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된 잿빛 양의 공포

2015. 1. 2.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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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15년 만 60살이 되는 1955년생 4명의 자화상… 1060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의

절반을 짊어졌으나, 청춘의 노동을 바친 기업이, 나라가 쥐어주는 건 쥐꼬리만 한 연금

1955년 그들이 태어났다. 아기 울음소리가 전쟁의 상흔을 덮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베이비붐 세대'라고 불렀다. 1975년 스무 살의 청춘은 잿빛이었다. 유신 체제 아래에서 숨죽였다. 그들 대부분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1990년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떠받쳤던 기둥이었다. 2015년, 그들이 만 60살이 된다. 직장에서 밀려나지만 노후 대책은 막막하다. 그들의 노년은 청춘처럼 잿빛이다.'청양'(靑羊)의 해를 맞아, '늙은 양'(gray sheep)인 1955년생 4인의 초상을 그려봤다. 대기업 퇴직자, 대기업 정규직,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를 밀착 취재했다. 그들의 삶에는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구조적 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1060조원에 이르는 가계부채의 절반을 짊어진 세대는 50~60대다.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 50만 명이 매년 은퇴하는데, 이들의 평균 연금수령액은 월 42만원에 불과하다. 자녀들도 노후의 버팀목이 못 된다. 저성장의 늪에 빠진 한국 경제는 'D(디플레이션)의 공포'에 신음한다. 경제도, 사람도 신음 소리가 점점 커진다. 1955년생들에게 닥친 위기를 통해 2015년 맞이할 한국 경제의 단면을 들여다봤다. _편집자

#12월19일 아침 8시20분, 서울 강남역 근처

"아메리카노 한 잔이오." 첫 손님이다. "추운데 들어오세요." 컨테이너에 출입문 삼아 꽁꽁 막아놓은 비닐을 열어젖혔다. 찬바람이 손님을 따라 들어온다. 삐까뻔쩍한 강남 한복판, 서초구 서초동 1309-8 서울빌딩은 을씨년스럽다. 건물 곳곳에는 철거촌처럼 현수막이 붙어 있다. '5년, 10년 장사하라더니 말 바꿔 재건축으로 2년 만에 알몸으로 나가라?'

"2013년 6월 말, 건물주는 퇴직 뒤 차린 커피숍을 비워달라고 통보했다. 엄홍섭씨가 거부하자 건물주는 명도소송을 냈다."

그가 알몸으로 내쫓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도 2015년 1월5일. 같은 건물에서 영업하던 술집, 치킨 프랜차이즈 등 다른 가게 9곳은 이미 나갔거나, 그때까지 나가기로 했다. 1층 커피숍 주인인 엄홍섭씨만 남았다. 건물주는 4층짜리 건물을 17개 층으로 재건축할 계획이다. 충북 청주에 있는 하수도 도관 생산업체 '회장님'인 건물주는 빌딩 여러 채를 소유한 자산가다. 서울빌딩 세입자들에게 받은 권리금만 40여억원. 상가임대차보호법상 보증금 이외에 권리금을 내줄 의무는 없다. 다른 세입자들은 포기했지만 엄씨는 버티기로 했다. 버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제는 대기업 직원, 오늘은 내일이 두렵다

어제까지 그는 평범한 중산층이었다. 이른바 명문대를 졸업해 해운회사에서 6년, 코엑스에서 23년을 근무했다. 내 집도 있고, 두 아이의 학자금은 회사에서 대줬다. 큰 걱정 없이 살았다. 2010년 퇴직 뒤에는 달라졌다. 노후를 책임져줄 벌이가 필요했다. 아내(54)는 평소 꿈이던 커피숍을 해보자 했다. 아들(29)은 군 제대 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탐앤탐스 매장 경험을 쌓았다. 서울 풍납동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1억원을 대출받고 퇴직금을 보탰다. 10평 남짓한 커피숍을 차리는 데 권리금 1억6200만원, 보증금 4800만원 등 총 2억8천만원이 들었다. 건물 1층 부동산 주인은 "재건축은 걱정하지 마라. 5년이고 10년이고 장사해도 된다"고 장담했다. 2011년 7월, 라떼킹 강남역점이 문을 열었다.

