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회항' 사태로 본 사과의 기술

전영선 입력 2014. 12. 20. 01:43 수정 2014. 12. 2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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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 원칙' 무시, 조건부·변명형 사과는 불난 데 부채질"소나기 피하고보자 식 대응 안 통해"동서식품 시리얼, 남양유업 '갑질'알쏭달쏭한 해명으로 불신 키워

"사과는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미국 정신과전문의 아론 라자르는 100여 건의 사과 사례를 분석한 뒤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최근 대한항공이 '땅콩 회항' 사건 전개 과정에서 보여준 행태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소통 전문가들은 "사과만 제대로 했어도 사태가 이 지경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수습 과정에서 어떻게 사과를 하느냐, 즉 사과의 기술에 따라 극과 극의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위기 상황에서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고 위기 돌파의 발판을 만드는 사과의 법칙에는 어떤 요소들이 있을까.

 ◆누가 누구에게 왜 미안한지 밝혀라 = 대한항공은 땅콩 회항 사건과 관련해 지금까지 두 번의 사과문을 냈다. 사건 발생 초기에 나온 8일 사과문은 '사무장이 잘못해 당연한 지적을 했고 회항이 위험하지도 않았다'는 내용이다. 여론이 악화되자 일간지 광고 형태로 낸 16일 사과문은 '잘못했다'는 취지의 말만 반복했을 뿐 주체나 사과 대상, 사과 이유가 들어 있지 않았다. 조현아 전 부사장이 주체가 돼야 함에도 회사명 뒤에 두루뭉술하게 숨었다. 특히 첫 사과문은 "조 전 부사장의 지적은 당연하다"고 밝혀 사과의 대상으로 바꿔놓았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류기욱씨는 "누가, 누구에 대해, 무엇을 잘못했다는 점이 없었고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지 못했다"며 "사과문보다는 '입장문'이다"고 말했다. 기업이 위기상황에서 사과문을 발표할 때 지켜야 할 'CAP'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CAP' 원칙이란 C(Care and Concern·피해자에 대한 미안함), A(Action·행동계획), P(Prevention·재발방지 약속)를 뜻한다.

 국내 기업이 낸 사과문은 대개 이와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올해 10월 동서식품이 낸 대장균 시리얼 사과문도 잘못한 사람과 잘못을 숨긴 '퀴즈형' 사과문이었다. 사과문에 '소비자 심려'로 포장된 문제점은 '대장균이 검출돼 폐기해야 할 시리얼의 재사용'으로 바꿨어야 했다. 이때도 대표의 이름은 쏙 빠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적발과 검찰 압수수색 이후 떠밀려 낸 사과문은 역풍으로 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이광복 대표가 검찰 조사에서 "(대장균) 시리얼을 섞는 것은 관행"이라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는 사람만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사과문에 잘못을 제대로 밝혀야 하는 이유다. 2007년 7월 완구업체 마텔의 납페인트 장난감 리콜 사태가 대표적 사례다. 로버트 에커트 당시 마텔 최고경영자(CEO)는 '완구에서 납페인트 성분이 발견됐다'는 자체 조사 보고서를 공개한 다음날 사과문을 냈다. 리콜되는 완구 100만 점의 종류와 생산 시기 등을 알리면서 "리콜에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 특히 완구를 산 고객들에게 사과한다"고 말했다.

 또 "우리의 목표는 이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고 책임감을 갖고 시스템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총 세 번에 걸쳐 2100만 점을 리콜하고 생산공정을 바꿨다. 이 기간 대중과 주주들에게 보낸 메시지의 서두는 대부분 "미안하다"가 먼저였다. 진행 상황은 수시로 업데이트해 알렸다. 리콜을 알리는 신문 캠페인 광고에도 회사 대표가 직접 서명했다.

 ◆사족을 뗀 사과가 통한다 =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김병희 교수는 "오해받고 있고 억울하다고 느껴도 사과문에 이를 드러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사과문에선 효과를 반감시키는 '하지만' '다만' '그러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겠다"는 투의 조건부 사과는 사과받는 사람의 감정을 더욱 상하게 할 뿐이다.

 지난해 5월 남양유업 영업사원이 대리점에 '밀어내기 영업'을 하는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발표된 사과문엔 진정성 없는 변명이 적지 않았다. "이미 3년 전 일로 대리점에 깊은 사과를 드렸다"는 등이었다. 롯데카드도 개인정보 유출사태 사과문엔 '만약 이번 사건과 관련해 피해가 발생한다면 고객님께 반드시 보상하겠다'는 문구를 넣었다. 화가 난 이유가 개인정보 유출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해 붙은 조건이다.

 지난 9월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의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 쌤앤파커스도 구구절절한 해명으로 사과를 망쳤다. 출판사 상무의 수습사원 성추행사건을 숨기다 올린 사과문엔 "서로를 아끼는 의미로 구성원들이 프리허그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였다"를 비롯해 각종 변명으로 채워져 있었다. 불매운동이 이는 등 사태가 심각해지자 출판사 대표는 보다 진지한 두 번째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벗으니까 상무다'와 같은 패러디물과 앞선 해명을 덮기엔 역부족이었다.

 미국 저비용 항공사 제트블루의 CEO 데이비드 닐먼은 2007년 2월 뉴욕의 JFK공항에서 발생한 폭설로 인한 지연 사태에 사과하며 일체의 변명을 하지 않았다. '고객 권리장전'이라는 이름의 구체적인 대책을 발표하며 사과했다. 이는 온라인상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악의 위기인 것 같았던 사태는 책임자의 깔끔한 사과로 무명 항공사의 이름을 알리는 호재가 됐다.

 ◆신속한 사과의 힘 = 대학 신입생 9명 등 총 10명이 숨진 1월 경주 마리나리조트 참사에선 코오롱의 신속한 사과가 위력을 발휘했다. 이웅열 회장은 사건 발생 한 시간 만에 보고를 받았고 바로 현장으로 내려가 사고 현장에서 사과문을 발표했다. 서원대 김병희 교수는 "사고의 규모 면에서 땅콩 회항보다 훨씬 심각한 사건이었는데도 원만하게 수습됐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대중에겐 '소나기를 피하고 보자'는 식의 대응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수위를 조절하려다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여론에 밀리고 사정당국의 조사가 시작된 후에 나오는 사과문은 "늦었다"는 인상을 준다. 경우에 따라 숙고해야 할 때가 있지만 대체로 빠를수록 가산점이 붙는다.

 청주대 광고홍보학과 김찬석 교수는 "실패한 사과문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공급자 시각에서 작성되는 오류를 범한다"며 "소비자·고객·국민 등 수요자의 상태에 공감하고 진심을 다해야 제대로 된 사과문이 나온다"고 말했다.

전영선·노진호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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