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신화상을 극복한 보디빌더의 감동 스토리

이용수 2014. 11. 27.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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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짐] 위대함의 근원은 어디일까. 그것은 단지 눈부신 결과의 산물인가, 범인으로써는 상상하지도 못할 업적을 까마득한 높이까지 쌓아 올리고 찬란한 후광을 뿜어내는 위인들의 전유물인가. 결과를 놓고 논하는 위대함은 그러나 진실되기 어렵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선전-선동의 용도로 인해 가공되고 조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말엽, 워싱턴 포스트는11세기 부터 20세기 까지의 1000년동안 가장 위대했던 인물과 최악이었던 인물을 선정했다. 몽골의 영웅 칭기스칸은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되었지만 그는 동시에 최악의 인물 후보에도 스탈린, 히틀러, 폴 포트등과 함께 거론되었다. 광대했던 정복지의 구석구석에 시체의 산을 높이 쌓았던 것이 이유다.

인류의 최근 1000년사를 대표하는 악한으로 첫손에 꼽힌 히틀러도 한때는 아리아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써 독일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영웅인 나폴레옹 역시 주변국들의 입장에서는 단지 흉포한 침략자일 뿐이다. 결과론적으로 논해지는 위대함은, 그런 인물들 상당수의 진면목은 알면 알수록 위대한 만큼 위험하기도 했던 것으로 느껴지곤 한다.

진정한 위대함은 과정에서 탄생한다. 한 인간이 운명의 굴레를 극복하고 우뚝 일어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는 스토리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진짜배기 위대함이 깃든다. 여기에 그것을 향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최고의 보디빌더가 되기 위한 꿈을 키워가던 도중에 화마의 습격을 받아 전신에 깊은 화상을 입고 생사의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으며 병원의 침상에서 6개월을 보낸 후, 다시 일어서서 걷기위해 한 달이 넘도록 훈련을 해야 했던 조형원은 이후 10여 차례의 전신마취를 요하는 피부이식수술을 받았다. 사고이후 13여년, 뼈에 스민 좌절감에 눌려 폐인처럼 지내던 세월을 털고 2008년에 그는 다시 바벨을 잡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6년 후인 지난 10월 30일 그는 전국체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20년만의 체전무대 복귀였다.

영상으로 보는 조형원의 스토리 1부

조형원은 1972년생이고 청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육업을 했다. 그는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 어떤 아이였는지, 무엇을 좋아했고 또 기억에 남은 추억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내성적인 편이었습니다. 혼자 노는 걸 좋아했고, 프라모델 같은 거 만드는 거에 시간을 좀 많이 보냈습니다. 어릴 때 집이 어렵진 않게 살아서 제가 원하는 걸 많이 하면서 큰 편입니다. 추억이라면 글쎄요 갑자기 물어보시니까.... 그냥 뭐라 그럴까 다른 또래 친구들보다 용돈도 많이 타서 썼고요, 하고 싶은 것도 많이 했고요, 굳이 뭐 엄청 행복했다고 하긴 힘들겠지만 남부럽지 않게, 부족함 없이 자란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조형원은 운동을 좋아했다. 태권도와 합기도를 배웠고 집에 있던 스프링이 달린 완력기와 아령을 가지고 힘을 기르는 것을 즐겼다. 보디빌딩과의 그의 첫 인연은 아래와 같다.

80년대 중반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보디빌딩은 꽤 고급 운동이었습니다. 서울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청주에서는 있는 사람들이 하던 운동이었고 또 어른들이 하는 운동이었거든요. 관심은 있었지만 어떻게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헬스클럽에서 같은 반 친구가 내려오는거예요, 그래서 "야, 너 거기서 뭐 한거냐?" 라고 물어보니까 거기서 운동을 한다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 따라서 구경을 한번 하고 그길로 집에가서 부모님을 졸랐습니다. 그때부터 보디빌딩을 시작하게 된거죠.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조형원은 자신의 체중보다 더 무거운 50KG짜리 벤치프레스를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같은 헬스클럽을 다니던 대학 레슬링부 소속의 선배가 '이 녀석 보게' 하며 감탄을 하고 레슬링을 배우기를 권했다. 조형원은 레슬링부가 있던 청주농고로 진학했다.

