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시드니: 55년의 기다림, 투혼은 이렇게 진화한다

입력 2015. 2. 1. 10:48 수정 2015. 2. 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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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포투=시드니(호주)] "우승보다 더 값진 선물을 받았다." 아시안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물러나는 차두리가 결승전 뒤 남긴 소감이다. 그의 말대로다. 55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에 도전했던 한국 축구가 끝내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패배한 그들에게 쏟아지는 건 날선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격려와 박수 세례다. 1-2 스코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땀의 진정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모든 걸 쏟아냈다. 꺼내들 수 있는 모든 수도 다 썼다. 선발라인업부터 파격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기성용의 파트너로 센터백 장현수를 올려세우고 중원에서 뛰던 박주호를 왼쪽 윙으로 전진 배치했다. 전방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압박해 위험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는 전략이었다. 루온고에게 기습적인 슈팅을 허용하며 선제골을 내주기 전까지는 이같은 변칙이 유효했다.

0-1로 끌려가던 후반 40분에는 센터백 곽태휘가 최전방으로 올라갔다. 기둥 역할을 해내면서 상대 수비에 균열을 냈다. 마지막까지 작은 기회도 놓치지 않겠다는 움직임들이 이어져 기어이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90분을 넘긴 추가시간에 기성용의 패스가 손흥민에게 전달됐다. 손흥민은 각이 없는 상황에서도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슈팅을 날렸다. '극적으로' 연장전까지 몰고 간 골이었다.

마법같은 순간은 여기까지였다. 교체카드를 모두 쓴 상황에서 부상한 장현수는 연장 내내 절뚝이며 뛰었다. 남은 시간과 공간을 메우는 것은 동료들의 몫이었다. 체력과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미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 상대에 추가골마저 허용한 뒤로 선수들은 말 그대로 온힘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기성용의 힐패스를 받으러 달려가던 김진수의 다리는 마음과 생각을 좇아가지 못해 후들거렸다.

비슷한 경기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2002월드컵에서의 16강전(對 이탈리아)과 8강전(對 스페인), 1998월드컵에서의 조별리그 3차전(對 벨기에)이다. 마지막 1분, 1초까지의 가능성도 포기하지 않고, 깨진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오직 골문을 향해 달리고 또 몸을 던지던 선배들의 집념과 투혼이 겹쳐졌다. 이쯤에서 경기는 결과와 상관없는 명승부가 되고 있었다. 내용에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축구가 보여줄 수 있는 감동이 최대치로 연출되고 있었다.

경기 후 탈진한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누워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이날 자신의 마지막 A매치를 치른 차두리는 붉어진 눈가로 감정을 추스른 뒤 주저앉은 후배들을 일으켜 세우고 다독였다. 믹스트존에서 만난 그는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을 때 기본으로 보여줘야 하는 경기가 오늘 같은 경기였다"며 "후배들의 의지와 태극마크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우승보다 더 값진 선물을 안고 간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했다는 점이다. 2014브라질월드컵에서의 도전이 처참한 실패로 끝나면서 한국 축구를 향한 시선은 분노와 조롱 혹은 냉대로 일관됐다. 이번 대표팀은 스스로 그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보여줬다. 최상의 전력, 최고의 경기력이 아니어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감동을 전했다.

주장 기성용은 "월드컵에서 많은 실망감을 줬고 성적도 기대 이하였다. 이번 대회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다짐했다. 그때보다 더 간절한 마음과 태도로 뛰었다"고 말했다. 대회 내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손에 땀을 쥐고 몰입하게 한 것이 그 증거다.

기성용은 또 "4년 전에는 3위를 했고 이번에는 준우승을 했으니 다음에는 우승을…"이라며 4년 뒤를 기약했다. 손흥민도 "아직 어린 선수들이고 배울 게 더 많다. 충분히 경험을 쌓아서 더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골을 넣고도 승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그는 눈물을 터뜨렸다. "형들과 팬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욕심이 많고 승부욕이 강한 선수인데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손흥민의 눈물은 다음 대회에 대한 기대감으로 치환할 수 있다.

55년의 봉인을 풀 시간은 또 다시 4년 뒤로 미뤄졌다. 대신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희망이 남았다. 그렇게 한국 축구의 투혼은 진화하고 있다.

글=배진경, 사진=FA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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