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증세'는 대한민국 성역인가

박송이 기자 2015. 1. 3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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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여당 법인세 인상 난색… 최대 1000억원 깎아주는 가업상속공제는 재추진

'복지를 위한 증세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경제위기의 비용을 누가 치르느냐'다. <왜 우리는 더 불평등해지는가>의 저자 김공회씨는 연말정산 논란은 '경제위기에 대한 비용부담'의 프레임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연말정산에 대한 불만은 단순한 조세저항이 아니라 공정성에 대해 누적돼 왔던 문제제기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경제위기에 대한 비용을 부담한 쪽은 중산층과 서민이다. 구조조정, 비정규직, 청년실업, 가계부채는 중산층과 서민들이 경제위기에 치렀던 비용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이 치르는 비용은 재벌·대기업을 비롯한 최고 부유층에게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거액의 자산소득'이라는 선물로 돌아왔다. 양극화의 심화다. "가깝게는 2008년 이후, 멀게는 1997년 이후, 경제위기에 따른 비용을 누가 댔는가? 그에 따라 삶이 파탄난 게 누구인가? 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복지가 기본적으로 이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적극적 의미의 복지라기보다는 경제위기에 따른 비용을 뒤늦게 치르는 것일 뿐이다." 김씨의 말이다. 경제위기 이후, 심화된 양극화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히는 것이 복지라면 그 비용부담의 주체는 우선적으로 부유층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13월의 세금폭탄, 연말정산 논란은 곧 부자증세에 대한 목소리로 이어졌다. 무너진 공정성에 대한 반사적 반응이다. 법인세 인상이 대표적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는 법인세 최고세율을 25%에서 22%로 낮췄다. 각종 공제를 적용하면 실효세율은 이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 법인세 인하의 근거는 낙수효과다. 법인세 부담이 적어지면 기업의 투자여건이 조성되고 법인의 소득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다. 이는 다시 고용 확대, 세수 증대라는 선순환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인세 인하 4년, 선순환은 없었다는 게 실증되고 있다. 선순환의 고리는 첫 단계에서부터 끊겼다. 법인세 인하는 기업의 투자 증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사내유보금의 증가로 이어졌다.

법인세율 인하 뒤 실물투자 줄어

추미애 의원실은 국회 예산정책처에 의뢰해 2013년 상위 20대 재벌그룹의 사내유보금 현황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2013년 말 상위 20대 재벌그룹의 사내유보금은 총 588조9000억원으로 2009년 322조4000억원에 비해 1.8배 늘었다. 기업별로 보면 2009년 87조원이었던 삼성그룹의 사내유보금이 2013년 177조원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현대자동차는 2009년 45조였던 사내유보금이 2013년에는 98조원으로 늘었다. 마찬가지로 2배가 넘는다. 재무제표를 통해서도 기업들이 실물투자보다는 현금성 자산 불리기에 주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재무제표상 현금 및 현금성 자산, 장·단기 금융상품, 매도가능 금융자산은 업무 관련성은 낮은 항목이다. 이들 항목은 고용창출 및 경영권 방어와도 거리가 멀다. 이 항목의 액수가 크게 늘어날수록 낙수효과의 선순환을 기대하기 어렵다. 2007년 삼성전자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 단기금융상품, 장·단기 매도가능 금융자산을 합한 금액은 총 9조7000억원이었다. 2013년에는 35조원으로 4배 가까이 늘어났다. 신세계는 2007년 이들을 더한 총액이 590억원이었으나 2013년에는 8400억원으로 늘었다. 10배가 훨씬 넘게 늘어난 셈이다. 현대자동차는 현금 및 현금성 자산, 장·단기 금융상품을 더한 금액이 2007년 4조원에서 2013년 14조원으로 10조가 늘었다.

그렇다면 법인세 인하가 투자로 이어졌는지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실물투자액 추이는 어떨까. 금융상품과 현금자산이 늘어난 것과는 정반대였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20대 재벌그룹의 2013년 실물투자액 추이는 총 9조6000억원으로 2009~2013년 중 규모가 가장 작았다. 삼성전자는 2009년 실물투자액이 7조였으나 2013년에는 2200억원으로 크게 줄었다. 현대자동차의 실물투자액은 2009년 5조5000억원이었으나 2013년에는 5230억으로 10분의 1로 줄었다. 세금이 줄어도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곳간에 쌓아둔 격이다.

법인세 인하가 낙수효과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기업소득과 가계소득은 더 크게 벌어졌다. 1992년의 가계소득과 기업소득 사이의 격차를 0으로 본다면 2010년대를 지나면 3.5를 오르내리는 숫자가 된다. 기업소득을 가계소득으로 이전하기 위해서는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면서 최경환 부총리는 취임 이후 기업소득환류세제를 도입했다. 하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기업소득환류세제에서는 기업들이 충분히 세금을 회피할 수 있다는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김성환 한양여자대학교 세무회계과 교수는 최근 경영컨설팅연구에 '기업소득환류세제에 대한 기업의 회피 가능성에 대한 사례 연구'를 게재했다. 김 교수는 삼성전자의 2013년 사업보고서와 감사보고서를 분석해 기업소득환류세제를 도입해도 삼성전자가 추가로 세금을 부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기업소득환류세제의 과세방식은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추가로 부담해야 할 세금이 적거나 있어도 소액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월 21일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국회 새누리당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소득세 연말정산 논란과 관련한 긴급 당정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기업소득·가계소득 더 벌어져

