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열정 페이' 논란 첫 만남 아슬아슬..노동조건 개선 한걸음 뗀 패션계

2015. 2. 2.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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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어쩔 수 없다"고 여겨오던 문제가 있다. 소위 '도제식 노동'이라 불리는 패션·미용·건축·영화·방송·예술 분야에서 청년 노동력 착취 문제가 그 중 하나다. '지망생'이 넘쳐나니 그 업계에 '막내'로 들어가 무급에 가까운 저임금과 고강도 불안 노동에 시달리는 청년들은 늘 소리죽여 울곤 했다. '선생님' 위치인 이들은 "일 배우는 것이 어디냐"고 했고 세상은 "아프니까 청춘"이라 했다.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자로서 당연한 권리조차 인정받지 못해온 이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 최근 벌어진 '열정페이('열정'과 '급여(pay)를 합친말로 젊은이들에게 "열정이 있으면 돈은 필요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어른'들의 입장을 비꼰 말)' 논란이다.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인 아이디 '배트맨디(D)'가 '패션 노조'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했다. 혼자 울던 이들이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패션노조는 유명 디자이너인 이상봉씨에게 '청년착취대상'까지 수여하며 문제제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2015년 한국 사회의 뜨거운 화두인 '열정페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와 관련해 패션업계는 무거운 질문을 껴안게 됐다. 모두가 주시하고 있는 시험대에 오른 형국이다. '청년착취대상'에 이름이 거론된 디자이너들이 속한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디자이너들은 청년들과 함께 해법을 찾기로 했다.

1월29일, 패션노조·알바노조·청년유니온의 청년 3명과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운영위원 3명이 국회 전순옥 의원실에 마주앉았다. 상대를 대화상대로 인정한 '용기'를 낸 첫만남이었다. 피해 사례 증언을 통해 현실적인 불이익을 얻을 수도 있는 '막내'들이 목소리를 낸 것도 용기요, '청년착취대상'의 오명을 쓴 지 22일만에 만남의 자리에 나설 결심을 한 패션디자이너연합회 쪽의 태도도 용기였다. 

그 첫만남의 현장에 <한겨레>가 함께했다. "어쩔 수 없다"고 여기던 한국의 노동 문제도 의식있는 고용주들과 청년들이 손잡는다면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기록의 첫 페이지다.

머리 맞댄 패션노조-디자이너 연합회'청년 착취 대상' 수여 22일만의 만남연합회 쪽 "디자이너들 상처 받아"노조 쪽 "안 그랬으면 관심 안 가져"청년 노무 문제 혁신엔 양쪽 모두 공감전순옥 의원, 정보 포함 토론회 제안청년 대표-연합회 주기적 만남 약속

"저는 명함이 없어서요. 패션노조 대표인 '배트맨디(D)'라고 합니다." 명함을 내미는 지재원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운영위원장을 향해 그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1월29일 오후 5시5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839호 전순옥 의원실. 패션계 '열정페이(청년들의 열정을 이용해 착취한다는 뜻)' 문제를 제기해온 청년 대표들과 디자이너연합회가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패션 노조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디자이너연합회 회장이기도 한 이상봉 디자이너에게 '청년착취대상'을 수여한 지 22일만이었다. 시상식 이틀 뒤인 9일 패션노조가 이상봉 디자이너와 연합회를 상대로 '패션산업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사회적 협의'를 제안했다. 14일 이상봉 디자이너가 사과문을, 연합회가 "혁신하겠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보름 뒤, 드디어 만났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고용주 입장인 이들이 청년 노동자들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며 만난 사례는 소위 '도제식 노동'으로 분류되는 다른 업종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계만 해도 스태프들의 저임금·고강도·불안 노동이 논란이 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난해 초와 말 각각 개봉한 <관능의 법칙>과 <국제시장>이 막내 스태프까지 제대로 표준근로계약서를 적용한 상업영화 사례가 된 정도였다.  

회의실의 8인용 테이블 가운데 자리에 전순옥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앉았다. 오른쪽으로 정준영 청년유니온 정책국장, '배트맨디' 패션노조 대표, 구교현 아르바이트노동조합 위원장, 왼쪽으로 지 위원장과 연합회 운영위원인 함정훈 변호사, 정재우 동덕여대 패션디자인학과 교수가 자리했다. 패션 디자이너 출신인 황금이 보좌관, 노동 문제 전문인 이상호 보좌관도 참석했다.

