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통해야.." 통역에 진땀 빼는 법원

양은경 기자 입력 2014. 12. 26. 03:04 수정 2014. 12. 26.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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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온 30대 태국인 A씨는 직장 동료인 태국인 B씨와 함께 길 가는 여성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두 사람은 '술에 취해 길거리를 지나갔을 뿐 피해자를 추행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해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 증언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피해자는 지난해 한국인과 결혼해 갓 들어온 중국 여성이었다. 현재는 잠시 친정인 중국에 가 있어 재판이 미뤄졌지만 귀국하면 태국인 피고인과 중국인 피해자가 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상황이다.

대한민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외국인이 많아지면서 법정에 서는 외국인 국적도 다양해졌다. 대법원의 '2014 사법연감'에 따르면 2008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형사범죄로 기소돼 1심 법정에 선 외국인은 나라별로 40명을 넘는 나라만 20개국이나 된다.

한국과 장기간 관계를 맺어온 중국이 2만487명으로 가장 많고 미국·캐나다·일본 등도 있지만, 최근 들어 인적 교류가 급격히 늘어난 태국·몽골·러시아·파키스탄·우즈베키스탄·나이지리아·스리랑카 등 중동과 유럽, 아프리카 나라들도 망라돼 있다.

지난 8월에는 무역 거래를 명분으로 불법 입국을 알선한 이집트인들이 기소됐고, 이번 달에는 명동 환전소를 턴 남미의 콜롬비아 절도단이 붙잡혀 법정으로 오는 등 국적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카드 위조나 이메일 해킹 등 국제 조직과 연계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많아지면서 부쩍 눈에 띈다.

그러다 보니 법원에서는 통역(通譯)이 문제다. 7년째 법정 통역을 해온 영어 통역인 김모(45)씨는 얼마 전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이메일을 해킹해 물품 대금을 가로채 구속된 40대 나이지리아인의 통역을 맡았는데 부족어 특유의 억양이 너무 강해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나이지리아 공용어는 영어이지만 하우샤, 요르바, 이보 등 250여개 부족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방언(方言·사투리)이 많은 파키스탄은 피고인이 방언을 사용할 경우 이를 파키스탄 표준어인 우르드어로, 우르드어를 다시 한국어로 바꾸는 이중 통역을 쓸 때도 있다.

영어 통역인 이모(37)씨는 올해 4월경 절도 혐의로 기소된 튀니지인의 통역을 맡았는데, 피고인이 영어를 어느 정도 하기는 했지만 혐의를 부인하면서 모국어인 아랍어로 재판을 진행하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아랍어 통역을 선정하기 위해 재판이 몇 달간 연기되기도 했다.

해당 언어의 통역인 자체를 구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지난 10월 위조 카드로 원정 쇼핑을 왔다가 서울중앙지법에 구속 기소된 루마니아인들이나, 최근 서울서부지법에 기소된 아제르바이잔인들의 경우다. 현재 각급 법원은 통역인 명단을 미리 작성해 대법원에 보고하는데 대법원은 2013년 말 현재 네팔어, 키르키즈어, 우즈베키스탄어 등 총 28개 언어 1290명의 통역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

만약 외국인이 재판받는 법원에서 해당 언어의 통역인이 없으면 다른 법원의 통역인들을 요청해 재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루마니아어나 아제르바이잔 언어 통역인은 아예 대법원의 통역인 명부에도 없다. 결국 해당 재판부는 통역대학원 등을 백방으로 수소문해 통역인을 구해 가까스로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수사 단계에서도 통역인이 있었지만 재판의 공정을 위해 수사에 참여했던 통역인을 법원에선 거의 쓰지 않는다.

대법원 관계자는 "여건상 부족 언어나 방언 등 모든 언어의 통역을 대비할 수는 없겠지만 글로벌 시대에 외국인의 재판받을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통역인 명단을 더욱 확충하고 교육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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