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풀기 전쟁은 누구의 지갑을 터나

2014. 11. 2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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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자유시장경제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 오르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가격이 변동하면서 수요와 공급이 바뀌기도 한다. 비싸지면 수요가 줄고 공급이 는다. 가격이 하락하면 수요가 늘고 공급이 준다. 가격의 변화는 부를 재분배하는 효과도 발휘한다. 값이 비싸지면 수요자의 부가 공급자에게로 넘겨진다. 시장 가격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경우에도 유사한 변화가 발생한다. 그에 수반되는 부의 재분배 효과는 인위적이기 때문에 논란의 소지를 안게 된다.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들의 경기부양책은 화폐 증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금리를 0% 수준으로 내리고 돈을 풀었다. 돈의 공급을 인위적으로 늘리고 돈의 값을 인위적으로 떨어뜨리는 정책이다.

자기 나라 돈 가치를 떨어뜨리는 통화정책은 그래서 본질적으로 환율전쟁을 의미하게 된다. 미국 중앙은행이 화폐를 찍어댈 때는 달러화 값이 뚝 떨어졌다. 2010년의 제2차 양적완화가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에는 일본은행이 돈을 풀면서 엔화 값이 추락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유로화 값도 대폭 하락했다.

자기 나라 돈 가치를 인위적으로 떨어뜨리는 정책을 '근린궁핍화'라고도 부른다. 이웃나라(근린)를 가난하게(궁핍화) 만들기 때문이다. 화폐 가치를 떨어뜨린 A국가는 수출을 더 많이 할 수 있고 수입을 줄일 수 있다. 수출품 가격이 싸지고 수입품 가격은 비싸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A국가에 수출을 하거나 제3의 지역에서 A국가와 수출경쟁을 하던 B국가는 가난해진다. B국가의 부는 A국가로 이전된다.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환율전쟁의 재분배 효과다.

선진국 경기부양 통화정책에 의존자국 돈가치 인위적으로 떨어뜨려이웃나라 가난하게 만들어국내 인플레이션 회복에는 실패정부지출 오히려 줄이면서주식 등 자산가격 상승만 부추겨부유층 소득 늘어나 빈부격차 심화

요즘 들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유가의 급락세다. 미국의 원유개발 붐 등으로 인해 석유 공급이 넘쳐나는데, 주요국들의 경기가 부진한 탓에 석유 수요는 둔화된 결과다. 이러한 석유 수요 둔화 배경에는 환율전쟁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일본과 유럽의 통화가치 절하 정책은 그곳의 석유 수요를 위축시킨다. 수입 석유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달러화가 강해질 때 석유값이 떨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달러화를 쓰지 않는 여타 국가의 석유 수요가 억제되기 때문이다.

최근의 유가 급락세에는 세계 최대의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역할이 지대했다.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점유율을 더 높이기 위해 석유 수출 가격을 인하한 탓이다. 가격을 내려 다른 나라와 수출경쟁을 벌인다는 측면에서 사우디아라비아식의 환율전쟁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산유국들은 똑같은 양의 석유를 수출해도 버는 돈은 줄게 됐다. 반면 석유 수입국과 석유 소비자들은 세금 인하와 똑같은 혜택을 얻었다. 따라서 환율전쟁은 산유국의 부를 석유 수입국, 석유 소비자들에게로 이전시키는 재분배 효과를 낳는다.

자기 나라 돈 가치를 떨어뜨리는 정책은 국내 물가를 끌어올리려는 노력이다. 디플레이션 압력을 퇴치하고 인플레이션을 회복시키는 정책이다. 지금 주요국들은 주로 환율을 평가절하해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데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수입 물가가 오르면서 국내 물가 전반이 상승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면 부채원금의 실질 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물가가 두 배로 높아지면 부채원금의 실질 가치는 반토막으로 줄어든다. 4000만원을 빌려 금 1킬로그램을 샀는데, 금값이 8000만원으로 뛴 경우나 마찬가지다. 대신 돈을 빌려준 사람의 자산가치도 절반으로 줄어든다. 따라서 환율전쟁은 저축자의 부를 채무자에게 재분배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일각에서는 물가상승률을 수년 동안 5% 수준으로 높이자는 주장이 있었다. 위기는 과도한 채무에서 비롯됐는데, 물가를 대폭 끌어올리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가는 오히려 더 떨어졌고, 그래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더욱 맹렬하게 돈을 풀고 있다.

그런 면에서 환율전쟁과 인플레이션 정책은 부유층과 노년층의 부를 저소득층과 청년층으로 이전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부유층과 노년층은 상대적으로 저축이 많고, 저소득층과 청년층은 상대적으로 부채가 많기 때문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두고 "가난한 채무자보다는 부유한 채권자의 이익에 부합하려는 본능 탓"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크루그먼 교수가 주장하는 부의 재분배 효과는 발생하지 않았다. 중앙은행들의 화폐가치 떨어뜨리기 정책은 오히려 부의 불균형,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켰다. 인플레이션은 오로지 자산시장에서만 발생했을 뿐 실물경제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중앙은행들의 부양정책은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정책에 맞춰 시행됐다. 정부가 물건을 더 사들이고 투자를 늘리도록 중앙은행이 돈을 빌려줬다. 새로운 수요가 보태짐에 따라 자연히 가격이 오르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는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서 물건과 노동력을 직접 사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극적인 사례로 조선시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건설이 야기한 물가앙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들이 사들인 것은 제품이나 노동력이 아닌 금융자산이었다. 정부는 오히려 지출을 줄이는 데 더 열중했다. 그래서 오른 것은 주식, 채권 등 금융자산 가격뿐이었다. 금융자산을 훨씬 많이 가진 부유층이 큰돈을 벌었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한 해 최상위 1%의 소득은 145만달러로 중간 20% 계층의 5만5000달러보다 26배에 달했다. 최상위 1%는 소득의 36%를 자산에서 얻었다. 반면 중간 20% 계층의 자산소득은 전체 소득의 3%에 불과했다. 상위 1%와 중간계층 간의 자산소득 격차는 3만1400배에 달했다.

실물경제 인플레이션 역시도 저소득층과 채무자에게 반드시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물가가 오른 것 이상으로 임금이 인상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빚의 실질가치가 떨어지는 한편으로 노동의 대가도 함께 감소하는 경우가 흔하다. 환율전쟁, 환율의 평가절하는 실질임금을 삭감하는 것 그 자체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안근모 글로벌모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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