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일의 들숨날숨] 변화를 만든 슈틸리케의 손, "너도 뛸 수 있어"

조회수 2015. 1. 26. 22: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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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의 생각을 잘 이해해주고 의견도 충분히 받아주는 지도자인 것 같다. 그리 오래 생활하진 않았으나 '이 감독이 내 편이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언론의 목소리나 여론의 흐름에 휩쓸리기 보다는 오로지 선수들만 본다. 자신이 보는 것만이 판단의 기준인 것 같다. 모든 결정이 대표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그런 믿음이 생기니 선수들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 같다.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한 동기부여를 만들었다."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호주 아시안컵 엔트리에서 제외된 베테랑 스트라이커 이동국의 말이다. 이동국이 본 그대로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휘봉을 잡으면서 "선입견을 버리고 선수들을 판단하겠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간절하고 목마른 선수들"이라면서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뜻을 전한 바 있다. 그 평범한 약속이 많은 것을 달라지게 했다.

울리 슈틸리케라는 독일인 지도자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사령탑으로 부임한 것은 지난해 10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약 4개월이 지났다. 짧은 시간이다. 꾸준하게 리그 경기가 진행되는 클럽 팀이라도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은 기간이다. 하물며 드문드문 모여 경기를 갖는 대표팀이다. 게다 브라질 월드컵 실패 이후 새로운 출발을 위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시행착오는 불가피해보였다.

그 지점에서 만난 아시안컵은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서는 무대였다. 선수 구성도 쉽지 않았다. 이동국과 김신욱 그리고 박주영이라는 간판 공격수들이 모두 참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회 도중 이청용과 구자철 등 핵심 멤버들이 중도하차하는 악재도 발생했다. 감기 바이러스라는 불청객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다 액땜이 됐다. 오히려 어려움을 딛고 만들어가는 승승장구라 더 신바람 난다. 경기를 거듭할수록 슈틸리케호의 전진에서 경쾌함이 느껴지고 있다. 그만큼 팀으로서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26일(이하 한국시간) 호주 시드니 스타디움서 열린 이라크와의 '2015 호주 아시안컵' 4강에서 2-0으로 승리를 거두고 결승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전반 20분 신데렐라 이정협이 결승 골을 넣었고 후반 5분 그간 마음고생이 많았던 센터백 김영권이 추가 골을 넣었다.

많은 것을 얻은 경기다. 지난 4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평가전을 시작으로 A매치 6경기 무실점 행진을 이어갔다. 6경기 동안 골을 내주지 않은 것은 지난 2004년 이후 11년 만의 기록이다. 그 기세를 앞세워 27년 만에 아시안컵 결승에 진출했다. 한국이 최종 무대에 오른 것은 1988년 카타르 아시안컵 이후 27년 만의 일이다. 이제 한국은 55년 만에 대회 우승이라는 케케묵은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호주와 UAE의 또 다른 4강전 승자와 오는 1월31일 우승을 놓고 다투게 된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경기를 보면서 '톱니바퀴 같은 조직력'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흔치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이라크전은 제법 맞물려 돌아갔다. 완벽하게 매끄러웠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으나 적어도 따로 놀지는 않았다. 최전방 이정협부터 최후방 김진현까지, 11명으로 구성된 축구 팀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배역을 충분히 숙지하고 무대에 오른 듯했다. 한배를 탄 일원들이 같은 마음으로 함께 노를 저었으니 없는 바람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확실히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하고자하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정신이 연결된 눈이 달라지니 발이 변했다. 90분 내내 누구하나 멈춰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굳이 뛰지 않아도 될 곳까지 달려갔다. 동료를 돕기 위한 커버플레이였다. 희생이자 협동이었다. 자신이 어려울 때 찾아오는 누군가를 봤으니 자신도 한발 더 뛰어야한다고 몸이 느꼈다. 이 모든 변화의 출발은 슈틸리케 감독이 '내민 손'에서 비롯됐다. 찾아온 간절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선수들의 의지가 하나로 뭉쳐 '원팀'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 어떤 대회보다 이름값에서 주는 무게감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팀이다. 상주상무라는 군팀에서도 백업으로 뛰었던 이정협이 슈틸리케호의 간판 스트라이커다. 이제는 예전의 기량이 아니라는 노장 차두리와 곽태휘가 수비 라인의 기둥으로 뛰고 있다. 한계가 있는 재능이라 평가절하 되던 남태희의 테크닉은 재조명되고 있다.

지금껏 '기성용 파트너'로 숱하게 거론됐던 후보들을 대신해 박주호가 중원의 붙박이가 되고 있다. 스물셋 막내 김진수는 '포스트 이영표'의 적임자가 되는 분위기다. 그리고, 김승규의 등장으로 한동안은 시끄러울 일 없겠다 생각됐던 수문장 자리는 김진현이 지키고 있다.

'이청용과 구자철이 빠져서 큰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슈틸리케 감독은 '이근호(혹은 한교원)와 남태희가 뛰면 돼'라고 말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방향키를 잡고 있다. 한국 축구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한국 축구를 전혀 몰랐던 파란 눈의 이방인이 가르쳐 주었다. 결국 축구는 11명이 함께 힘을 합쳤을 때 빛을 발하는 스포츠였다. "너도 뛸 수 있어"라며 슈틸리케가 내민 손이 많은 것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글= 임성일[뉴스1스포츠체육팀장/lastuncle@daum.net]

사진= 스포츠공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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