기업소득환류세제는 도입 때부터 기업소득을 가계소득으로 이전하는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돼 왔다. 게다가 이에 대한 실증 분석까지 나오고, 연말정산으로 촉발된 조세 형평성에 대한 여론의 분노가 높아지자 새누리당 내에서도 법인세를 올려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1월 29일 새누리당 정책위 수석부의장인 나성린 의원은 박원석 정의당 의원 주최로 열린 '연말정산 파동, 문제와 해법은' 토론회에 참석해 "정부와 여당이 법인세를 전혀 건드리지 않겠다고 얘기하지는 않았다"며 "법인세도 조금 인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나 의원의 발언이 당론과는 상관없는 개별 의원의 발언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폭발하는 여론에 당황스러워하는 눈치다.

연말정산 논란으로 촉발된 법인세 인상에 대한 여론은 부자증세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국회는 지금까지 부자증세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하면서도 재벌·대기업을 위한 세법 추진에는 적극적이었다. 정부·여당은 물론 야당 또한 마찬가지다. 연말정산에 대한 중산층·서민들의 불만이 거센 가운데 한쪽에서는 정부·여당이 기업에 5년간 2500억원 규모의 세금을 깎아주는 가업상속공제 관련 법안을 재추진하고 있어 논란이 됐다. 설립된 지 30년이 넘고 매출액 5000억원 미만의 중견기업 오너가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면 최대 1000억원의 상속자산에 대해 세금을 한푼도 안 내게 한다는 것이 이 법의 골자다. 중견기업이 가업을 승계해 상속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상속세를 대폭 깎아주자는 취지다. 법안의 대표발의자는 새누리당 기획재정위원회 간사인 강석훈 의원이고, 발의자는 김광림·나성린·박맹우 의원 등 새누리당 의원들이다.

기업 투자 증대 등 선순환 없어

하지만 가업상속공제 관련 법안에 대해서는 새정치민주연합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2013년 12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는 난데없는 법안 경쟁이 붙었다. 가업상속공제 대상 기업을 확대하려는 법안을 여야 막론하지 않고 낸 것이다. 기존 법안은 매출액 2000억원 이하의 중소·중견기업 중 피상속인이 10년 이상 계속해 경영한 기업을 대상으로 가업상속공제 혜택을 주는 것이었다. 당시 4개의 법안이 해당 상임위에 올라왔다. 정부안, 새누리당 나성린 의원안, 새정치연합 설훈 의원안, 새정치연합 조정식 의원안이다. 모두 가업상속공제 혜택을 확대하자는 취지다. 정부안은 매출액 기준을 3000억원 미만으로 올려 대상 기업을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새누리당 나성린 의원안은 매출액 기준을 5000억원 미만으로 올리고, 피상속인이 5년 이상 경영한 기업으로 조건을 대폭 완화하는 것이었다. 새정치연합 설훈 의원은 매출액은 유지하되, 피상속인이나 상속인이 5년 이상 계속하여 경영한 기업으로 조건을 완화해 대상을 확대했다. 새정치연합 조정식 의원안은 매출액 기준을 5000억원 미만으로 올렸다. 회의록을 보면 여당은 물론 새정치연합에서 아무도 이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정의당 박원석 의원과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만이 여기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회의록에는 박원석 의원이 가업상속공제 법안을 마련하는 정부·여당과 야당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 "정부와 새누리당, 그리고 새정치연합까지 부의 무상 이전에 대한 상속·증여세 세금 완화 경쟁을 벌이면서 가업상속공제 대상 기업이 매출 3000억원 이하 기업으로 확대됐고, 일감 몰아주기 과세에서도 중소·중견기업에 대한 예외조치가 마련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사주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상속세를 부과하지 않거나 일감 몰아주기를 통해서 사주가 이익을 편취하는 행위에 대해서 세금을 면제하는 것은 조세정의와 공평과세에 반한다. 부의 무상이전에 대한 과세는 대기업 사주나 중소기업 사주를 구분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소기업·중견기업의 사주라고 할지라도 부의 무상이전에 대한 정상적인 과세를 하는 것이 타당하고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중산층의 붕괴를 다룬 책 <국가는 잘사는데 왜 국민은 못사는가>는 1%대 99%의 사회를 다루며 "월스트리트와 재계는 의회의 승인과 지원을 받으며, 중산층을 지탱했던 사회구조를 붕괴시키기 위해 거침없이 나아갔다"고 밝혔다. 정치권이 만들어준 편향적인 세법이 부자들에게 전례없는 부를 가져다줬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야기만이 아닐 것이다.

연말정산 논란은 부자증세에 대한 여론에 불을 붙였다. '부자에게 증세를, 서민에게 복지를'은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이 내걸었던 선거구호였다. 민주노동당은 이 구호를 통해 원내 10석 진출이라는 돌풍을 불러왔다. 낙관적인 거시지표와 달리 양극화의 체감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던 그 당시 이 구호가 유권자들에게 그만큼 와 닿았던 셈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양극화는 더 심해졌고, 성장률과 같은 거시지표마저 나빠졌다. 연말정산 논란이 촉발한 부자증세 여론이 10년도 더 묵은 유권자들의 요구를 정치권이 받아 안는 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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