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점규의 노동여지도]해고의 바람 몰아닥친 여의도 증권노동자

입력 2014. 11. 26. 10:15 수정 2014. 11. 2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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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공원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건물마다 불이 환하다. 국제금융센터(IFC)에 한 달 넘게 남은 성탄 트리가 불을 밝혔다. 여의도 노동자들의 마음에는 언제쯤 밝은 불이 켜질 수 있을까?

출근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여의도역은 사람들을 쉴 틈 없이 쏟아낸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온 이들이 잔뜩 웅크린 채 총총걸음을 걸으며 초고층빌딩숲으로 사라진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끝나고 한산해진 여의도역 4번 출구. 포장마차에서 어묵 하나를 집어들고 넌지시 말을 건넨다. "올해 증권사들 사람 많이 잘랐잖아요. 장사가 안 되죠. 사람들이 어려워지면 먹는 것같이 사소한 것부터 줄인다니까요." 대한민국 금융 1번지, 여의도 증권가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교보증권 13층 노동조합. 1987년 이 회사에 들어온 이은순 전국사무금융노조 교보증권지부장이 동네 분위기를 전한다. "증권사 직원 억대 인센티브는 옛날 얘기예요. 최근엔 시장이 좋아질 것 같지 않아 좌절이 극심하죠. '너 그렇게 밥값 못하면 어떡할 거냐'는 실적과 퇴직 압박에 매일 시달려요. 언제 잘릴지 모르니 불안하고. 여기저기서 을씨년스러운 소리만 들려와요."

여의도 쌍둥이빌딩 앞 엘지유플러스 비정규직 농성장.

연봉 5500만원이 3년 만에 절반으로

증권사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6월 말 기준 국내 20대 증권사의 정규직은 전년 대비 3739명이 줄어든 2만4812명이었다. 하반기에는 현대증권에서 희망퇴직으로 400명을 내보냈고, HMC투자증권도 252명을 쫓아냈다. 수시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을 포함하면 1년 남짓 만에 5000명 이상이 증권사를 떠난 셈이다.

"언론에 보도된 것보다 더 많은 증권사 직원들이 목숨을 끊고 있어요." 현대차그룹 HMC투자증권은 3년 연속으로 노동자가 자살했고, 동부, 하나대투, 하이투자증권에서도 목숨을 끊었다.

교보증권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 '넥타이 부대'의 파업으로 만들어졌고, 가장 먼저 산업별노조로 전환한 모범적이고 안정된 노조다. 그런데 다른 증권사들이 구조조정을 하니까 교보증권도 지난해 점포를 폐쇄하겠다고 했다. 회사 로비에서 20여일 천막농성을 해서 막아냈는데, 올해 3월 다시 10개를 없애겠다고 했다. 산업별노조인 사무금융노조가 힘을 모아 15층 임원실을 점거하고 이사회의 점포 폐쇄 안건을 철회시켰다. "증권가에서는 전설이죠. 산별노조의 힘이 컸어요." 여의도에서 가장 부러운 노조, 이은순 지부장이 6개 증권사 공동 교섭이 열리는 금융투자교육원으로 향한다.

여의도 증권가를 걷는다. 한국거래소 뒤편, 은행잎이 초겨울 바람을 아슬아슬하게 견디고 있다. 난생 처음 증권사 영업객장을 둘러본다. IBK투자증권 객장은 텅 비어 있다. 한양증권과 메리츠종금증권 상담코너에 손님이 한 명뿐이다. 부국증권은 연세 지긋한 노인 세 분이 소파에 기대앉아 신문을 보고 있다. 키움증권도 한산하다. 객장은 따스한데 냉기가 스민다.

6개 증권사 노사 산별중앙교섭.

IBK투자증권 1층 커피숍 뒤편 후미진 노조사무실에서 이희원 사무국장을 만났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2006년 신흥증권에 입사했다. HMC투자증권이 신흥증권을 인수하고, 밤 10시 전에 퇴근한 적이 없었다. 견디다 못해 2009년 6월 IBK투자증권으로 옮겼다. 그런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지점 직원들의 월급을 1년에 25%씩 삭감했다. 한 동료는 연봉 5500만원을 받기로 하고 입사했다가 3년 만에 2600만원으로 반토막 났다. 이 국장도 들어올 때 5000만원이었는데 지금은 3100만원이다. 참다못해 2012년 10월 노조를 만들었다. 새로 부임한 대표이사가 얼마 전 국회 국정감사에 불려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에 집단적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걸 인정했다. 노조는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선배들은 좋은 시절 얘기도 하시는데, 우리야 얘기만 들었지 겪지도 못했어요. 노조 만들고 회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걸 막았다는 느낌은 있는데, 노조로 힘이 잘 모아지지 않아 좀 속상합니다."

