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원전 재난 대비훈련 '한심' 결론은 "알아서 탈출하라"

부산 | 권기정 기자 2014. 12. 2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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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 방사성물질 누출' 대비 48개 기관 대규모 훈련방호복도 매뉴얼도 연락체계도 지원센터도 "엉망"

정부가 고리원자력발전소의 방사성물질 누출 등 비상사태에 대비해 지난달 20일 4000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방사능 방재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하지만 부실투성이로 사실상 "알아서 탈출하라"는 수준의 훈련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노후원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지만 참가자들조차 '엉망'이라는 평가를 할 정도로 당국의 대응은 안일했다.

경향신문이 지난 23일 부산시청에서 열린 '2014 고리 방사능 방재 연합훈련 강평회'를 취재한 결과 참가자들은 "실전적이고 효율적인 훈련이 아니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런 부실한 대응력으로는 비상사태 때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세월호 참사 발생 이후에도 안전불감증이 여전함을 드러낸 것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 한국원자력의학원, 부산시, 부산시교육청, 부산경찰청 등 48개 기관으로 구성된 방사능방재대책본부의 운영부터 문제투성이였다. 우선 기관 간 통신이 원활하지 못했다. 국가재난안전통신망(TRS) 사용에 익숙지 않아 참가자들은 개인 휴대전화로 연락을 취하느라 지하에서는 연락이 두절되기도 했다. 재난현장의 정보를 각 기관이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비상대응정보시스템의 활용도도 떨어져 각 기관이 조치사항을 입력하는 수준에 그쳤던 것으로 평가됐다. 임무와 역할을 숙지할 수 있었다는 게 그나마 성과였다.

원전이 위치한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 인근 주민을 열차와 버스를 이용해 대피시키는 훈련도 허점투성이로 지적됐다. 주민들이 역에 한꺼번에 몰려 에스컬레이터가 멈추면서 대피가 지연되기도 했고, 훈련에 참가한 4개 학교 학생들의 대피훈련은 훈련통제관이 불참해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현장 대응요원은 방독면과 방호복 등 방호장구를 착용하지 않아 훈련이 형식에 그쳤음을 보여줬다. 방사능 오염차량과 비오염 차량이 뒤엉켜 운행되기도 했다.

이재민지원센터 내 방사선 영향상담소, 생활지원실, 현장 응급의료봉사단, 치안통제소의 훈련도 문제투성이였다. 지원센터의 교육 프로그램은 느슨하게 편성돼 집중도가 떨어졌고, 주민 행동지침 등의 교육은 실시되지 않았다. 훈련에 참가했던 한 주민은 "고리원전 주변에서 지진이 일어나면 차를 운전하든지 해서 빨리 해운대로 가라고 교육받았다"고 말했다.

이 밖에 "중앙부처가 훈련 참여를 제대로 독려하지 않아 기관마다 형식적으로 훈련에 임했고 명확한 훈련지침이 없어 혼선을 빚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한국원자력의학원 관계자는 "참가 기관이 사전회의를 통해 매뉴얼을 숙지했지만 훈련에는 엉뚱한 사람이 나와 훈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대규모 이재민 발생과 상황 장기화에 대한 대비책도 없었다"고 말했다. 의료자원봉사단으로 참가한 동의과학대 관계자는 "실제 상황을 재연해야 하는데도 방사능 피폭 환자유형을 지정해 주지 않았다"고 했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주관하는 이번 훈련은 4년마다 실시돼 왔으나 원자력안전법과 방사능방재법이 지난 11월22일 시행됨에 따라 앞으로는 2년 주기로 실시된다.

<부산 | 권기정 기자 kw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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