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평도 도발 4년, "다시 돌아온 핸드크림 버릴 수가 없어.."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입력 2014. 11. 24. 02:27 수정 2014. 11. 24.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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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문영조(52)씨에게는 4년 동안 버리지 못한 핸드크림 하나가 있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아들, 늠름했지만 언제나 어린애처럼 '아빠'라고 부르던 아들에게 보냈다 되돌아온 것이다. 아들인 고(故) 문광욱 일병은 2010년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당시 북한 해안부대의 무차별 방사포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그해 10월 23일 경북 경산에서 특기교육을 받던 아들을 본 게 문씨에겐 마지막이었다. "목소리… 숨소리…, 너무나 많이 생각이 나서… 그게 아주 (견디기) 어려워요."

23일 서울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연평도 포격도발 4주기 기념식에 참석한 문씨는 아주 긴 호흡으로도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아들 광욱씨는 2010년 11월 4일 해병대 연평부대 공병중대에 배치됐다. 그리고 포격 이틀 전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아빠, 손이 트고 힘들어. 핸드크림 한 통 보내주면 안돼?"라는 말을 했다. 아버지는 전화를 끊자마자 달려가 제일 좋은 핸드크림을 샀다. 아버지는 시설공사와 전투장비 보수 등 갖가지 어려운 일을 해야 하는 아들의 두 손을 생각했고, 곧바로 부대로 우편 택배를 보냈다.

그러나 문씨가 보낸 핸드크림은 아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사건 당일 오후 문 일병은 해상사격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대피소에 있었다. K-9 자주포 발사 훈련 시엔 필수 요원을 제외하고 모든 해병대원이 대피해야 했다. 1차 훈련이 끝났고, 그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방사포 포탄이 날아왔다. 순식간에 문 일병은 목숨을 잃었다.

그해 11월 말쯤 핸드크림은 문씨 집으로 반송됐다. 아내는 목 놓아 울었다. 그러나 문씨는 뭔가 목에 걸린 듯 울음도 터뜨릴 수 없었다. 몸무게가 10㎏이나 줄고, 누구와도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다. 기념식장에서 만난 문씨는 "아들은 갔지만 친구와 후배들이 다 해병대에 지원했다"며 "북한을 가만두지 않겠다고들 했다"고 전했다.

고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54)씨도 눈에 띄었다. 서 하사는 말년휴가길에 북한의 포격이 시작되자 부대로 급히 뛰어가다 전사했다. 김씨는 "지난 4년은 송곳이 심장을 찌르는 듯 아픈 시간이었다"고 이를 악물었다. 아들의 체취가 남은 집에 도저히 살 수 없어 이사를 했다는 그는 "제2의 서정우, 문광욱이 나오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고 말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한민구 국방부 장관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천하수안 망전필위(天下雖安 忘戰必危)'라고 했다. 나라가 비록 평안해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는 말"이라며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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