증권가에 몰아닥친 해고의 폭풍우 앞에서 홀로 바다로 뛰어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난간을 부여잡고 함께 버텨내야 한다. 25년 만에 증권사 신규 노조가 4개나 생긴 이유다. 특히 증권가의 삼성이라고 불리는 대신증권과 HMC투자증권의 노조 설립은 대형사건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4월 16일 만들어진 HMC투자증권은 15개 지점을 53개로 늘렸다가 전부 폐쇄하고 다시 15개로 줄였다. 회사는 노동자를 일회용품처럼 쓰다 버렸고, 여의도 증권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떨어진 낙엽처럼 나뒹굴고 있다.

<카트>의 사무직 버전, 코스콤 475일 투쟁

신한, 교보, SK 등 6개 증권사 통일 단체교섭이 끝났다. 올해 임금인상 요구는 6.1%다. 고용안정협약, 여성 채용 및 승진할당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주된 요구다. 야근을 줄이기 위해 근무시간이 끝나면 컴퓨터 전원을 차단하는 'PC-OFF' 요구가 이채롭다. 몇 년간 사실상 임금을 동결했던 증권사들이 실적이 나고 있는데도 이날 교섭에서 1% 인상안을 냈다.

신한금융투자증권지부는 모범적인 노조답게 회사 모르게 작업을 해서 콜센터 비정규직 100명을 노조에 가입 받고 정규직으로 전환시켰다. SK증권도 16명을 정규직화했다. "여성들이 많은 팀에서는 결혼해서 출산을 계획하면, 여성 상사들이 한꺼번에 애를 낳지 말라고 해요. 전체 직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인데 직급은 다 여성이 깔고 있죠." 증권사에서 24년 일한 SK증권 김미영 수석부지부장은 예전에 비해 여직원의 처우가 나아지긴 했지만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최근 SK 콜센터에 계약직 2명이 들어왔다. 피크시간대 5시간을 일한다. 회사는 정부에서 할당받았다며 봐달라고 한다. 박근혜 시간제 일자리의 실체다.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면서 30개였던 증권사가 61개로 늘었어요. 스마트폰 거래의 확산과 더불어 시장점유율 확대를 위한 출혈경쟁이 벌어졌죠. 정부는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만든다고 대형증권사 육성정책을 펴 중소형 증권사가 죽어나가요. 냉온탕을 오가는 정부 정책으로 개미 투자자와 증권노동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는 거죠." 김경수 사무금융노조 대외협력국장의 탄식이다.

한국거래소 앞에 선다. 2007년 이 자리는 전쟁터였다. 증권거래소와 전국의 증권망을 유지·보수하는 코스콤은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50여개 하청업체 55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5개 업체로 줄이며 대량해고를 했다. 노동자들은 로비 점거농성, 서울시내 5개 CCTV 고공농성을 벌이며 경찰과 용역경비에 맞서 싸웠다. 475일 만에 55명이 무기계약직이 됐지만, 정인열 부지부장을 포함해 5명은 복직하지 못했다. 코스콤은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법과 대량해고에 맞서 싸운 영화 <카트>의 사무직 버전이다.

"영화 <카트>를 봤는데 용역들이 폭행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많이 났어요. 우리도 용역들한테 정말 많이 맞았거든요." 황영수 코스콤지부장은 직접고용은 됐지만 정규직과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고 말한다. "민주노총이 달라붙어도 자본이 겁을 먹지 않아요. 시간만 끌면 된다고 생각하죠. 직선제를 통해 지도부가 선출되면 장기간 싸우는 사업장의 기한을 정해서 퇴출운동을 벌여 끝장을 내는 것과 조합원 교육을 제대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는 꼭 했으면 좋겠어요."

여의도 랜드마크 63빌딩 한화생명보험. 1946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대한생명을 외환위기 이후 한화가 인수했다. 16층 노조 사무실 입구, '평생 바쳐 키운 회사 정리해고 박살내자'라고 쓰인 현수막이 보인다. 파업 찬반투표가 한창이다. 1988년 노조 설립 이후 25년 만에 준비되는 파업이다.