레슬링을 시작했는데, 저는 말씀 드렸다시피 내성적인 성격이고 또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거든요. 레슬링이라는 운동은 좋았지만 뭐랄까 조금 강압적인 분위기가 너무 무서웠고 또 분위기가 두렵다보니 기초체력부터 힘든 거예요. 그 당시는,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운동부라고 하면 정말 분위기가 살벌했습니다. 저는 성격상 그런 거에 적응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6개월 해보고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헬스장으로 돌아갔어요.

고교 보디빌딩 대회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운동에만 전념하고 있던 조형원에게 체육관의 관장이 출전을 권유했다.

고등학교 2학년 되니까 체육관 관장님께서 시합한번 나가보라 하시더라고요. 나가자마자 지방대회에서 체급 1등을 했습니다. 전국대회도 나갔는데 거기선 안됐고요. (웃음) 3학년 때는 입상이 되었습니다. 미스터코리아에서 학생부 체급 1등을 하고 YMCA대회에서도 1등을 했어요. 체급은 -60kg이었습니다.

학생부 대회에서 가장 주요한 타이틀 두개를 손에 넣은 조형원은 보디빌딩 특기생으로 인제대로 진학했다. 인제대는 중앙대와 함께 보디빌딩 특기생을 가장 먼저 선발하기 시작한 선구적 교육기관이었으며 조형원은 동기생 이석진과 함께 인제대 보디빌딩 특기생 제1기였다.

저희 위에 김다위 선배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형님은 정말 몸이 대단하셨고 유명하셨죠, 당시에 그 형님은 정식 특기생은 아니었고 뭐라고 해야 하나, 보디빌딩 특기생 선발의 시발점 같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김다위 선배님의 활약을 보면서 학교에서 보디빌딩 특기생을 저희 때 부터 선발하기 시작한 거니까요.

제가 1학년 때는 그러니까 김다위 선배랑, 이석진, 그리고 저 세명이 보디빌딩부였습니다. 선배님 정말 엄하셨어요, 몸이 대단하신 만큼 운동도 정말 잘하셨고 저희가 한 아파트에 같은 방에서 지냈기 때문에 선배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따라할 수 있었거든요. 당시에는 대학생이면서도 일반부에서 우승할 수 있는 정도의 몸을 가지고 계셨던 선배님이시고 저희들은 선배님과 한방을 쓰면서 정말 잘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가 방 세개 짜리였는데 작은방을 우리 셋이서 썼고 큰방에는 씨름부 5명이 있었어요. 거기 제일 작은 방에는 이만기 교수님도 계셨죠. 이만기 교수님은 저희와는 직접적으로 관계는 없었는데 씨름부 지도하시는 면에서는 정말 철저하시고 열정적이시더라고요.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웃음)

대학시절 조형원은 어떤 꿈을 꾸고 있었을까. 학창시절에 가지고 있던 희망에 대해 질문했다.

아, 그때 꿈은, 김준호 선수가 대학 다니면서 미스터코리아를 하셨어요. 지금의 미스터 코리아도 대단한 영광입니다만, 그 당시는 지금과는 또 달랐어요, 그때의 미스터코리아는 정말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1년 선배인 다위 선배도 몸이 엄청나셨기 때문에 그 형님도 미스터 코리아를 하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대학시절에 미스터코리아를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그렇게 된다고 믿으면서 운동에 미쳤었죠. 사실 미스터코리아가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게 정말 어렵다는걸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김준호 선수 같은 선례가 있었으니까 노력했죠. 김준호 선수는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저의 우상입니다. 아직까지도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계시지 않습니까.

1993년부터 1995년까지 2년 반 동안 조형원은 서울 수유리 북부 경찰서에서 의무경찰로 병역의 의무를 다했다. 의경으로써의 복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제대를 신고한 그에게 시련이 마중을 나왔다.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정육점을 하셨습니다. 그 때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아버지 당신께서는 정육업이 싫으셨겠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건 사실 말뿐이잖아요. 제가 고등학교때 아버지께서 사료 대리점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게 잘못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무렵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1996년에 나쁜 일이 많았습니다.

