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밖에 모르는" 정명훈 감독의 사퇴를 권한다

입력 2014. 12. 16. 13:33 수정 2014. 12. 1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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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훈의 힐링클래식] 20년 동안 그를 지켜본 PD의 공개편지

[미디어오늘 이채훈 한국PD교육원 전문위원·전 MBC PD]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전주곡 http://youtu.be/wAlagqFsBto(노래 안드레아 보첼리, 지휘 정명훈)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 이름을 보고, "아, 그런 PD가 있었지" 정도 떠올리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최근 서울시향의 극심한 내홍을 지켜보며, 정명훈 감독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침묵할 수 없어서 글 올립니다. 정 감독에게 직접 쓰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입니다.

20년 전 이맘때, 정 감독은 파리 바스티유 음악감독 자리를 내놓으셨습니다. 프랑스 정치의 좌우대립에 휘말려 강제로 쫓겨난 거나 다름없었지요. 당시 저는 MBC <문화집중>에서 정 감독의 동향을 세 차례 시청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40대 초반의 유망한 지휘자 정명훈의 앞날을 시청자들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았지요. 바스티유에서 물러나 귀국하신 뒤, MBC 스튜디오에서 한 시간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정 감독은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셨고, 그 말은 아름다운 반향을 낳았습니다. 순수하게 예술에만 헌신한 분이 추악한 정치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고, 저는 대다수 시청자들과 함께 정 감독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냈습니다.

그 뒤 정 감독은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하셨고, 두 차례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저를 만나셨습니다. 1996년 <정상의 음악가족 정트리오 - 마에스트로 정명훈>, 2007년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도전> 편이었지요. 1996년 다큐를 보신 뒤, 다큐 자체보다는 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쿨 장면을 언급하며 "내가 피아노를 저렇게 잘 쳤나?" 하셨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2007년 다큐를 촬영할 때, 다음해가 메시앙 탄생 100년이니 <투랑갈릴라> 교향곡을 한국에서 연주하면 좋지 않겠느냐 얘기했고, 제 의견을 받아들인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이듬해 서울시향은 정 감독의 지휘로 이 대곡을 멋지게 연주했습니다. 저는 정 감독과 함께 하는 메시앙 다큐를 MBC에서 추진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지요.이번에 또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셨군요. 20년 전과 달리 지금은 이 말씀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뉘앙스를 갖게 된다는 점, 잘 아시겠지요? 생애 마지막 해에 피아노를 장만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다 간 슈베르트가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면 모두 수긍할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과 부를 실컷 누리다가 나치 부역 혐의를 받게 된 카라얀이 "음악밖에 몰랐다"고 얘기하면 설득력이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정 감독께서 프랑스 정치의 희생양이 됐을 때와 한국에서 돈과 권력을 누리는 지금은, 같은 말이라도 천양지차가 있다는 것입니다. 음악에도 무수한 예가 있지요. 같은 A음이라도 말러 교향곡 10번에 나오는 트럼펫의 절규와 모차르트 협주곡에 나오는 우아한 목관의 A음은 같을 수가 없지요.

▲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돌이켜 보니 이 말씀의 역사가 무척 길군요. 1996년 다큐 촬영할 때, 묻지도 않는데 자꾸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시더군요. 자랑도 아닌데 왜 이러실까 의아했지만,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년전 서울시향의 재정운영이 불투명하다고 여론의 비판을 받았을 때, 또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아닌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 감독의 보수에 관해서는, 액수도 잘 모르고 그다지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국민의 세금인 서울시 예산이 투입되는 단체인 만큼 투명하게 집행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시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에서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시는 것은 책임있는 태도가 아니지요. 3년전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쓴 내용을 되풀이할 수 없으니 당시 글 링크합니다.

<진중권 김상수 논쟁에 부쳐>,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164박현정 대표의 폭언은 물론 비난받을 만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향이 정명훈의 사조직처럼 운영돼 왔다"는 그의 말을 덮어두고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정 감독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주, 아주 완곡하게 진언하는 글을 썼습니다. 서울시향의 내홍이 악화될대로 악화된 지금, 설마 또 "음악밖에 모른다"고 말씀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시향이 "좀 더 즐거운 것"을 노래하기 바라며>,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0509

그런데, 이번에도 "음악밖에 모른다"고 하셨군요. 12월 10일 서울시향 리허설장을 찾은 기자들에게 "음악 이외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강조하셨네요.

"난 원래는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고 그러는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집안에서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누가 내게 누구냐고 물으면 첫째로 나는 인간, 둘째로 음악가라고 해요."

LP판 튀듯 되풀이되는 말에 무척 실망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음악밖에 모른다"는 말씀은 무책임의 극치입니다. 박현정 대표는 어떻게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하겠지요. 그런데, 향후 서울시향이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지점에서 정 감독이 책임있는 태도를 보이셔야죠.

정 감독께서는 "인권문제"를 거론하며 박 대표를 압박하셨습니다. 재계약 체결 이전에 하루빨리 박 대표를 몰아내기 위해 일종의 여론 정치를 펼친 것으로 보이는군요. 박 대표가 "인권침해"를 한 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 감독이 평소에 인권 문제에 그렇게 관심이 있었는지, 한번쯤 돌이켜 보셔야죠. 서울시향 단원들에 대한 오디션은 물론 필요한 일이었겠지만, 그 결과 하루아침에 쫓겨난 분들이 느꼈을 굴욕과 좌절을 배려한 적이 있었나요? 해체 위기의 국립합창단이 긴급히 도움을 요청했을 때 왜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하셨나요?

