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힝야를 로힝야라 부르지 못하는

2014. 11. 2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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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세계] 온·오프라인 달군 버마 로힝야족에 대한 호명 캠페인… 배경에는

'라카잉 액션플랜'이라는 이름 바꾼 '버마판 아파르트헤이트' 조치가

"로힝야, 그리고 또 다른 종교적 소수자를 차별하는 것은 버마가 오랫동안 이루고자 했던 국가의 모습이 아닐 겁니다."

동아시아회의 참석차 버마(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1월14일 랑군시 아웅산 수치 자택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로힝야"를 호명하는 장면이 실시간 방송을 탔다. 정작 옆에 선 수치가 이 문제를 입에 올린 게 언제였나 까마득하지만, 오바마는 "(11월13일) 테인 세인 대통령과 회담하는 자리에서도 '로힝야'라는 용어를 자유롭게 언급했다"는 게 <뉴욕타임스>가 인용한 미국 고위 관리의 말이다.

오바마가 '로힝야'를 입에 올린 게 장안의 화제가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몇 주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펼쳐진 '#SayRohingya' 혹은 '#JustSayTheirName'과 같은 로힝야 호명 캠페인은 바로 오바마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캠페인을 주도한 미국 인권단체 '제노사이드종식연합'(UEG·United to End Genocide)은 로힝야들이 존재 자체를 거부당하고 이름조차 불리지 못하는 현실에 착안했다. 캠페인은 20만~50만 명으로 추정되는 로힝야 난민들의 땅 방글라데시로까지 번졌다. 그곳에서 난민들은 깨끗한 재활용 박스를 골라 구호를 적고 펼쳐들었다.

"오바마 대통령님, 우리의 이름을 꼭 불러주십시오."

그동안 버마 정부는 유엔과 비정부기구(NGO), 외교가 등에 '로힝야'라는 용어를 쓰지 말라고 강하게 압박해왔다. 6월 초 버마를 방문했던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강경화 사무차관보는 같은 달 17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정부와 유엔 동료들로부터 '로힝야'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조언을 강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강 차관보는 "용어를 둘러싼 긴장이 매우 심각했기 때문"이라며 "사석에서는 로힝야라고 했지만 공개 석상에서는 로힝야를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에 동의했다"고 털어놨다.

그즈음 유니세프 버마 사무소 대표 베트랑 베인벨은 아라칸주 정부와 (로힝야 무슬림과 적대적 관계인 불교도) 라카잉 시민단체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로힝야"라고 말했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프레젠테이션 다음날인 6월5일, 베인벨은 국경보안부 장관 테인 린과 라카잉 시민단체에 "그 용어(로힝야)를 다시는 사용치 않겠다"는 굴욕적인 다짐까지 해야 했다. "구호활동이 초점이지 특정 이름을 고집하는 게 우리의 중심 의제는 아니다"라는 게 두 기구의 궁색한 해명이었다.

유니세프 버마 사무소 대표의 굴욕적 다짐

조금 다른 태도를 취한 건 유엔 버마인권특별보고관인 이양희 성균관대 교수다. 이 보고관은 7월 중순 열흘간의 버마 방문을 마치고 공항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로힝야 피란민 캠프 상황이 "비참하다"고 운을 뗀 뒤 이렇게 말했다.

"'로힝야'라는 용어 사용을 피하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다.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나는 국제인권법을 따르는 사람이다. 소수민족들은 그들의 종족과 종교, 언어적 특수성에 기반해 자기 정체성을 자기 호명할 권리가 있다. 국가는 그 호명 방식을 명령할 수 없다."

금지어 수용을 사실상 거부한 이양희 보고관의 사례는 오바마를 겨냥한 캠페인의 좋은 선례가 됐다. 버마에서 '로힝야'라는 이름은 정부와 불교극단주의 진영은 물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금지어다. 현지 기자들에게조차 "로힝야…?"라는 질문을 던지면 "벵갈리는…"이라며 주어가 바뀐 채 답이 돌아온다. '벵갈리' 외에 로힝야를 호명하는 또 다른 이름은 '칼라'(Kalar)다. '니그로'의 버마식 표현인데 무슬림에게 두루 적용된다. '칼라'를 누구보다 즐겨 쓰는 불교 극우단체도 오바마 방문을 둘러싼 용어 논쟁을 피해가지 않았다.

