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세상] "가미카제는 순교자라 믿었는데.. 군국주의에 속았다"

정지섭 기자 2015. 1. 29.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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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는 굳게 믿었습니다. 일본군은 특별한 은혜를 입은 신(神)의 군대라고. 순교자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난달 일본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캠프 한센의 강당. 짧은 머리에 전투복을 입은 미 해병대원 300명 앞에서 흰머리의 일본 성공회 소속 나카무라 사네아키(87) 신부가 입을 열었다.

그는 이날 성직자로서 장병들을 격려하려 마이크를 잡은 게 아니었다. 젊은 시절 군국주의를 주입받으며 가미카제 대원으로 조련됐던 기억을 담담히 털어놓으면서, 당시 그가 빠져들었던 일본의 군국주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강조했다. 강연 내용은 최근 미군 기관지 '성조지'에 실렸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연합군을 막기 위해 젊은 군인들로 편성했던 자살 특공대인 '가미카제(神風)' 대원으로 출격을 기다리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목숨을 건졌다. 오키나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신과 같은 존재인 천황을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신념을 주입당했다. 연합군 공세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4년, 일본군이 자살 특공대를 편성하자 열일곱이던 그는 '자원입대'를 가장한 사실상의 징집을 당했다. "당시 일본은 대를 잇는 맏아들만 빼고는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했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맏아들들 역시 전투에 동원돼 희생된 경우가 많았어요. 일본은 이마저도 지키지 않은 셈이었지요."

군대는 훈련병들에게 비행 기술보다 '자살 공격'의 당위성을 주입하는 데 주력했다. "교관들은 한 사람이 자살 폭격을 감행하면 수백명을 날려버릴 수 있고 일본은 승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귀환 없는 출격이다 보니 왕복 비행할 만큼 연료를 채울 일이 없었다. 그는 출격 명령을 받은 한 동료 대원이 '(나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니) 오늘 내 저녁밥은 네가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의 출격 차례가 점점 다가왔지만, 정작 폭격에 쓸 비행기가 바닥났다. 하지만 일본군은 곧 다른 대안을 생각해냈다. '인간 어뢰'로 바다에서 자살 공격을 하겠다는 것. 그러나 그가 인간 어뢰 공격에 동원되기 위해 규슈 사세보항으로 배치됐을 때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패전 뒤에도 뼛속까지 일본인이라 믿었던 그의 신념은 이후 진학한 대학 시절 수업 시간에 열린 2차 대전 관련 토론에서 산산조각 났다. 학생들은 천황제의 장단점 따위만 열심히 논할 뿐, 아무도 고향 오키나와의 희생에 관심이 없었다. "바로 강의실을 박차고 나와 성당으로 달려갔어요. 신부님은 저와 함께 울며 말했죠. 새끼손가락(오키나와)이 잘려나가는 고통을 못 느낀다면 몸 전체(일본)가 죽은 거라고요." 이 일을 계기로 성직자의 길을 걸어온 나카무라 신부는 "신은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내 삶을 계획하고 이끌어줬던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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