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6·MI5·GCHQ..본드의 '살인 면허' 따라하지 말란 말야

2014. 11. 23.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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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영국 3대 정보기관들 '일탈' 논란

"최고는 아니야. 그렇다고 최악도 아니지. 세계에서 두번째로 뛰어난 비밀요원이야. … 조끼엔 온통 총탄 구멍이 나 있어. 당신은 남들보다 좀 더 열심히 뛰지. 두번째로 뛰어난 비밀요원이기에…."

영국 비밀정보국 MI6(엠아이식스)의 세밑 파티.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의 팝 '세계 두번째로 뛰어난 비밀요원'의 선율이 홀 안을 채운다. 정보국 수뇌부와 연인들이 칵테일을 기울이며 은밀한 눈빛을 교환한다. 끈적한 욕망과 음모가 함께 흘러갔음은 나중에야 드러난다. 동서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정보국 내부 첩보전을 다룬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하 <팅커>)의 한 장면이다.

'세계 두번째로 뛰어난 비밀요원'은 영국 정보기관에 대한 이중의 은유로 들린다. 애초 이 노래가 쓰인 1965년 영화 <라이선스트 투 킬>에선 세계 최고의 첩보원 제임스 본드보다 한 끗 떨어지는, 하지만 본드처럼 '살인 면허'는 지닌 MI6의 B급 요원 주인공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 특급 요원인 본드처럼 되고 싶은 요원의 욕망을 상징했다.

'두번째'는 한편으로 세계 정보체계 내에서 이 기관의 위상에 대한 은유로도 다가온다. <팅커>에서 이 기관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의 정보협력 성사에 목을 매는 존재로 그려진다. 냉전 시대 세계 최강국인 미국 중앙정보국의 광대한 정보 자산을 공유하기 위해선 동맹국인 영국일지라도 좀더 부지런히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팅커>의 맥락에서 이 노래는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어쩔 수 없이 세계에서 두번째일 수밖에 없는 영국 정보기관의 한계에 대한 자조 섞인 비유로 재해석된다.

요즘 MI6를 비롯한 영국 정보기관들이 수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민간인 사찰과 도청, 고문과 불법 송환 등의 추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거세다. 영국 3대 정보기관인 MI6와 보안국(MI5), 정보통신본부(GCHQ)가 빠짐없이 걸려 있다.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미국 정보기관과의 공조·협력 과정에서 저마다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며 굳어진 '미국 주도-영국 협조'의 정보동맹 구조는 냉전 붕괴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을 비롯한 '테러와의 전쟁'을 거치며 양국 간 정보 공조는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영국 정보기관이 잇따라 문젯거리를 낳고 있는 배경의 한편에는 세계 전체의 정보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을 따라가야만 하는 2인자 정보기관의 비애가 깔려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민간인사찰·도청·고문·불법송환…온갖 추문 꼬리에 꼬리 물어'MI6' 비밀정보국법 7조살인·고문 등 불법행위 '면허장'2009년에만 500건 장관 서명'고문금지' 국제사법재판소 법과 충돌정보기관 투명성 요구 목소리 커져

먼저 영국 정보기관의 구조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MI6는 외무부 소속의 대외정보기관이다. 젓지 않고 반드시 흔들어서 만든 보드카 마티니만 홀짝이기로 유명한 007 영화 속의 제임스 본드가 소속된 곳이다. MI5는 내무부 소속의 국내 방첩 및 보안 담당 부서이다. 두 기관은 1909년 설립된 영국군 산하 정보기관을 모태로 하고 있다. 1914년께 해군이 주축인 군 정보부(Military Intelligence) 6국이 MI6로, 육군이 주축인 5국이 MI5로 분리됐다. 각각 비밀정보국(SIS)과 보안국(SS)이라는 정식 명칭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옛 이름으로 불릴 때가 많다. 외무부 산하 정보통신본부는 통신·영상 등 신호정보를 수집·분석하는 기관이다. 1차 세계대전 때 육·해군에 각각 설치된 암호해독팀을 통합해 1919년 설립한 정부암호학교(GCCS)가 모태다. 1946년 정보통신본부로 이름을 바꿨다.