불교도 여성이 다른 종교, 특히 무슬림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주창해온 '마바타(Ma Ba Tha·민족과 종교 수호위원회) 만달레이 지부'는 오바마 방문 사흘 전 인종주의적 혐오를 가득 담은 선전 문구를 페이스북에 게시했다. 게시물은 "우리는 전(前) 무슬림 대통령을 원치 않는다. 꺼져라"로 시작한다. 또 "벵갈리는 로힝야가 아니다. 그들은 '모힝야'(Mohingya)다. 이 이름을 부르라"며 로힝야 호명 캠페인의 맞불 성격도 분명히 했다. "미국이 버마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듯 우리도 오바마를 블랙리스트에 올리자"고 한 부분도 눈여겨볼 만하다. 10월31일 미국은 버마의 전 독재자 탄 슈웨의 최측근이자 반무슬림 폭동의 배후로 의심받아온 아웅 타웅 하원의원을 다시 한번 블랙리스트에 올린 바 있다. 이에 보복하자고 선동하는 마바타에 한발 앞서 대응한 건 버마 의회다. 11월10일 버마 하원은 미국의 조치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로힝야'에 대한 용어 논쟁이 더더욱 불거진 배경에는 '라카잉 액션플랜'이란 게 있다. 9월30일 버마 외교부 장관 우나 마웅 르윈은 제69차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 플랜이 막바지 설계 단계에 와 있음을 밝혔다. 플랜에 따르면 버마 정부는 조상들이 1948년 이전부터 거주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벵갈리"들에게 3등 시민권, 즉 귀화시민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시민권의 인종 표기란에 '벵갈리'라고 기입해야 한다.

새롭게 포장한 전혀 새롭지 않은 조치

마치 시민권 부여 절차를 밟는 것처럼 떠들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혀 새로운 조치가 아니다. <한겨레21> 제979호(인종·종교 차별하는 시민권법)에서 보도한 바 있듯, 버마의 시민권 체계는 1982년 시민권법에 따라 이미 '태생시민' '제휴시민' '귀화시민'의 세 종류로 나뉜다. 이 중 로힝야 무슬림들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는 녹색카드, 즉 귀화시민권이다. 라카잉 액션플랜에서 좀더 주목해야 할 건 다른 내용이다. 이른바 시민권 부여자 선별 과정을 거쳐 시민이 아니라고 판명 난 자들은 사실상 국외 추방과 동의어인 "재정착"을 시킬 것이며, 추방 전에 거주할 "임시캠프"를 더 지어 분리 수용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14만 명의 로힝야들은 이미 '피란민 캠프'라는 이름을 단 '수용소'에서 이동의 자유와 생계권을 박탈당한 채 버마판 아파르트헤이트에 갇혀 살고 있다. 지난 2년간 10만 명 이상이 위험천만한 고물보트를 타고 난민으로 떠도는 가운데 수천 명이 익사했고, 수만 명이 국제 인신매매단의 손아귀에 파리 목숨으로 놓여 있었다. 휴먼라이츠워치(HRW) 아시아 부국장 필 로버트슨의 표현대로 라카잉 액션플랜은 "분리 수용과 시민권 박탈을 영구히 하려는 조치"일 뿐이다.

세계인권선언 제15조는 "모든 인간은 국적을 지닐 권리를 지니며 그 누구도 국적을 박탈당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아동 권리에 관한 유엔협약 제7조 역시 "모든 어린이들은 출생 즉시 등록되어야 하며 국적을 취득할 권리를 지닌다"고 적고 있다. 22년 전 유엔이 채택한 '민족적, 종족적, 종교적, 언어적 소수자 권리 선언' 제1조는 소수민족은 자기 정체성을 호명할 자기 권리를 지닌다는 이양희 보고관의 성명과 맥을 같이한다. 이에 따라 국가는 간섭하고 명령할 권리가 없다는 게 이 선언의 요지다. 오바마보다 하루 앞서 "유엔은 '로힝야'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고수한다"고 말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소수자 권리를 인정하자는 원칙"을 강조했다.

그러나 반기문 총장이 밝힌 유엔의 공식 입장과 오바마의 로힝야 호명은 버마 정치권을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이미 반 총장의 발언 직후 테인 뉸 의원은 상하 양 의회에 반 총장의 발언을 거부하는 긴급제안서를 제출했다. "존재하지 않는 인종 그룹을 존재한다고 말한다는 건 미얀마 법에 위배된다"는 게 이유다. 탄 초 외교부 차관도 "유엔과 이웃 국가들이 '로힝야'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쾌하다"고 말했다. 마웅 마웅 온 아라칸주 장관은 '로힝야'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구호활동을 금지하겠다는 위협적 성명을 또다시 발표했다. 사실 지난 3월 라카잉 불교도들이 아라칸주 국제 NGO들을 공격한 이래 구호 자체는 전면 중단되었고, 이후 대단히 소극적인 '구호'가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캠페인 참여는 호명 이상의 의미

"버마에서 태어나 25년을 살았고 내 나이 지금 50살이다. 버마에서 산 25년 동안 '로힝야'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내가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다."

수십 년간 이어진 로힝야 박해를 '점진적 제노사이드'(Slow Burning Genocide)라 주장해온 버마 학자 마웅 자니처럼 반로힝야 인종주의로 점철된 버마 정치사를 꼬집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위정자들과 적대적 종족이 뿌리 논쟁을 빌미 삼아 한 커뮤니티 전체를 거세하려는 요즘, 국제사회가 연대해 '로힝야' 호명 캠페인에 참여하는 건 이름 부르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로힝야들이 언제 어디서 왔는지 뿌리 캐기에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극우 살상 정치에 대한 반기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인권의 원칙으로 돌아올 때 해답은 간단하다는 것도 이 캠페인의 얕지 않은 교훈이다.

방콕(타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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