"청년들이 제기한 문제는 40년 전 제 오빠인 전태일이 한 이야기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패션디자이너연합회 쪽에서 전향적,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서 다른 업계에서 벤치마킹 할만한 좋은 선례를 만들어봅시다. 여기 모이신 분들이 충분히 바꿔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죠 여러분?" 전 의원이 쾌활한 목소리로 질문을 하며 회의를 시작하자 다들 잠시 웃었다.

하지만 2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화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았다. 지 위원장 등 연합회 운영위원들은 패션노조 등 청년들의 문제제기 방식에 많은 디자이너들이 큰 상처를 받았다는 점을 언급했다. 또 한국의 패션 시장에서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매우 적어 경영 상황이 좋지 않다는 점도 설명했다. 패션노조에 접수된 피해 사례가 얼마나 되느냐, 왜 하필 패션계에서부터 청년 노동 문제를 제기했느냐, 신분을 밝히지 않고 활동해온 '배트맨디'의 정체는 무엇이냐 등을 물으며 불신의 날을 세우기도 했다.

"문제제기 방식이 좀더 부드러웠다면 아무도 관심갖지 않았을 겁니다."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번에 제기한 청년 노동 착취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근로계약서 미작성, 부당 해고, 저임금 노동, 몸매 차별 등의 문제는 명백한 위법이므로 협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제가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 공부를 한 디자이너 지망생이기에 패션 분야에서 문제제기를 한 것입니다" 청년들의 말에 운영위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청년들 일 시켜놓고 돈도 주지 않는 회사는 차라리 문을 닫는게 낫다는 입장입니다. 패션계가 노무 문제를 혁신할 기회를 준 청년들에게 고마움도 느낍니다. 하지만 인턴, 견습 등이 문제가 되니 디자이너들이 아예 교육생조차 받지 않으려 하니 걱정도 됩니다. 상생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지 위원장이 말했다.

구체적인 계획도 오갔다. 전순옥 의원의 제안으로 청년들과 패션계, 정부 부처까지 아우르는 '패션계 열정페이 문제 해결을 위한 대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한 '준비위원회'로서 청년 대표들과 연합회가 주기적인 만남을 갖기로 했다. 연합회는 내부에서 구상하는 '혁신위원회'에 청년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오는 24일에 열리는 총회에서 최초의 '디자이너 노무 교육'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디자이너연합회가 노무 문제 해결을 제 1의 과제로 풀어나갈 것을 약속합니다." 지 위원장의 말에 '배트맨디'가 답했다. "일단 이런 자리에 나와서 대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패션업계 전체를 바꿀 수도 없고, 패션업계만 달라진다고 '열정페이' 시스템의 거대한 수레바퀴가 완전히 멈추지도 않을 터다. 그래도 패션 디자이너 업계는 혁신의 첫 발을 대디뎠다. 이들은 오는 14일 두번째 만남을 기약했다.

한 회사에 정규직으로 채용되기 전까지의 노동을 '과도기 노동'이라 부른다. 과도기 노동이 길어지면 노동자는 저임금과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내용에 따라 시용, 수습, 인턴 등이 있다.

정식 근로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근로자의 업무능력, 직무적성 등을 평가하기 위하여 시험 고용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에서 기간을 3개월로 정하나 이보다 긴 경우도 있다. 너무 긴 시용 기간은 '평가'라는 취지에 맞지 않으며 기간이 명시되지 않으면 노동자의 지위가 매우 불안정해진다.    

정식채용 후 노동자의 직업능력을 양성하기 위한 기간이다. 수습 노동자에게는 근로기준법이 전면 적용된다. 다만 근로기준법 제35조에 따른 해고 예고는 적용하지 않는다. 수습 기간에는 사회 통념상 합리적인 수준에서 근무수칙을 엄격히 하는 것이 인정되며 취업규칙·근로계약 등을 통해 정식 근로자보다 낮은 임금을 줄 수 있다.

법률 용어는 아니다. 청년 취업이 문제가 된 2000년대 이후 급속도로 확산된 형태다. 사업장에서 교육·연수·훈련 등을 받는 이를 뜻하며 경력에 도움이 되면 조건이 열악해도 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무급 인턴'이 그 자체로 불법은 아니지만 회사가 인턴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야근까지 시키는 등 악용한다면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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