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덜덜 떨며 지켜본 前 '각하'의 송년회

최고운 기자 입력 2014. 12. 21. 16:33 수정 2014. 12. 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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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과 측근들이 오늘 저녁 모인다. 그곳에 가라.'

그 날 저의 임무는 아침 일찍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과 측근들의 송년회'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송년회 장소는 서울 강남의 삼원가든이었습니다. 프로골프선수 박지은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으로 널리 알려졌죠. 소망교회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올해 특별히 열리는 송년회는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대통령 당선일, 결혼기념일, 생일이 겹치는 12월 19일 즈음이 되면 늘 모이던 자리입니다. 평소 같으면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 자신의 측근들과 저녁 한 끼 하는 걸 취재하러 가지 않았겠죠.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여야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역점사업이었던 '자원외교'에 대한 국정조사를 하기로 합의한 이후였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국정조사가 열리고, 증인으로 나오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고 손이 곱아드는 날씨. 송년회 시간은 7시였지만, 기자들은 한 시간 전부터 진을 쳤습니다. 친(親)이명박 계로 분류되는 조해진 권성동 등 현(現) 의원, 권택기 고흥길 등 전(前) 의원들이 하나둘 식당으로 들어갔죠. 이 전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기자들이 떼로 몰려들면서 생길 불상사를 막기 위해 대표로 질문할 기자 두 명을 정해놓고 다시 기다렸습니다.

6시 40분쯤, 그분이 도착하셨습니다. 검은 코트에 회색 머플러, 붉은색 넥타이 차림으로 차에서 내리는 이 전 대통령의 표정은 매우 밝았습니다. 파박파박 플래시가 터지고 대표 질문할 기자 두 명이 옆에 착 달라붙었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건강은 어떠신지 안부 정도 물을 법하지만 모두 생략한 채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에 들어갑니다.

(기자) "대통령님 지난주 국회에서 자원외교 국조 합의했는데 한 말씀만 해주시죠. "

기자들이 잔뜩 와서 기다린다는 보고를 받으셨을 테고, 어떤 것을 물어볼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이 전 대통령은 말없이 질문하는 기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기자 등에 오른손을 다정히 얹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셨죠.

(이명박 전 대통령) "국회에서 할 일이지. 내(나)한테 물으면 되나."

그리고는 웃으면서 기자 등을 툭툭 칩니다. 이 전 대통령 옆에 서 있던 이재오 의원, 조해진 의원도 함께 웃습니다. 질문은 추가됐습니다.

(기자) "증인 채택되면 나오실 의향 있다고 보면 되나요."

이 질문을 할 때쯤에는 식당 입구에 거의 다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허허허 웃은 이 전 대통령, 들어가기 전 아리송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 구름 같은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다? 추리해서 이야기 하면 안 되지."

구름? 뭐지? 나온다는 의미일까? 택도 없는 소리라는 걸까? 순간 궁금증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났습니다.

기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녹음된 파일을 다시 들어보며 그 말을 해석하려 애썼습니다. "~하면 ~한다." 하는 이 전 대통령 특유의 화법을 기억하시는 분 많으시죠? 한동안 성대모사도 인기를 끌곤 했으니까요. 앞은 잘 들리지만 뒤는 잘 들리지 않는 특유의 목소리로 인해 제대로 못 들은 부분을 확인하려 낑낑댔습니다. 마치 암호를 해석하듯 말입니다. 조사 하나까지 들어보려는 노력을 기울인 뒤 기자들은 갈비탕을 먹고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송년회를 지켜봐야 하니까요.

송년회는 삼원가든 신관 2층 창가 쪽 방에서 진행됐습니다. 안 보이는 곳이면 밖에 서 있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잘 보이는 곳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망원렌즈로 당겨서 보는 수고 없이도 이 전 대통령의 표정, 입 모양까지 다 보였으니까요. 가장 안쪽에 앉은 이 전 대통령의 오른쪽에는 이윤성 前 국회 부의장이 앉았습니다. 오른쪽에는 친이계 좌장이자 최근 개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재오 의원, 그 옆에는 최병국 전 의원이 앉았죠.

종업원들이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더니 잠시 후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미국산 쇠고기가 식사 메뉴였거든요. 돈이 없어서 한우를 못 드시는 분들도 아닌데 미국산 쇠고기를 먹기로 했다는 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직후 '광우병 쇠고기' 파동을 겪었습니다. 저라면 미국산 쇠고기는 보고 싶지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죠. "봐라, 미국산 쇠고기 안전하다." 하는 속내였을까요?

고기가 익어가자, 건배사가 시작됐습니다. 이 전 대통령, 이재오 의원 등 한 사람씩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몇 마디 한 뒤 다 같이 잔을 들어 "위하여"를 외칩니다. 술자리가 많아지는 연말이면 건배사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직장인의 입장에서 전직 대통령도 건배사가 평범하다는 것에 잠깐 위안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두 시간 반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기자들의 손과 발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송년회가 얼른 끝나기만을 간절히 빌고 또 빌었습니다. 한 백번쯤 빌었을까요? 드디어 자리가 끝났습니다. 술 탓에 얼굴이 발그레해진 이 전 대통령이 웃으며 나오십니다. 기자들이 다시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먼저 말을 건네셨죠.

(이명박 전 대통령) "식사하셨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고. 여러분도 잘되시고. 나라도 잘되고."

우르르 몰려든 기자들, 밖에서 덜덜 떨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 "정윤회 문건 파동 어떻게 보나, 새누리당이 국정조사 받아들인 거 섭섭하지 않나." 물었지만 대답은 이러하였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아유 그런 거 물으려고 이 늦게까지 기다렸어?" "모두 모두 행복해요. 나라도 행복하고 우리 모두 행복해."

건배사를 오래 하시던데 어떤 거 강조하셨는지 재차 확인하려 하였지만, "우리 모두 행복하자"며 차를 타고 떠나셨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가셨지만 기자들은 떠나지 못했습니다. 참석자들에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물어봐야 했으니까요.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이재오 의원) "여러분 눈치들도 없다 내일 생일인데 그런 얘기 하겠나. 재밌게 잘 살자 이런 이야기지, 모이는 거 자체를 오해할 텐데 정치적인 이야기까지 해버리면 되겠나."

(김용태 의원) "아무것도 없었어. 4대강이고 뭐고 없었어. 다들 이제 좋은 시간 보내고 그런 얘기라. 다들 잘하자. 여러분들이 나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느냐. 여러분들이 잘하자. 그거 말고는 없어요."

(권성동 의원) "전 대통령이 멋지게 살아가는 문화 꼭 만들고 싶다 하더라. 퇴임하고 부시랑 빌 클린턴 만난 거 그런 경험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여러분들 덕분이라고."

이 전 대통령은 새해 1월 말쯤 회고록을 출간합니다. 회고록에 대해 송년회에서 이 전 대통령은 "역사적, 사회적으로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썼던 자서전은 200만 부가 넘게 팔렸습니다.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했던 관계 등을 나름대로 솔직하게 기술했던 덕분이죠. 이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어떤 내용이 담길까요?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 사업을 둘러싼 허심탄회한 뒷이야기를 써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까요, 아니면 "모두 행복하자."식의 '구름 같은 이야기'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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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운 기자 gowoo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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