영상으로 보는 조형원의 스토리 2부

1996년의 악몽은 시작일 뿐이었다.

집안이 기울었는데 아버지까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저와 동생은 그때 판자집에서 살고 있었어요. 제대를 하고 3학년 1학기로 복학을 했는데 운동하다보면 돈이 많이 들어가니까 이건 도저히 안되겠는 겁니다. 집은 엉망이 되어있는데 제가 장남이고 하니까 집에 도저히 손을 벌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돈을 좀 벌어 보려고 서울로 올라가서 반지하 단칸방에서 생활하며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96년 10월 경이었는데, 정확한 날자는.... 기억이 안 나네요. 집에 불이 났습니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옷에 불이 옮겨 붙은 겁니다. 옷을 벗는 과정에서 몸 여기저기에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화상의 고통이 어땠는지에 대해 물었다.

누구라도 뭐 하다가 뜨거운 물에든, 아니면 불에든 조금 데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제 경우는 몸의 40%에 3도 화상을 입었어요. 사고를 당할 당시의 고통은, 그것도 엄청났을 것 같은데, 솔직히 그건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그 이후 치료과정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화상부위를 붕대로 감으면 진물하고 피하고 뒤엉켜 붙지 않습니까? 그걸 떼어내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붕대를 그냥 감는 것이 아니라 상처부위를 닦아 내야 하는데...면으로 된 부드러운 거즈 있잖습니까? 그걸로 닦아 내는데 소독약도 못쓰고 식염수로 닦아 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철수세미로 맨살을 박박 긁어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번 치료하고 붕대 감고 나오면 목이 다 쉴 정도로다가 소리를 질렀던 것 같아요. 진통제를 맞아도 소용이 없더라고요. 수술은 마취라도 하니까 잘 못 느끼는데 치료는 마취를 하지 않고 하니까.....

생사의 기로를 두 번이나 넘긴 조형원의 앞길을 길고 끔찍한 치료와 재활이 가로막았다.

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의사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두 번 숨이 끊어질 고비가 왔다고요. 첫 3개월은 중환자실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석 달 정도를 누워만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대소변을 받아주셨습니다. 너무 많이 우셨어요. 반년정도 누워만 있었는데, 일어서서 걷는게 안되는 겁니다. 다리하고 손을 제일 많이 다쳐서 어딜 짚고 일어설 수도 없었어요. 혼자서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적도 있습니다. 자리에 앉는데도 죽을힘을 다해야 했었고 한 달동안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서 겨우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친지 7개월 만에 걸음마를 새로 시작한 거죠. 근육이 말을 안듣는 느낌이었고 움직일때마다 화상입은 부위의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그 정도는 견딜 만 했어요. 사고 직후에 치료 받을때는 그것보다 훨씬 심했으니까요.

그 이후로 몇 년간 전신마취하고 16시간씩 걸리는 피부이식수술을 10번 이상 받았습니다. 그나마 그렇게 수술을 받아서 지금은 몰골이 많이 나아진거예요. 사고당시때는 정말 끔찍했습니다.

상흔은 그의 사회생활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사고이후 7개월 만에 퇴원한 그는 대인기피증이라는 새로운 증상을 떠안게 된다. 그리고 후유증도 쉬지 않고 그를 괴롭혔다.

거의 컴퓨터만 가지고 시간을 보냈죠. 대인기피증이 생겨가지고 사람도 만나기 힘들고, 집에 외삼촌이 오셨는데 제가 외삼촌을 피해서 다락방 가서 있고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어요. 컴퓨터로 영화와 에니메이션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안좋으면 화상부위가 따끔거리고 가렵고 그래요, 그렇게 불편해지면 한없이 우울해졌습니다.

주로 어떤 영화와 에니메이션을 보셨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이 들어서 이런 거 밝히기는 조금 부끄럽지만, 주로 액션영화와 원피스같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습니다. 원피스는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거든요. 위안이 많이 되었습니다.

