은 첫 황금세대 김승현, 김주성, 방성윤

아마농구에서 좋은 자원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간간히 신선함을 던져준 선수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동국대 출신의 포인트 가드 김승현이다. 180cm도 안 되는 키의 그는 전체 3순위로 오리온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마르커스 힉스라는 최고의 용병을 만난 김승현은 현란한 패스워크로 농구판을 뒤흔들었다. 그는 2001~2002시즌에는 오리온스를 통합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다. 신인선수상 뿐 아니라 정규리그 MVP, 베스트5 등 많은 개인 타이틀은 덤이었다. 이상민의 대를 이어 한국농구를 이끌어갈 포인트 가드로 우뚝 섰다.

김승현의 뒤를 이어 거물급 포워드 김주성과 대형 슈팅가드 방성윤이 등장했다. 두 선수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따는데 일조했다.

김주성은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모든 이의 예상대로 전체 1순위에 뽑혔다. 2002~2003시즌 신인상을 거머쥐었고, 소속팀 TG가 챔피언에 등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3~2004시즌 정규리그 MVP, 2004~2005시즌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하는 등 프로에 뛰어들자마자 각종 개인상을 휩쓸었다. 당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센터 서장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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