꿈은 2년 만에 깨졌다. 2013년 6월 말, 건물주는 재건축을 이유로 가게를 비워달라고 통보했다. 엄씨가 거부하자 건물주는 명도소송을 냈다. 1년여의 법정다툼 끝에 법원은 2014년 9월25일까지 가게를 건물주에게 넘기지 않으면 강제집행하겠다는 계고장을 보내왔다. 2014년 10월 어느 날 법원 집행관과 용역 직원 등 10여 명이 들이닥쳤다. 아내는 그날 이후 혼자 있질 못한다. 가게 앞에는 '바리케이드'처럼 컨테이너를 갖다놨다. 가게 안에는 간이침대가 놓였다. 엄씨는 지난주 가게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는 오늘이 두렵다. 내일은 도시 하층민으로 추락할지 모른다. 회사에 다니는 딸을 제외한 가족 세 사람의 삶이 이곳에 달려 있다. 가족은 아침 8시부터 밤 12시30분까지 교대로 가게를 쓸고 닦으며 애지중지 가꿨다. 가까운 곳에 전세를 얻어 이사도 했다. 근처에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5곳이 생겨서 매출이 떨어져도 버틸 만했다. 그런데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기다. 그는 5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 상견례까지 마친 아들은 결혼을 미뤘다.

"마, 틀린 말은 아닌데 회사가 우리한테 뭐 해준 기 있어야 말이지. 회사는 잘나가면서 이리 박봉으로 해놓고. 간판 떼내야지." 최도철씨는 회사가 괘씸하다.

오후 3시, 그는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로 향했다. 건물 공동소유주인 건물주 아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9월22일부터 이곳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그처럼 쫓겨날 위기에 처한 다른 지역 상인 5명이 함께했다. "아무리 돈에 눈이 멀었어도 정년퇴직자, 청년창업가를 피눈물 흘리게 하지 마십시오." 칼바람 속에 40여 분간 확성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12월17일 오전 10시, 울산 현대중공업

쌩쌩. 바람 소리가 칼날처럼 귓등을 때렸다. 서울의 체감온도는 영하 17℃.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울산의 수은주는 영하 5℃를 가리켰다. 서울보다 울산의 공기는 매서웠다. 피부가 시리다 못해 아렸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이 7시간 파업에 들어간 날이었다. 1994년 이후 20년 만의 파업이다. 바닷바람이 여의도 2배 면적의 조선소를 휘감았다. 노동자 3천여 명 앞에 늘어선 붉은 깃발들이 쉴 새 없이 펄럭거렸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두꺼운 잠바를 껴입은 동료들과 달리, 그는 단출했다. 작업복 잠바에 모직 바지 차림. 붉은 머리띠를 묶은 모자 밑으로 희끗희끗 귀밑머리가 삐죽했다. "들어가 일하문 하나도 안 춥심더." 최도철씨는 의장생산부에서 배관, 사다리 등을 용접하는 일을 한다. 1984년 5월28일부터 만 30년 넘게 현대중공업에서 일했다. 정규직이었다. 지난해부터는 촉탁직이다. 현대중공업은 만 58살이 지나면 기본급의 60~80%만 받고 2년간 추가로 근무할 수 있는 선택적 정년연장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홍열씨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다. SK브로드밴드는 하청업체에 고객센터 운영을 위탁했고, 하청업체는 이씨에게 회수 업무를 맡겼다."