불행히도 정 감독께서는 "음악밖에 모른다"는 코스프레 뒤에서 지나친 이권을 누리는 게 아닌지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아무 근거가 없는 의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정 감독의 태도는,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전두환 · 이명박 등 '수퍼갑'의 위선을 닮았습니다.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을 학살할 때 직접 총질을 하지 않았지요. 이명박은 4대강을 파헤칠 때 직접 삽질을 하지 않았지요. 책임지지 않는 권력자는 자기 손에 오물을 묻히지 않고 대중 앞에 우아하게 나타납니다. 정 감독은 "음악밖에 모른다"는 주술로 악단 운영의 문제점에 대해 전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수퍼갑'의 특권을 누리겠다는 뜻 아닌지요?

박원순 시장이 가세하니 더욱 가관입니다. 정 감독께서 기자들을 만나신 바로 다음날, 박원순 시장은 "박현정 대표가 부적격"이라며 노골적으로 퇴진을 요구했군요. 박 대표의 '갑질'은 물론 나빴지만, 이를 빌미로 정 감독과 박 시장이라는 두 '수퍼갑'이 고스톱 짜고 치듯 여론몰이에 나서는 건 아름답지 못합니다.

박 시장은 "사장이 공석일 때 2~3명 추천이 올라와 정명훈 지휘자에게 물었더니 싫다고 해서 1년 동안 공석이 이어진 적이 있었다"며 "박현정 사장을 추천했더니 (정 감독이) 좋다고 합의해 선임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서울 시장이 시향 사장을 선임할 때 음악감독의 추인을 받았다니, 좀 이상한 일 아닌가요? 지금의 난맥상은 처음부터 잉태되어 있었다는 얘기군요.

정 감독께서는 "언제든 퇴진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는데, 정작 지금 퇴진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 "그만둔다"는 말은 일종의 협박처럼 들립니다. 박 시장은 정 감독이 정말 그만둘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군요. 그래서 재계약 체결 전에 박현정 대표를 정리하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모양새입니다.

박 시장은 "정 감독처럼 서울시민이 사랑하는 지휘자가 문제가 좀 있다고 배제해버리면 그 대안이 있냐?"고 하셨는데, 너무 안일한 발언인 것 같습니다. 정 감독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국민 세금이 투여되는 서울시향의 음악감독은 '문제가 좀 있으면' 곤란한 자리 아닌가요? 박 시장은 대안이 있냐 하셨는데, 정 감독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정 감독께서는 2007년 서울시향을 맡으실 때 "선배로서" "학생 가르치는 마음으로" 악단을 훈련시키겠다고 하셔서 제가 뜨악했던 적이 있습니다. 촬영 원본이 MBC에 있을테니 찾으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차라리 재능기부를 하시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정 감독은 한 차례만 더 계약 연장을 원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서울시향이 자생력 있는 오케스트라가 되려면 10년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아직 10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 좀 더 일하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납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 감독 아니면 안 된다"는 일부의 인식은 설득력 없어 보입니다.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최근 한국에 번역된 <거장신화>에서 클래식 음악도 상업주의에 휘둘린다고 지적했습니다. 지휘자의 역할도 20세기 전반처럼 악단의 조련사가 아니라 대중들을 불러 모으는 간판, 즉 마케팅 수단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한국에서 정명훈이 누리는 인기는 물론 음악 역량 때문이겠지만, '한국 출신의 세계적 지휘자'라는 명성도 크게 작용했다는 점,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의 애국주의에 기대어 정 감독이 특혜를 누려온 측면이 크다는 점을 부인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행은 결국 우리가 극복해야 할, 문화 후진국의 특성에 다름 아닙니다.

정 감독이 유럽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지휘자라는 건 의심할 바 없습니다. 정 감독이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녹음한 성가곡집은 500만장이 판매되어 음반 역사상 흥행 6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에는 못 미치지만 메타, 오자와, 바렌보임, 아르농쿠르에 앞섭니다. 다른 분들은 교향곡과 오페라로 베스트셀러가 된 반면, 정 감독은 보첼리를 반주했다는 차이가 있긴 하군요. 유럽에서 좀 더 활약하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정 감독이 서울시향의 기량 향상을 위해 쏟은 노력과 공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인정하며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정 감독이 지휘하신 서울시향의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말러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서울시향의 음악가들은 다른 지휘자와 함께 하더라도 일정 수준의 음악을 들려 줄 역량이 있습니다. 그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도 어느 정도 갖췄습니다. 정 감독의 대안으로 꼭 한국 사람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빈 필하모닉처럼 단원들이 주체가 되어 운영하기를 기대하는 건 시기상조겠지만, 한번쯤 단원들의 의견을 모아 보는 것도 좋겠지요.

제가 볼 때, 재계약을 포기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박 대표가 물러난 뒤 정 감독이 유임된다면, '정명훈의 사조직'으로 의심받는 현체제를 유지한다는 뜻인데 이건 서울시향을 위해서나, 서울 시민을 위해서나, 정 감독 자신을 위해서나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박수치는 사람이 많을 때 떠나시는 게 현명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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