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죽인 '죽음의 천사' 앞에서 춤춘 17살 소녀

입력 2015. 1. 26. 11:58 수정 2015. 1. 27.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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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그는 엄마를 가리키며 왼쪽으로 가라고 말했고 나도 엄마를 따라갔죠. 그때 그가 나를 붙잡았어요. 그 눈빛을 결코 잊을 수 없어요. 그는 '엄마를 곧 볼 수 있다. 엄마는 샤워하러 간 거야'라고 말했죠."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3월. 지금은 슬로바키아에 속한 코시체라는 작은 도시에 살던 헝가리계 유대인 소녀 에디트 에바 에게르의 집에 나치군이 들이닥치면서 일가족의 비극은 시작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에게르의 기족은 '죽음의 천사'라 불리는 요제프 멩겔레 박사와 마주쳤다. 가스실로 보낼지, 아니면 생체실험용으로 살려둘지 결정권을 그가 쥐고 있었다.

에게르의 부모는 독가스실로 끌려가 죽음을 맞았고, 수용소에 홀로 남은 발레리나 에게르(당시 17세)는 부모를 죽게 한 '죽음의 천사'를 다시 한번 마주쳐야 했다.

멩겔레가 에게르가 갇힌 곳으로 찾아와 자신을 즐겁게 해주기를 원했다. 이에 다른 수감자들은 에게르에게 춤을 출 것을 권유했다. 에게르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강의 왈츠' 음악에 맞춰 춤을 춰야 했다.

에게르는 "너무 무서웠다"며 "눈을 감고 차이콥스키 음악에 맞춰 부다페스트 오페라 하우스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멩겔레는 에게르에게 보상으로 빵 한 덩이를 더 줬고, 에게르는 다른 소녀들과 빵을 나눠 먹었다. 이 소녀들은 아우슈비츠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기 전 오스트리아로 가는 '죽음의 행진' 때 병과 굶주림에 쓰러질 뻔 한 에게르의 생명을 구해줬다.

올해 87세를 맞은 에게르는 2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주년을 앞두고 CNN 방송에 출연,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현장에서 부모를 죽게 한 사람을 위해 춤을 췄던 아픈 기억을 안고 70년을 살았지만 에게르는 여전히 춤에 열정적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라 호야에 있는 에게르의 집은 발레리나 조각상으로 장식돼 있고, 에게르는 요즘 일요일에는 스윙 댄스를 추러 간다. 그는 "좋은 것들을 망치지 않는 완전한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에게르의 큰 딸 마리안느는 어릴 때 엄마는 매우 부끄러움이 많았지만 1970년대 아우슈비츠를 방문하고서 완전히 바뀌었다고 전했다.

마리안느는 "엄마 눈에는 언제나 슬픔이 있었는데 아우슈비츠에 다녀온 이후 그게 사라졌다"며 "엄마는 자유로워졌고 지금의 엄마가 되었다"고 말했다.

에게르는 1970년대에 심리학 공부를 시작해 지금은 임상심리학자로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했던 미군 병사들도 그의 환자들이다.

에게르는 "어떤 면에서 아우슈비츠는 내게 엄청난 선물을 줬다. 사람들이 충격에서 회복하고 인내하도록 안내해 줄 수 있으니 말이다"라고 했다.

mi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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