사실 그의 내일은 파업과 큰 상관이 없다. 내년이면 그는 어차피 회사를 떠난다. 당장 오늘이 손해다. 중간관리자들이 파업 참가자를 'NW'(No Work)로 분류해 특근을 시키지 않는 탓이다. "지 혼자 살자고 하는 기보다야, 여러 사람이 같이 살자는 겁니더." 회사는 내년 기본급 3만7천원 인상안을 내놨다. 내년엔 담뱃값이 한 갑당 2천원씩 오른다. 그는 하루에 담배를 한 갑 피운다. 월 6만원의 지출이 늘어난다. 찔끔 오르는 임금으로 담뱃값도 못 댈 판이다. 지난해 기본급은 7천원 올랐다. 짜장면 한 그릇 값이다. 물가는 치솟는데 월급 인상 속도만 더디다. 2008~2013년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평균 1.3% 늘어나는 데 그쳤다. 2014년 2분기부터는 상승률이 0%대다.

'우리가 잘되는 것이 나라가 잘되는 것이며, 나라가 잘되는 것이 우리가 잘될 수 있는 길이다.' 대문짝만한 글자들이 조선소 건물 외벽에 걸려 있다. "마, 틀린 말은 아닌데 회사가 우리한테 뭐 해준 기 있어야 말이지. 회사는 잘나가면서 이리 박봉으로 해놓고. 간판 떼내야지." 그는 회사가 괘씸하다. 세계 1위 조선업체라면서, 안으로는 노동자들을 홀대한다고 느껴서다.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전 의원은 지난 10년간 3100억원의 배당금을 챙겨갔다. 32년차인 그의 11월치 정기급여 명세서에는 실지급액 200만8천원이 찍혔다. 의료비 등 각종 수당이 포함된 금액이 그렇다. 회사가 그해 성과에 따라 지급하는 500만~1천만원가량의 일시금이 없으면 생활비 대기에도 빠듯하다. 평균연봉(18년차 기준) 7200만원은 부풀려진 숫자다. 저가 수주 등 경영 실패로 인해 회사가 올해 3조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해놓고선 만날 고임금만 탓한다.

그는 양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선박 블록을 조립할 때 '함마'(해머) 때리는 소리에 시달린 탓이다. 업무상 재해다. 회사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결과다. 그에게 지금 남은 건 난청과 20평짜리 아파트, 5천여만원의 은행 대출금이다. 혈액암으로 투병한 어머니 병원비, 강원도 삼척 고향집이 태풍으로 망가지는 바람에 들어간 수리비 등 예상치 못한 지출은 빚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1억6천여만원의 퇴직금은 빚 갚고, 막내아들(17) 학자금을 떼어놓으면 모래알처럼 산산이 흩어져버릴 게다. 대학 졸업 뒤 보험설계사를 하다가 결혼한 큰딸(23), 실업고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전자제품 생산공장에 취직한 둘째딸(20)의 뒷바라지를 마친 게 그나마 다행이다. 노후를 걱정하는 아내(53)는 지난달부터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선박을 조립하며 생긴 난청

이제 대기업 정규직도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현대중공업 노조 사무실 앞에 붙어 있는 '4년차 조합원 아내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0일 이후 13일까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그 뒤론 전화 받는 것도 두렵고 누군가에게 손 벌리는 것도 두렵습니다." 4년차 정규직의 월 실수령액은 140만원이 채 안 된다. 현대중공업의 월급날은 매달 10일이다.

#12월19일 저녁 7시, 서울 광화문

그의 월급날도 매달 10일이다. 11월치 '보수내역'에는 97만8610원이 실지급액으로 찍혔다. 10월에는 131만9955원, 9월에는 166만5174원. 3월에만 딱 한 번 217만원을 받았을 뿐, 그의 월급은 180만원 밑이었다. 그는 '월급'이라 부르지만, 회사는 '보수'라고 부른다. 그는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하지만, 회사는 그를 '개인사업자'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의 보수 명목은 '회수 금액'이다. 사람들이 인터넷, 인터넷 전화, IPTV 등을 해지하면 단말기, 셋톱박스를 회수해오는 게 그의 일이다. 그는 모닝을 타고 서울 마포구 망원동, 합정동, 상수동 일대를 누빈다. 기름값이나 주차 위반 범칙금, 고객과 회수 일정을 정하기 위해 전화 통화하는 요금(월 7만~8만원)도 그의 몫이다. 4대 보험에도 가입돼 있지 않다. 모뎀 4천원, 셋톱박스 5천원. 회수 1건당 수수료를 받는 식이다.

