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김동주가 한국야구에 남긴 추억과 발자취

2015. 2. 2.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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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목곰' 김동주(39)가 결국 새 소속팀을 구하지 못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고려대를 거쳐 1998년 OB(현 두산) 유니폼을 입고 프로 무대에 뛰어든 뒤 17시즌 동안 통산 1625경기 출전해 타율 0.309, 273홈런, 1097타점을 올렸다. 스포츠동아DB

김동주(39). 한국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고교 시절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며 주목받았고, 대학, 프로, 국제무대에서 늘 '최고'였다. 그랬던 그가 쓸쓸히 유니폼을 벗는다. 지난해 말 '현역 연장'의 의지를 밝히며 친정팀 두산을 박차고 나왔지만 한국야구위원회(KBO) 선수등록 마감시한인 1월 31일까지 어떤 팀과도 계약하지 못했다. 이날까지 KBO에 '선수계약 승인신청'을 한 선수만이 시즌 개막과 동시에 1군 무대에서 뛸 수 있지만, 그는 둥지를 찾지 못했다. 물론 2월 1일 이후에라도 구단과 계약을 하면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있지만 5월 1일 이후에나 1군 무대에 설 수 있는 육성선수(종전 신고선수)로 등록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김동주는 이런 가능성조차 지우고 은퇴를 선택했다. 그를 두고 야구계의 시선도 엇갈린다. 덕아웃 뒤편과 야구장 밖의 김동주의 모습에 대해 썩 좋은 평가가 나오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라운드 안에서 써내려간 '야구선수 김동주'로서의 기록과 추억들은 지울 수 없다. 김동주가 한국야구사에 남긴, 잊을 수 없는 발자취들을 더듬어본다.

● 초고교급 천재 선수

흔히 고교 시절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에게 '초고교급'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러나 김동주야말로 '초고교급 중의 초고교급 선수'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그의 천부적 야구 재능은 어릴 때부터 세상을 뚫고 나왔다. 배명고 2학년 시절이던 1992년 투수와 타자로 원맨쇼를 펼치며 팀을 전국 최강으로 올려놓았다. 그해 봉황기에서는 개인 3관왕(최우수투수상·타격상·타점상)을 차지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황금사자기와 전국체전까지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배명고는 1963년 야구부 창설 이후 처음 전국대회 3관왕에 올랐다. 고려대와 OB의 스카우트 전쟁 회오리 속에서 그는 고려대 진학을 선택했다.

● 잠실 홈런왕, 그리고 두목곰

대학시절 국가대표를 지낸 김동주는 1998년 OB에 1차지명을 받고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당시 받았던 계약금 4억5000만원은 2001년 SK에 입단한 정상호와 함께 아직도 역대 야수 계약금 공동 1위다.

김인식 감독의 믿음 아래 데뷔 첫해부터 4번타자 자리를 꿰찬 그는 특히 찬스에 강해 상대팀 투수가 가장 두려워하는 타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두산 간판스타로 자리 잡았고, '두목곰'이라는 애칭으로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지난해 1군에서 단 1경기도 뛰지 못했지만 프로 17년간 통산 1625경기에 출장해 타율 0.309(역대 8위), 273홈런(역대 9위), 1097(역대 4위)의 빼어난 기록을 남겼다. 특히 홈런을 치기 힘든 홈구장 잠실에서만 131개를 터뜨려 역대 잠실에서 가장 많이 홈런을 날린 타자로 기록돼 있다. 그 중 2000년 5월 4일 롯데전에서 에밀리아노 기론을 상대로 기록한 역대 유일한 잠실구장 장외 홈런(비거리 150m)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그 홈런타구가 떨어진 잠실구장 밖 지점에는 기념동판이 설치돼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 영원한 국가대표 4번타자

그는 국가대표로서 많은 추억들을 선사했다. 1997년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결승전 연타석 홈런을 포함해 이 대회 7경기에서 9홈런(14안타 중 64%가 홈런), 17타점을 기록하며 최우수선수(MVP)에 올랐고, 한국을 8년 만에 이 대회 정상에 올려놨다. 특히 일본이 자랑하는 우에하라 고지(현 보스턴)를 상대로 예선과 결승에서 4방의 홈런을 몰아치면서 단숨에 '우에하라 킬러'로 명성을 얻었고, 비거리 162m짜리 홈런까지 날려 일본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998년 프로에 데뷔한 뒤로도 김동주는 국제대회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았다. 그해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시작으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등 그는 굵직굵직한 국제대회마다 맹활약하며 '일본킬러'로서 명성을 쌓았다. 아픔도 있었다. 2006년 WBC 대만전에서 땅볼 치고 1루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며 내야안타를 만들어내는 투혼을 발휘하다 어깨를 다쳐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정교함과 장타력, 클러치히터로서의 능력을 두루 갖춘 국가대표 4번타자. 선수 말년을 허송세월하는 바람에 프로통산 300홈런에 27개, 2000안타에 290개, 300 2루타에 7개 모자란 상태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점이 아쉽지만, 그의 방망이가 남긴 추억과 기록, 흔적들은 한국야구사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트위터 @keyston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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