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헌의 90+] '참사 추모 No.74' 살라로 보는 등번호 이야기

이경헌 2015. 2. 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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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 이경헌 기자= 첼시를 떠나 피오렌티나에 입성한 모하메드 살라(23)가 특별한 의미가 담긴 등번호를 달고 뛴다.

살라는 지난 3일(한국시간) 첼시에서 피오렌티나로 임대됐다. 살라는 지난해 1월 스위스 바젤에서 첼시로 이적하며 기대를 모았지만 이렇다 할 기회를 잡지 못했고 결국 이번 시즌 종료까지 피오렌티나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게 됐다.

임대 소식보다 더 화제를 모은 살라의 새로운 등번호였다. 그라운드에서는 흔치 않은 숫자인 '74'. 유럽 현지 언론에 따르면 등번호 74번은 살라가 직접 선택했다고 한다. 74라는 숫자는 살라의 고국인 이집트와 관련이 있다. 지난 2012년 2월 이집트 포트사이드 축구경기장에서 발생된 관중 집단 폭력 사고의 사망자수다.

이집트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었다. 홈팀 알마스리 팬들이 1-3 패배에 분노해 원정팀 알아흘리 관중석으로 난입해 폭력을 행사했고 이 과정에서 74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이집트 무대에서 활약했던 살라는 당시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라의 케이스처럼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특별한 사연이 담긴 게 바로 등번호다. 그깟 숫자가 무슨 대수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축구선수에게 등번호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이며 이런저런 얽힌 사연들까지 숨겨져 있다. 때문에 선수들은 자신이 원하는 등번호를 달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등번호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28년으로 알려져 있다. 8월 25일 셰필드 웬즈데이와 아스날, 첼시와 스완지 시티전 두 경기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했다. 공식 경기에서는 1933년 에버튼과 맨체스터 시티의 FA컵 결승전이 최초였다. 이후 1937년 스코틀랜드-잉글랜드전에서 A매치 사상 처음으로 등번호가 등장했으며 월드컵에 등번호가 처음 사용한 것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이다.

초창기 등번호 선택 방법은 매우 단순했다. 1930년대 아스널의 허버트 채프먼 감독이 선보인 WM 포메이션에 따라 골키퍼는 1번, 풀백 3명은 우측부터 2, 5, 3번, 하프백 2명은 4, 6번, W모양의 공격라인은 7~11번이 주어졌다. 그 당시에는 교체 선수가 없었기에 1~11번 이외의 번호는 사용되지 않았다. 1965년부터 경기 중 선수 교체가 허용되면서 11번보다 높은 숫자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12번은 팀의 서포터스를 의미한다고 해서 많은 팀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국제축구연맹(FIFA)가 주관하는 월드컵의 경우 등번호의 선택이 제한적이다. 1~23번 이외의 번호는 사용할 수 없으며 1번은 반드시 골키퍼가 달아야 한다. 영구 결번도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아르헨티나 축구협회가 마라도나의 등번호 10번을 영구 결번하겠다고 10번이 빠진 명단을 제출했다가 FIFA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했다.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는 완강히 버텼지만 예비 골키퍼에게 10번을 주겠다는 FIFA의 최후의 통첩에 23번을 달았던 아리엘 오르테가에게 10번을 부여했다.

하지만 기존의 상식을 파괴하는 등번호를 달고 뛴 선수도 적지 않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스포츠에서 가장 이상한 번호를 단 선수들과 그에 담긴 의미'라는 주제로 축구 선수들의 특이한 등번호에 대한 이유와 사연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 보도된 축구 선수들의 리스트를 살펴보자.

마리오 발로텔리-45번

'악동'으로 유명한 마리오 발로텔리가 선호하는 등번호는 45번이다. 그는 "인터 밀란 시절, 젊은 선수들이 달 수 있었던 번호는 36번에서부터 50번 사이었다. 나는 45번을 결정했는데, 4+5가 9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번호를 단 후 치른 네 경기서 모두 득점했다. 때문에 이 번호가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했고, 계속 45번을 다는 이유다"라며 자신이 45번을 좋아하는 이유를 털어놨다.

