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중앙은행,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나?

이종태 기자 2015. 1. 3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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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원화, 미국 달러화, 중국 위안화 등 통화의 가치는 극심한 경제위기가 아니라면 크게 변동하지 않는다. 만약 하루 2~3% 움직였다면, 뭔가 큰 경제적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런데 통화가치가 삽시간에 수십% 오르는 경우가 최근 발생했다. 스위스 통화인 프랑(CHF)이다. 지난 1월15일 스위스 프랑의 가치는 유로화에 대해 한때 30%나 치솟았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스위스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이 아니다. EU의 단일 통화인 유로화가 아니라 자국 통화인 프랑을 사용한다. 그러나 EU와 밀접한 경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스위스의 수출품 중 50% 정도가 EU 회원국으로 흡수된다. 더욱이 스위스의 주력 산업 중 하나는 금융업이다. EU 여러 국가의 자산가나 금융기관들은 자산을 '스위스 프랑'으로 갖고 있다. 예컨대 독일 부자가 자신의 돈인 100만 유로를 120만 '스위스 프랑'으로 바꾼(1월15일 이전 환율) 뒤 이 나라의 은행에 예치하거나 금융상품을 매입하는 식이다. 작은 나라인 스위스가 자국 수출산업이나 금융업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프랑화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스위스 정부는 프랑화의 가치를 안정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퍼부었다. 덕분에 스위스 프랑은, '금융시장의 피난처'로 불리는 통화가 되었다. 다른 나라 돈의 가치가 출렁일 때도 스위스 프랑의 가치만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굳건한 믿음이 형성되어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 전역의 경제가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스위스 프랑의 인기는 폭발한다. 불안감을 느낀 다른 나라의 자산가와 금융기관들이 앞다퉈 스위스 금융상품을 매입하거나 이 나라의 은행에 예금했기 때문이다. 유로존의 금융기관이 스위스 금융상품을 사려면, 먼저 유로화를 스위스 프랑으로 교환(유로화로 프랑화를 매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유로화 팔자, 프랑화 사자' 흐름에 따라 유로화 가치는 떨어지는 반면 스위스 프랑의 가치는 올랐다.

그러나 이는 스위스 중앙은행 처지에서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통화가치가 크게 변동한다는 것 자체가 금융이 주력산업인 나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더욱이 프랑화 가치가 상승하면 스위스 수출상품의 국제 가격 역시 오르고 경쟁력은 떨어진다. 이에 따라 2011년 9월, 스위스 중앙은행은 프랑화의 가치를 '1유로 대 1.2스위스 프랑' 이상으로 오르지 않게 하겠다고 선언했다. 스위스 중앙은행은, 프랑의 통화가치가 떨어지면(예컨대 1유로당 1.2프랑에서 1.4프랑으로), 보유한 유로화로 프랑화를 매입한다. '유로화 팔자, 프랑화 사자'이므로 프랑화의 가치가 올라간다. 반대로 스위스 프랑이 오르면(예컨대 1유로당 1.2프랑에서 1프랑으로), 프랑화를 찍어내 유로화를 사는 방법으로 프랑화 가치를 떨어뜨렸다. 중앙은행의 개입으로 '1유로 대 1.2프랑'이라는 사실상의 고정환율을 유지해온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이렇게 해왔다.

ⓒAFP :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위). 1월22일 ECB는 불황 극복을 위해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프랑화 가치 오르면 스위스 수출에는 큰 타격

쉬운 일은 아니었다. EU의 경제 상황이 불안할수록 스위스 프랑의 인기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원하는 상품(프랑화)의 값(환율)이 오르지 않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비결은 물론 스위스 중앙은행의 개입이었다. EU에서의 '유로화 팔자, 프랑화 사자' 흐름을 '프랑화 팔자, 유로화 사자'로 맞받아친 것이다. 이처럼 스위스 중앙은행이 유로화를 대량 매입하다 보니 스위스의 외환보유고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스위스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는 2014년 말 현재 5560억 달러(유로화를 달러로 환산)에 달한다. 이 나라 GDP(2014년 IMF 기준 6790억 달러)의 80%를 약간 웃도는 규모다. 지난 3년여 동안 네 배 이상 증가했다. 심지어 스위스 중앙은행은 프랑화 가치의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국내 금리까지 유럽 최저 수준으로 유지했다. 그래야 해외 투자자들이 높은 금리 수익을 노리고 스위스 프랑화를 보유하려 들지는 않을 터이다. 어떻게든 외환이 덜 들어오게 하려고 몸부림친 것이다.