영상으로 보는 조형원의 스토리 3부

2008년, 그는 10년이 넘는 은둔을 깨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어떤 계기를 맞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집에만 계속 있다 보니까 체중이 40대 후반 정도까지 빠졌습니다. 사람이 흉까지 있는 상태에서 삐쩍 마르니까 제가 제 자신을 봐도 너무 아니다 싶어 뭘 할 수 있을지 생각을 하다가, 하던 운동을 다시 해보자 해서 동네 체육관에서 조금씩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을 때 노모의 반응이 궁금했다.

많이 기뻐 하셨어요, 산송장처럼 집에만 박혀 있다가 나가서 운동이라도 하고 그러니까, 어머니도 많이 밝아지시고 응원도 많이 해 주셨어요. 어머니가 아직도 가장 큰 후원자시죠. 그리고 어머니 뿐만 아니라 친지들과 주변분들, 친구들도 큰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다시 잡은 바벨은 무거웠다. 그리고 96년에서 08년의 사이 스포츠사이언스, 즉 운동법과 식단관리 및 보충제의 사용법 면에는 획기적인 진보가 일어났다. 조형원은 시대의 변화를 절감했다. 그러나 노력은 배신하는 법이 없었고 냉정한 세상에도 의인은 있다.

2~3년 하다보니까 어디서인지 자신감 비슷한 게 붙었습니다. (웃음) 그래가지고 시합을 뛰어보자 해서 2012년에 지방대회를 나갔는데 뻔하죠 뭐, 준비를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운동 조금하고 나가니까 당연히 입상도 못했습니다. 체중만 맞춰서는 안되는구나 싶었어요. 그리고 저희가 하던 때랑 요즘 하는 거랑 운동 방식도 많이 달라지고 식단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보충제도 너무 다양해 졌고 뭐가 뭔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정보가 많이 부족했죠. 그래서 여기저기서 많이 알아봤습니다. 처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했습니다.

그담부터는 지방대회지만 등수 안에 들었습니다. 비록 3등이지만요. (웃음) 처음 대회에 복귀를 했을 때가 2012년 6월이었습니다. 그때는 입상을 못했고 그해 10월에 충북 도민체전 나가서 3등을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나가면 입상을 꾸준히 하다가 올 초에는 전국체전 충북대표 선발전에 출전해가지고 선발되어서 전국체전까지 뛰게 된 겁니다. 그리고 지난 해 7월 부터 최재덕 선배가 저를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저보다 한살 많으시고요. 제가 고3때는 같은 체육관에서 운동을 했는데 그때 형과 함께 운동을 한 덕분에 전국체전 학생부 1위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고이후 연락을 못하고 지냈는데 복귀하고 대회장에서 뵙고 연락을 다시 하며 지내던 중에 작년 7월경에 형이 저를 부르시더니 같이 운동하자고 그러시더라고요. 운동파트너로써 형과 함께 하는 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이루 말로는 설명을 못하죠. 최재덕 하면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최재덕은 헤비급 보디빌더다. 2001년 부산 아시아 선수권에서 헤비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듬해에는 미스터 코리아가 되었다. 같은 해 부산 아시안게임 헤비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했으며 이후 국내 헤비급을 대표하는 선수로써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영상으로 보는 조형원의 스토리 4부

전국체전 충남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한 조형원은 대회의 3개월 전인 8월경부터 본격적인 체전 준비에 들어갔다. 보디빌더들에게 전국체전은 가장 중요한 대회다. 체전에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실업팀의 스카우트가 이루어지고 실업팀 선수들의 연봉도 체전의 성적에 따라 조정되기 때문이다. 대회를 어떻게 대비했는지를 질문했다.

