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클러치 히터'는 존재하는가?

이성훈 기자 2015. 1. 14.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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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중계방송에서 어떤 팀이 득점 기회를 잡고 다음 타자가 등장하는 순간, 자주 등장하는 자막이 득점권 타율이다. 주로 올 시즌 득점 기회에서 잘 친 선수들의 경우에 등장한다. 어떤 타자의 득점권 타율이 4할대라는 자막이 뜨면, 시청자들은 '다른 타자들보다 이 기회를 살릴 확률이 높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렇게 득점 기회에서 특별히 더 강한 타자를 영어식 표현으로 '클러치 히터 Clutch Hitter'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클러치 히터가 존재하는지는 야구계의 오랜 논쟁거리다. 위에 예를 든 중계방송의 자막은, 찬스에서 더 강한 능력을 발휘하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 등장한다. 현장에서 만나는 야구인과 팬들의 상당수도 '클러치 히터'의 존재를 믿는 분위기다. 하지만 야구 연구계의 생각은 다르다. '찬스에서 특별히 강한 타자'의 존재를 증명할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특정 시즌의 높은 득점권 성적은, 타자의 능력이 아닌 운의 장난이라는 것이다. 오늘까지 득점권 성적이 좋은 타자가, 내일 득점권에서 더 잘 할 거라고 볼 이유가 없다는 거다. 얼마 전 미국 ESPN이 다시 이 논쟁을 조명하고 국내 언론에서도 다루면서, '클러치 히터'의 존재 여부는 다시 화제가 됐다.

'클러치 히터'를 '평소보다 득점권 상황에서 더 잘 치는 타자'로 정의해 보자. 즉 평소 타율보다 득점권 타율이 더 높은 타자라고 생각해 보자. 이 기준으로 보면, 2013년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클러치 히터'는 이호준이었던 것 같다. 시즌 타율은 0.278이었는데, 득점권 타율은 무려 0.358이나 됐다. 득점권 타율이 평소 대비 29%나 높았다.

이들은 다음 시즌에도 득점권에서 더 잘 쳤을까?

이들 대부분의 '클러치 능력'은, 안타깝게도 1년 만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2013년의 클러치 히터들 중, 2014년의 '득점권 맹활약 순위' 톱10에 진입한 선수는 아무도 없다. 클러치 히터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걸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들 중 하나다.

타율 외에 다른 기록들은 어떨까? 각종 득점권 기록들의 2013년과 2014년의 상관 계수는 아래와 같다. (상관계수의 절대값이 1에 가까울수록 상관관계가 강하고, 0에 가까울수록 상관관계가 약하다. 가령 타자의 '삼진비율'은 상관계수 0.838로 대단히 높다. 지난 시즌의 삼진왕은 올해도 삼진왕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 반면 투수의 BABIP는 0.171로 대단히 낮다)

즉, 2013년과 2014년의 득점권 기록은, 거의 상관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어떤 시즌, 어느 기록을 봐도 마찬가지다. 특정 시즌의 득점권 성적과, 다음 시즌의 득점권 성적이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래도 예외가 있지 않을까? 잘 찾아보면 '꾸준히 득점권에서 잘 한' 선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 5년 간의 득점권 성적을 보면, 대단히 드물지만 예외도 존재한다. 물론 이들이 올해도 득점권에서 잘 할지는 알 수 없다. 즉 지난 5년 간의 뛰어난 득점권 성적이 '능력'인지 '계속된 행운'인지는 확인하기 힘들다는 뜻.

1. 유한준 : 5년 연속 득점권 OPS가 평소 대비 7% 이상 높았던 유일한 타자다.

더 인상적인 건 찬스에서 삼진을 줄이는 경향이다. 득점권 기회는 다른 상황에 비해 삼진의 '해악'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가령 이닝 선두타자의 삼진은 다른 형태의 아웃과 거의 같은 피해를 끼친다. 반면 득점권 상황에서 삼진은, 주자의 진루-득점 가능성까지 없애기 때문에 뜬공-땅볼 등 다른 형태의 아웃보다 더 손해가 크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평소보다 득점권 기회에서 삼진을 줄이는 타자는 타율-OPS 등에 잡히지 않는 기여를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유한준은 지난 5년 간, 득점권 기회에서 평소 대비 삼진을 가장 큰 폭으로 줄인 타자다.

2. 정근우 : 득점권 기회에서 가장 깐깐해지는 타자. 5년 연속 득점권에서 볼넷 비율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5년 통산 득점권 볼넷비율이 평소 대비 두 배 가까이 높다.

'강타선의 테이블세터'는, 득점권 기회라도 굳이 본인이 해결하지 않고 볼넷을 골라 더 좋은 기회를 만드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즉, 2013년까지 SK의 1번타자로서 정근우의 '득점권 상황 접근법'은 꽤 합리적이었다는 것이다. 단, 지난해 한화 타선에서도 어울리는 접근법이었을지는 의문이다.

이성훈 기자 che031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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