이홍열씨는 SK브로드밴드 마포홈고객센터에서 일하는 '회수 기사'다. 2007년부터 이곳에서 일했지만, 회사와 근로계약서를 쓴 일이 없다. 개인사업자로서 도급계약서를 쓰지도 않았다. 그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다. SK브로드밴드는 하청업체에 고객센터 운영을 위탁했고, 하청업체는 이씨에게 회수 업무를 맡겼다. 간접고용된 비정규직이다. 고용노동부는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협력업체 소속 개통·수리 기사 가운데 일부를 자영업자가 아닌 노동자라고 2014년 9월 판정했다. 이들은 회사 쪽에 임·단협을 요구하며 한 달째 파업 중이다.

그는 요즘 대중교통비도 부담스럽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 집에서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시내를 매일 오간다. 다음달엔 아예 월급이 안 나올지 모른다. 그래도 그는 매일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한다. 묵주 한 알을 돌릴 때마다 꽃 한 송이씩을 바친다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노사가 화합해서 힘들지 않도록 해달라'고. 개인적인 소망도 보탠다. 앞으로 10년은 더 일하고 싶다고. 그는 마포홈고객센터 동료 중 최연장자다.

"미래가 뭣도 안 돼 있는데 10년은 더 일해야죠!"

지금까지 그는 버티는 삶을 살았다. 충남 천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맨몸으로 혼자 상경했다. 영등포 쪽방에서 기숙생활을 하며 공장을 다녔고, 극장이 있는 술집에서 군무를 추기도 했다. 23년 전 그는 서울 시내 호텔 시설과의 목수였다. 어느 날 철제 구조물이 그의 몸을 덮쳤다. 큰 사고였다. 4번 요추가 으스러졌다. 몇 년을 누워만 있었다. 아내는 리본접기로 생계를 꾸렸다. 겨우 몸을 추스른 뒤에는 개인용달차로 퀵서비스 배달일을 했다. 아내가 백화점 판매 점원으로 맞벌이해서 간신히 버텼다.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시절이다.

"직장을 30년 다녔으면 퇴직금이라도 받지, 장사는 암것두 없어." 김연숙씨가 암 수술을 하고 나서도 다시 장사에 나선 이유다.

더 버텨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다세대주택에 전세로 들어가면서 대출한 2천만원을 갚아야 한다. 살고 있는 집도 주인이 매매로 내놓아서 언제 이사해야 할지 모른다. 자동차 할부금도 아직 1년을 더 부어야 한다. 고등학교 졸업 뒤 간호학원에 다녀 이비인후과에 취직한 딸(22)과 내년에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할 아들(26)이 자기 앞가림은 할 터다. 하지만 6년 전에 자궁경부암 수술을 한 아내(51)와 그의 앞날은 누가 책임지나. 비정규직은 은행 대출 받는 것도 더 까다롭다. 그런데 정부는 55살 이상 고령자를 비정규 파견노동자로 더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해주겠단다. "미래가 뭣도 안 돼 있는데 10년은 더 일해야죠!" 웃으며 농반진반 외치는 그의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진다.

#12월24일 오전 11시, 경기도 평택 통복시장

그도 3년 전에 암 수술을 받았다. 어느 날 시장에서 장사를 하다 말고 갑자기 어지러워 쓰러질 뻔했다. 먹고사느라 바빠 건강검진 한번 못 받고 56년을 버텼다. 시장 2층에 있는 병원에선 혈압이 높다고 했다. 한 달 뒤엔 목소리까지 쉬었다. 갑상선암 3기였다. 수술받고 나서 생애 첫 휴가를 받았다. 1년7개월 동안 장사를 접었다.