준비 과정은 평상시대로 운동하는 데로 하고 유산소를 좀 많이 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까.... 다이어트 쪽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탄수화물을 억제하는 케톤 다이어트를 했습니다. 최재덕 선수가 지도해 주셨는데 상당히 좋은 효과를 봤습니다. 유산소만도 나눠서 하루에 4시간 정도 한 것 같습니다. 제가 피부이식을 해서 피부가 두껍거든요. 이번에도 제 무대를 보고 모니터링 해주신 분들 얘기로는 하체 쪽을 많이 다쳤기 때문에 근질의 표현이 잘 안 나온다라는 것이었죠. 데피니션도 좋았는데 무대에 올라가니까 상처부위가 빛을 반사해서 표현이 잘 안된 것 같아요. 더 키우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2014년 10월 30일, 제주 학생 문화원, 전국체전 보디빌딩 2일차, -65kg급 본선. 조형원이 무대에 올랐다. 현장 중계석에서 해설을 맡고 있던 오경모는 그때 "지금 나온 조형원 선수는 저의 인제대 선배입니다. 대학교 학기 중에 사고를 당해서 운동을 못하다가 거의 20년만에 전국 체전에 복귀를 한 선수입니다"라고 그를 소개했다. 공동 해설이었던 이호욱은 조형원의 사고정황과 이후 10여차례의 피부이식 수술 과정을 전했고 캐스터였던 유병학은 "온몸이 드러나야 하는 보디빌딩에서 참 대단한 일이네요"라고 감탄했다. 그 모든 것을 딛고 20년 만에 다시 오른 전국체전 무대, 그의 감회는 어땠을까.

감회가... 제가 원래 내성적이긴 하지만 감성적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막상 올라가려니까 눈물이 나려 하고 동영상 보시면 알겠지만 마음이 벅차서 제대로 표현을 잘 못했습니다. 너무 떨리기도 했고 새로 전국체전이라는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대회가 전국체전이기 때문에 나간 것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부터 무대에 올라가서 긴장같은 거 웬만해서는 잘 안했거든요, 무대위에서 사람들을 지켜보는 여유가 있었고, 최근의 지방대회에서도 분명히 그랬는데 전국체전 올라가니까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겁니다. 긴장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청주에서 제주도 가서 이틀 전부터 잠을 한 숨도 못 잤습니다. 시합 끝나고 긴장이 풀리니까 집에 와서 몇 시간을 잤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피곤합니다. 제가 신경이 날카롭고 그쪽으로 신경을 너무 써서....

2014년 제주 전국체전 보디빌딩 -65KG급 조형원 영상(8분 40초부터)

라인업 포즈

사이드 체스트 포즈

사이드 트라이셉스 포즈

머스큘라 포즈

앱도미널 & 싸이 포즈

자유포즈

백렛 스프레드 포즈

모스트 머스큘라 포즈

제주에서 개최된 2014 전국체전 보디빌딩 -65kg급에서 조형원은 11위를 기록했다. 결과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솔직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려올 때 그 순간 만큼은 사실 기분이 좋지 못했습니다. 올라갈 때 까지는 좋았는데 TOP 5가 못되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요. 아직 제가 부족하다는 것도 많이 느꼈고 내가 어떻게 어필을 해야 인정을 좀 받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요. 결과가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참가 자체가 중요하긴 한데 제가 전국체전을 나가는 것도 직장도 없다 보니까 실업팀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했던거 거든요. 안됐다는 것에 실망이 일단은 가장 컸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서 그래도 잘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수가 문제가 아니라, 제 자신이 열심히 했고 그리고 앞으로 보완할 점이 많이 발견되었으니까 그런 부분에 집중하면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큽니다. 제가 여기까지 와서 뭐가 더 있겠습니까. 저는 이제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요. 계속 앞으로만 갈겁니다. 다음 체전에서는 성적을 더 올려야죠.

조형원 선수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지가 궁금했다.

될 수 있으면 미스터코리아죠. 운동은 평생 할 것 같습니다. 시합도 여건이 되면 여건이 되는 한 계속 나갈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몸 스타일은 작으면서 갈라지는 몸 보다는 크고 두꺼운 쪽입니다. 제가 키도 작고 어렸을 때 부터 큰 거를 좋아했어요. 그리고 아놀드를 보고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큰 몸을 선호합니다. 크기를 계속 키워서 체급을 계속 올려 나갈겁니다. 제가 2008년에 체중이 40키로 대였습니다. 지금은 많이 올라왔죠, 시합체중이 -65kg니까요, 평소에는 75kg 이상 나갑니다. 더 키울 겁니다.

그의 손은 화상 후유증으로 심하게 변형 되어있었다. 그 손으로 운동하기가 쉽지 않아보였다. 뿐만 아니라 다리 쪽에도 흉터가 심했는데 화상후유증이 운동에 지장을 주지는 않는지를 질문했다.