정헌주 부위원장과 김태갑 조직국장은 입사 동기다. 1997년 대학을 졸업하고 생명보험업계 2위인 대한생명에 지원해 합격했다. 그런데 외환위기가 터져 1년을 넘게 기다렸다가 1999년에 입사했다.

"작년 영업이익이 4880억원이에요. 올해 4월 301명을 내쫓았어요. 그런데 양이 안 찬다는 건지 700명을 더 자르겠다는 거예요. 몇 년간 6000원대이던 주식이 8600원으로 오르고, 회사가 2000억원에 육박하는 자사주를 매입하고 있어요. 매년 주주 배당을 하고, 심지어 신입사원도 채용하고 있는데 정리해고를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김태갑 국장의 목소리가 높아간다. 고금리 상품을 많이 팔아 미래에 올 위기에 대비한다는 것이 회사 논리다. 그런데 속셈은 다른 곳에 있다. "교섭에서 뭐라고 한 줄 아세요? 삼성생명이 1000명 정리했고, 교보도 590명 잘라서 우리도 더 해야겠다는 거예요."

파업찬반투표를 하고 있는 한화생명노조. | 박점규

아빠, 몸조심해

희망퇴직은 노사가 합의해서 실행하도록 단체협약에 명문화되어 있다. 2009년 5월 포레시아라는 회사의 정리해고에 대해 지난 3월 27일 대법원은 "심각한 재정위기에 처해 고용보장에 관한 확약의 효력을 유지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부당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부당해고를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회사는 법에서 지더라도 3년은 걸리니까 그 사이에 현장을 흔들어서 못 버티게 하겠다는 것이다. 노조를 깨야 비정규직도 늘리고 호봉제도 연봉제로 바꾸고, 퇴직금 누진제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 김승연 회장이 횡령과 배임으로 구속되자 한화그룹은 계약직 2043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하며 김 회장의 경영철학인 '함께 멀리' 정신으로 '통 큰 결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법원은 지난 2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정찰제 판결'을 내렸다. 최근 김승연 회장 경영복귀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보도다. 20개월 만에 '함께 멀리' 정신이 '통 큰' 정리해고로 돌아왔다.

9월 25일 당선된 노조 집행부. 대전에서 올라온 정현주 부위원장은 열흘째 철야농성을 하고 있다. 며칠 전 엄마와 <카트>를 본 5학년 아들이 전화를 걸어 왔다. "아빠가 뭐 하는지 알게 됐어. 아빠 몸조심해."

63빌딩을 나와 한강을 따라 낙엽이 뒹구는 강변길을 걷는다.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시상식 현수막이 보인다. 일하기 좋은 기업은 어디일까? 집안이 어려워지면 엄마 아빠가 옷 안 사입고 적금 깨서 아이들을 보살핀다. 외국의 기업들도 경영진이 먼저 희생한다. 회사가 멀쩡한데도 아이들 굶기고 내쫓는 재벌 회장님들. 여의도 직장인들이 낙엽보다 위태롭다.

상념에 잠겨 걷다보니 어느새 LG쌍둥이빌딩이다. 61일째 노숙 농성을 하고 있는 LG유플러스 비정규직 설치기사들이 초겨울 강바람을 견디고 있다. 기름을 아끼기 위해 발전기는 한밤에만 돌린다. 박정현 조직부장이 기름을 사러 간다. 한 조합원이 다가온다. 하나로 텔레콤에 입사해 파워콤을 거쳐 엘지유플러스 마포센터에서 대기업 하청기사로 일하고 있다. 17일부터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오랜 동료가 떨어져 다리에 철심을 박았는데 산재처리를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한 지 7년이 되던 해에 하루 아침에 업체를 바꿔버려서 퇴직금을 한푼도 못 받았어요. 고용승계가 안 될까봐 늘 조마조마하고. 나이도 점점 들어가는데, 고용보장이 되어 계속 일했으면 좋겠어요."

여의도공원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다시 증권가로 들어선다.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건물마다 불이 환하다. 국제금융센터(IFC)에 한 달 넘게 남은 성탄 트리가 불을 밝혔다. 여의도 노동자들의 마음에는 언제쯤 밝은 불이 켜질 수 있을까?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cco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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