김연숙씨는 통복시장 채소 노점상이다. 충남 광천에서 농사를 짓던 그는 30년 전 남편, 딸 셋과 무작정 상경했다. 언니한테 빌린 130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경기도 평택에 터 잡고, 시장에서 처음 판 물건은 고운 소금. 그의 삶도 짜디짠 소금 같았다. 짠순이처럼 독하게 살았다. 두 살짜리 막내딸을 업고 종일 채소를 팔았다. 울다 지친 아이는 종이상자를 이불 삼아 잠들었다. 배고프다고 보채도 요구르트 하나 사먹이지 못했다. 자기 끼니를 못 챙긴 건 물론이다. 시장 상인들이 "징그럽게 독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배춧값은 올라도 벌이는 줄어

그의 휴일은 1년에 달랑 이틀뿐이다. 설날과 한가위 명절 당일. 막차를 타고 시골에 내려갔다가 첫차를 타고 올라와 채소 좌판을 다시 펼쳤다. 여름엔 새벽 4시30분, 겨울엔 아침 8시. 통복시장 출근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저녁 7~8시에 퇴근해 쓰러지듯이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신용카드니, 자동차는 아예 구경도 못했다. 안 했다. 32평짜리 아파트도 사고, 딸 셋의 대학 교육과 결혼까지 뒷바라지했다. 노가다로 목수 일을 했던 남편도 월 150만원은 벌어다줬다. 그래도 장사 대물림은 절대 안 한다. "일확천금을 번다 해도 사람 노릇 못하고 사니까." 큰딸 현미(36)씨는 엄마의 만류로 옷가게 대신 어린이집을 열었다.

'33호 현미네 야채'. 시장 통로에 좌판을 벌인 노점상이지만, 어엿한 문패도 걸려 있다. 배추, 감자, 시금치, 당근. 갖가지 채소가 얌전하게 진열돼 있다. 그의 성격이다. 5천원짜리 티셔츠를 입고 살지언정, 화장과 머리 손질을 거르진 않는다.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다. 목장갑을 낀 손은 한시도 쉴 틈이 없다. 뽀얗게 먼지 앉은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쪽파를 깐다. 다듬은 쪽파 한 단은 1천원 더 비싸게 팔린다.

그는 예전보다는 일이 덜 고되다고 했다. 3년 전 전통시장 시설 현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시장에 지붕이 씌워졌다. 눈 오면 쓸어내느라, 비 오면 비닐 덮느라 동동거리지 않아도 된 것만도 감지덕지다. 공동 전기·수도 시설도 놓였다. 그런데도 마음은 편치 않다. 그가 처음 장사를 시작할 때 한 통에 500원이던 배춧값은 3천원으로 올랐다. 하지만 그의 벌이는 되레 줄었다. 시장 근처에 대형마트, 아파트 상가가 하나둘 늘어난 탓이다. 평택시에 이미 대형마트가 4곳이나 있는데, 걸어서 15분 거리에 이마트 2호점이 또 입점을 준비 중이다. "대형마트 주말에 영업해도 괜찮대매요?" 최근 판결로 인해 대형마트가 월 2회 의무휴업을 안 할까봐 또 걱정이다. 그는 무를 1천원에 판다. 대형마트에선 1700원에 판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형마트를 찾는다. 재래시장 살리기의 상징인 온누리상품권도 올 추석엔 지난해의 20%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암 수술 하고 다시 일선으로

"직장을 30년 다녔으면 퇴직금이라도 받지, 장사는 암것두 없어." 그가 암 수술을 하고 나서도 다시 장사에 나선 이유다. 남편(69)은 8년 전 허리를 다쳐 일을 못한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생활비도 보태야 한다. 노후 대책이라고는 월 17만원 받게 될 국민연금이 전부다. "생활대책이 안 서잖아. 헐 수 있는 때까지 장사해야 혀. 병이 재발되기 전에 10원이라도 더 벌어놔야 혀." 그는 웃으며 말했다. 웃음 한구석이 헛헛하다. 2015년, 그들은 아마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날지 모른다.

평택·울산=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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