많이 불편합니다. 손이 이 모양이라서 고중량의 기구를 당겨야 할 때 손톱과 손가락 끝마디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픕니다. 미는 동작 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쉬워요 걸쳐서라도 하는데 당기는 운동은 보조기구를 사용해도 고통을 참아내야 합니다. 선수들이 사용하는 스트랩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데, 솔직히 스트랩 감는데도 손이 불편해서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고 그래요. 사실 병원에서는 지금도 수술을 한두번 더 받아야 한다고 권하고 있어요. 수술을 받으면 조금더 편하게 생활할 수가 있다네요. 그런데 그 수술을 한번 받으면 또 1~2년은 그냥 없어집니다. 제가 지금 다시 운동을 시작하고 겨우 몸의 형체를 갖추어가는 상황이고 나이도 마흔 셋이거든요. 여기서 수술을 다시 받으면 선수생활로 복귀하긴 힘들겁니다. 그래서 수술은 받지 않으려고요.비용도 비용이지만 꿈을 쫓아가기 위해서 불편은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불리함이라는 것, 같은 결과를 내기위해 더많은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힘들지 않을까?

불리함이요, 그거 생각 많이 했죠. 그렇지만 불리함을 느꼈을때 그것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 보기보다 워낙 이운동을 좋아하니까, 또 남들보다 더 고통 받아야 하지만 반면에 똑같은 결과를 냈을 때의 성취감은 제쪽이 더 클겁니다. 같은 등수라도 제가 더 기뻐할 수 있다는거죠. 그래서 고통은 따르지만 그걸 넘어섰을 때의 즐거움, 그걸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제가 피부가 여기저기 상해있으니까 시합에서 솔직히 심사위원님들 눈에 조금 그렇게 보일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사위원님들께서 피부 속을 들여다 봐주시는 혜안을 발휘해 주십사하는 소망이 있어요. 근육은 피부 속에 있는 거니까요. 제가 흉터 투성이 이긴 합니다만 똑같은 사람으로 보아 주셨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힘겨워 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 분들께 힘이 될 수 있는 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제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참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굳이 한 말씀 드리자면, 저가 다쳤을 때 두 번 위험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더라고요. 병원에 중환자실에 있을 때, 저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었던 부분인데요 생사의 기로에 선 적이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 이후에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치료과정을 겪었고 지금도 불편함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어렵지만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분명히 계실 거예요. 하지만 간절히 원하면 100% 다 성취하지는 못하지만 거기에 근접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장도 없고 돈도 한 푼도 못 벌고 정말 어려운데도 제가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니까 주위에서도 응원과 격려를 많이 해주시고 저도 그것을 느끼며 더 힘을 내고 있습니다.

너무 어렵다고 현재만 가지고 낙심하시지 마시고 저도 나이가 적지 않은 편인데 새롭게 도전하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얼마든지 기회는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를 봐서라도 힘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근처에 계신 분들 중에 저와 같은 고통을 안고 계신 분들이라면 여기로 오셔서 함께 운동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하는데 못할 거 없거든요. 제가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조형원의 한 달 수입은 기초생활 수급 40만원과 3급 지체장애 보조금 3만원이다. 운동이 아니라 생활을 하기에도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다. 절약이 몸에 배인 그는 옷 하나를 10년째 입고 있다. 최재덕 선수가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있지만 그가 진정으로 운동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서포트가 더욱 많이 필요하다.

2014 미스터 코리아이자 전국체전 -75kg급에서 2연패를 달성한 김성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본인이 사용하는 특수 스트랩을 미국에서 공수하기로 했다. 왕년의 복근제왕이자 조형원의 인제대 후배이고 현재는 닭가슴살 제조업체인 '굿닭'의 대표이사인 오경모는 조형원에게 닭가슴살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조형원의 우상인 보디빌딩계의 끝판왕 김준호 박사도 조형원 선수를 만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위대함을 향하는 여정에 등불이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기사작성 : 이용수

영상 촬영/편집 : 하윤경, 곽아빈사진출처 : 하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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