클린트 뎀프시-2번

클린트 뎀프시는 풀럼서 토트넘으로 이적하며 등번호를 2번으로 바꿨다. 2번은 주로 수비수들이 쓰는 번호. 그러나 뎀프시가 번호를 바꾼 건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의 닉네임이 '듀스(Deuce)'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 닉네임으로 랩 가수로도 활동했다.

히참 제루알리-0번

축구계에서 유일하게 0번을 달았던 선수. 모로코 출신의 제루알리는 2000년 스코틀랜드 에버딘서 뛸 당시 0번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이유는 그의 별명이 바로 '제로'였기 때문. 그러나 그가 0번을 단 다음 시즌부터 스코틀랜드 프리미어십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0번을 공식적으로 쓸 수 없게 됐고, 그의 0번은 축구계서 보인 처음이자 마지막 0번이 됐다.

호르헤 캄포스-9번

단신이지만 놀랄만한 반사신경으로 멕시코의 골문을 지켰던 골키퍼 호르헤 캄포스는 골키퍼로선 생소한 9번을 달고 경기장을 누볐다. 캄포스는 어린 시절 공격수로 축구를 배웠고, 어린 시절 달았던 9번에 대한 애착이 강해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한 후에도 9번을 달고 경기에 나섰다.

빅상테 리자라쥐-69번

프랑스 대표팀의 강력한 측면 수비를 담당했던 빅상테 리자라쥐는 바이에른 뮌헨 시절 등번호 69번을 달고 우승을 이뤘다. 리자라쥐는 자신의 출생년도인 1969년의 69와, 자신의 키 169cm의 69에서 등번호를 따 왔다.

호나우지뉴-80번

호나우지뉴는 AC 밀란서 뛸 당시 등번호 80번을 달고 뛰었다. 이는 자신의 출생년도인 1980년에서 따온 것. 밀란에는 유독 출생년도로 등번호를 정한 선수들이 많았다. 밀란서 7번을 달고 뛰다 팀을 옮긴 후 다시 복귀한 안드레이 쉐브첸코도 자신의 출생년도인 1976년에서 따온 76번을 달아고 마티유 플라미니 역시 1984년의 84를 따와 번호로 삼기도 했다.

이반 사모라노-18번

인터 밀란에 이적해오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등번호인 9번을 달고 싶었던 사모라노는 호나우두가 9번을 달자 자신의 두 번째 선호 번호인 10번을 달려 했지만 이마저도 로베르토 바조에게 양보해야 했다. 이에 사모라노가 선택한 번호는 18번. 그는 1과 8사이에 +를 달아 자신이 선호하는 번호인 9번을 만들었다.

등번호는 특별한 기록을 기념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2011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 예지 두덱은 화려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A매치 통산 59경기 출장에 그쳐 폴란드 축구 명예의 전당(A매치 60회 출전 조건)에 가입할 수 없었다. 이에 폴란드축구협회(PZPN)는 폴란드 축구에 헌신한 두덱의 업적을 기리어 지난해 6월 4일 리히텐슈타인과의 친선경기에서 그에게 60번째 A매치 출전 기회를 부여하고 대표팀 은퇴식을 치뤄졌다. 이날 두덱은 60번째 A매치 출전을 기념해 등번호 60번을 달았다.

국내에서는 김병지(전남)의 500번이 많은 화제를 뿌렸다. 2009년 11월 1일 당시 경남 소속이었던 김병지는 500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전인미답의 500경기 출전을 자축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시즌 개막전 500번 등록을 시도했다가 한국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퇴짜를 맞았던 김병지는 차선책으로 500경기 출전까지 남은 29경기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29번을 달기도 했다. 최은성(전북) 역시 지난해 7월 20일 상주전에서 '532'번 유니폼을 입고 현역 은퇴 경기를 치렀다. '532'번은 최은성이 상주전에 출전하면 기록하게 되는 K리그 통산 출전 경기 숫자이다.

사진=리버풀, 전북 현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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