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가격 하락, 세계 정치지형 바꿀 수 있다

조철환 2014. 11. 2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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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3개월 만에 배럴당 70달러대로… 반미진영 러·이란·베네수엘라 통화가치 하락·적자·인플레 고통

사우디, 미국과 치킨게임 벌일까… 국제 석유권력 호기 잡은 사우디 원가 경쟁력 무기로 타격 노릴 듯

오늘 OPEC 총회가 분수령… 사우디 감산 합의할지 초미 관심

'석유의 정치학'(Crude Politics)이 2014년 글로벌 세력판도와 주요국의 정치 지형을 바꾸려 하고 있다. 4년 만에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2달러대로 떨어지면서 미국 소비자는 모처럼 따뜻한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다. 반면 미국과 대립했던 러시아와 베네수엘라, 이란은 통화가치 하락과 재정적자 확대로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했다.

● 친미와 반미 진영의 엇갈리는 명암

올해 6월까지만 해도 배럴당 100달러를 넘었던 국제유가가 3개월 만에 70달러대로 급락했다. 최대 피해자는 러시아다. 크림반도를 전격 합병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경고가 저유가를 통해 실현되는 분위기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에 따르면 유가폭락과 서방의 경제제재가 겹치면서 러시아는 올 한해 1,400억달러(140조원)의 피해를 봤다. 고유가에 기대 성장하던 경제가 주저앉고 외화가 유출되면서 러시아 루블화 가치도 3개월만에 30% 이상 하락한 달러당 45루블을 넘어섰다. 상황이 이쯤 되자 러시아 국민들도 동요하고 있다. 환율 상승에 따른 수입물가 인상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8.4%에 달하는데다, 루블화를 달러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통화가치 하락을 부채질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남미의 반미 거점인 베네수엘라도 휘청거리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이미 방만한 정책으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는데, 국제유가 하락이라는 충격파가 가해지면서 인플레이션율이 50%를 넘어섰다. 중동 시아파 맹주를 자처하는 이란도 국제유가가 재정균형에 필요한 수준(배럴당 136달러)의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반면 미국은 물론이고 미국과 우호 관계인 나라들은 저유가 혜택을 톡톡히 누리는 모습이다. 미국은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0.7달러 하락하면 다른 분야 소비지출이 1,000억달러 증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마침 27일 추수감사절을 전후한 연말 시장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호황 무드다. 경기침체 국면에 빠진 유럽연합(EU)도 그나마 유가가 안정세를 보여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있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유가가 10% 하락하면 EU 생산이 0.1% 늘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인도 역시 유가하락으로 ▦교역조건 개선 ▦인플레이션 압력 약화에 따른 금리인하 여력 증가 ▦유가보조금 감소로 재정에 플러스 요인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과 필리핀,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등도 물가가 안정되면서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정책의 운신 폭이 늘어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 미국과 사우디 '최후의 대결' 벌이나

최근 3개월간의 유례를 찾기 어려운 유가 급락은 사실 경제 대국 미국과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합작품이다. BOA메릴린치에 따르면 110달러 대에서 형성됐던 국제 유가의 단기 하락에는 미국과 사우디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각각 러시아와 이란을 혼내주고 싶은 동기가 작용해 유가 하락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은 국제 유가 하락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강한 달러 정책을 펴는 한편 셰일원유 생산을 큰 폭으로 늘렸다. 사우디 역시 공동 감산을 통해 유가 하락을 막아야 한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다른 회원국의 요구를 일축하며 오히려 생산량을 늘렸다.

하지만 국제유가가 미국 셰일원유 생산원가 수준인 배럴당 70~80달러대로 내려온 지금 상황이 바뀌고 있다. 미국 원유업계는 추가 유가 하락을 원치 않지만, 사우디는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미국 CNBC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27일 열리는 OPEC 총회를 "최근 30년 간 가장 중요한 회의"라며, 사우디가 다른 산유국의 요구에 맞춰 감산에 나설지 여부가 향후 국제유가 향방의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감산에 동의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셰일원유를 내세워 글로벌 석유권력을 장악하려는 미국과 치킨게임 벌이는 쪽을 선택할 것이라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러시아와 베네수엘라 석유장관이 이번 총회에 앞서 사우디 석유장관에게 '감산 동참'을 호소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전했다. 사우디가 감산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국제유가는 배럴당 무려 30달러 대까지 내려 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사우디가 미국과 대립 구도를 만들려는 건 원가경쟁에 앞선 지금이야말로 미국의 셰일원유 업계를 손볼 유일한 기회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사우디 유전의 배럴당 생산원가는 10~17달러로 미국 셰일원유(70~77달러)의 5분의 1 수준이다. 그러나 채굴기술이 발달하면서 셰일원유 생산원가는 급속히 하락하는 추세다. 사우디는 1조 달러에 가까운 국부펀드가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미국 셰일원유 업계에 타격을 입히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계산을 할 수도 있다. 옥스퍼드에너지연구원 바삼 파투 이사는 "고비용 생산자가 저비용 생산자를 시장에서 몰아내리라고 예상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 하지만 '유가 전쟁'의 미래는 불확실

전문가들은 미국과 사우디의 대결에서 누가 승자가 되더라도 국제석유시장에서 OPEC의 영향력 하락은 불가피하다고 전망한다. 1970년대 1, 2차 '오일쇼크'를 겪었던 한국으로서는 OPEC의 영향력 하락을 반길 수도 있지만,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양날의 칼'이라는 게 정확한 분석이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OPEC은 '공급 카르텔'이라는 부정적 역할과 함께 수요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완충장치의 역할도 수행해온 만큼, OPEC의 영향력 축소는 장기적으로 국제유가의 변동성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셰일혁명과 석유권력 교체가 단순히 원유시장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정치ㆍ경제의 지형 변화를 초래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미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미국이 석유패권을 잡을 경우 러시아가 타격을 입을 것이 확실하다. 또 미국이 중동의 '불량국가'에 대해 정치적 부담이 큰 군사제재보다 원유 금수 등 경제제재를 선호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물론 정반대의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미국의 저유가 압박을 탈피하기 위해 러시아와 베네수엘라 등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된 중국과 협력할 경우, 결국 글로벌 세력 경쟁에서 미국이 중국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조철환특파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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