그런데 지난해 말부터 스위스 중앙은행이 더 이상 기존 고정환율제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유럽 중앙은행(ECB)이 유로존 전역을 잠식하고 있는 디플레이션(저물가로 인한 불황) 조짐을 극복하기 위해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U 지역의 금융기관들은, 각국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 이 중에는 이탈리아나 그리스처럼 '재정위기 국가'의 국채도 많다. 이런 국채는 해당 정부가 국가부도를 내면 휴지 조각으로 전락한다. 금융기관이 이런 '불량 자산'을 대규모로 보유하면 재무상태 악화로 투자나 대출을 꺼릴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경기 악화가 깊어진다. 결국 ECB가 선택한 최후 수단이 바로 양적완화, 즉 유로화를 찍어내 금융기관들의 불량 자산(재정위기 국가의 국채 등)을 매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금융기관들은 불량 자산을 떨어내면서 자금을 공급받을 수 있다. 금융기관들의 재무 상태가 개선되면 대출을 늘려 EU의 임박한 디플레이션을 차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ECB의 양적완화는 스위스에게는 새로운 시련을 의미했다. 양적완화로 유로화 공급이 늘어나면 유로화 가치 역시 떨어질 것이다. EU의 금융기관 및 자산가들은 '금융시장의 피난처'인 스위스 프랑을 게걸스럽게 매입할 것이다. 스위스 중앙은행이 프랑화 가치를 유지하려면 수천억 유로를 추가 매입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스위스 중앙은행이 1월15일 내린 결단이 바로 유로화와 프랑화 간의 '고정환율'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IMF 같은 국제기구나 심지어 ECB에도 미리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스위스 중앙은행이 '프랑화 팔자, 유로화 사자'를 중단하자, 프랑화의 가치는 삽시간에 폭등했다.

이날 스위스 증권거래소(SMI) 지수는 8.67%나 떨어졌다. 스와치, 네슬레 등 스위스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이 프랑화 급등(=스위스 수출품 가격 상승)으로 추락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스와치의 주가는 하루 동안 15%나 떨어졌다. 스위스가 고정환율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던 금융회사들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프랑화 가치가 약간 떨어지면 큰 수익을 낼 수 있는(오르면 큰 손해를 보는)' 금융상품을 팔고 있었다. 프랑화가 폭등해버리는 바람에 금융회사들은 예측 가능한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손실을 기록하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의 헤지펀드인 알파리(Alpari·본부는 영국)는 파산했고, 미국의 외환 중개업체 FXCM은 모기업으로부터 긴급자금을 수혈받아야 했다. 그동안 스위스 금융기관으로부터 초저금리로 돈을 빌려 부동산에 투자해온 동유럽 국가들의 기업과 시민들도 큰 손실이 불가피하다. 프랑화로 원금과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데, 그 가치가 폭등해버렸기 때문이다.

스위스 중앙은행의 고정환율 포기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EU 경제가 양적완화로 가느다란 회생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예사롭지 않은 '결단'이자 충격이다. 미국 투자 전문지 <머니 모닝>의 편집자인 짐 바흐는 '스위스 중앙은행은 ECB의 경기부양 정책(양적완화)이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이번 조치는 가라앉는 배에 스위스 프랑을 묶어두지 않겠다는 결단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한편 스위스 중앙은행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한 지 일주일 뒤인 1월22일, ECB는 회원국 국채 매입 등으로 매월 600억 유로(내년 9월까지 1조1400억 유로)의 유동성을 공급하는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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