비밀정보국은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미국 중앙정보국에 협조해 리비아 반체제 인사를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에 넘겨준 행위를 둘러싼 논란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2004년 카다피에 반대하는 리비아 무장단체 지도자이자 알카에다에서 활동해온 압둘하킴 벨하즈와 그의 모로코인 부인이 타이 방콕 공항에서 미국 중앙정보국 요원에게 체포된 뒤 리비아로 넘겨졌다. 벨하즈 부부가 방콕으로 간다는 정보를 건네준 게 바로 비밀정보국이었다. 이 기관은 벨하즈의 부하로부터 그가 망명 신청을 위해 방콕을 거쳐 영국으로 갈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곧바로 중앙정보국에 알렸다. 벨하즈는 방콕의 중앙정보국 구금시설에서 고문을 당한 뒤 리비아로 넘겨져 또 고문을 받았다고 2011년 폭로했다. 그는 또 리비아에서 진행된 신문에는 비밀정보국 요원들이 함께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카다피와 관계 개선을 이룬 뒤 알카에다에 맞서는 공동 대응을 보장받은 미국이 그 대가로 벨하즈를 리비아에 넘겨줬고, 영국 비밀정보국이 그 과정에서 핵심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다며 세계 곳곳에 간이 구금시설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알카에다 요원 등 테러 용의자들을 군용기 등으로 옮겨온 뒤 물고문의 일종인 '워터 보딩' 등 다양한 고문 방식을 동원해 신문했다. 비밀정보국도 알카에다 등의 영국 내 테러 정보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세계 전역에 걸친 광대한 정보망을 구축한 중앙정보국과의 협력이 꼭 필요하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벨하즈는 자신이 고문당하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영국 기관 쪽이 자신을 카다피 정권에 넘겼다며 2011년 소송을 제기했다. 영국 정부는 법원이 만약 이 사건의 소송을 받아들여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논란이 일 경우 미국과의 관계에 치명타가 되고 미국의 정보 협조가 끊길 수 있다며 국익 차원에서 이를 기각해줄 것을 법원에 요청했다. 하지만 지난달 말 영국 항소법원은 벨하즈의 소송을 받아들인다고 밝히며 이를 일축했다. 그 뒤로도 벨하즈와 변호사 사이 전화통화를 영국 정보기관이 도청했다는 폭로가 나오는 등 파문은 갈수록 번져가고 있다.

비밀정보국의 고문 방조 논란은 국익이란 명분 아래 기본권을 무시하는 정보기관의 불법행위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007 영화의 기초를 이루는 살인 면허와도 관련된다. 007 시리즈의 원작인 이언 플레밍의 소설에서 '00'은 임무상 살인이 필요한 경우, 국가가 책임을 져준다는 면책 보장을 담은 코드로 소개된다. 007은 7번째 살인 면허 소지자란 뜻이다. 12권의 원작 소설에서 본드는 모두 38명의 '악당'에게 자신의 면허를 재량껏 활용한다. 하지만 2006년 11월15일 현직 최초로 <비비시> 라디오와 인터뷰를 한 비밀정보국 남녀 요원 2명은 변조된 목소리로 '살인 면허 같은 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들은 다만 영화에 나오는 신무기 개발 책임자인 큐(Q) 같은 인물은 실재하며, 영화에서 엠(M)으로 불리는 비밀정보국장은 실제로는 초대 국장인 맨스필드 커밍의 성 첫 글자를 따 시(C)라고 불린다고 털어놓았다.

비밀정보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영국 비밀정보국법 7조가 사실상 살인과 고문을 포함한 불법행위의 면허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7조는 '국외에서 벌어지는 행위가 장관의 허가 아래 이뤄지는 경우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비밀작전에 7조를 적용해 달라는 요청은 9·11 테러 이후 급증해, 2009년에만 500건의 장관 서명이 이뤄졌다. <가디언>은 "MI6 안에선 7조를 '불법 면허'로 받아들여왔다"며 이는 어떤 고문도 금지·처벌하도록 한 유럽협약 및 국제사법재판소법 등과 충돌하는 지점이라고 짚었다.

정보통신본부도 일반 시민에 대한 무차별 도청을 저질러왔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미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여러 내용에 더해 최근엔 미국의 신호정보 담당 기관인 국가안보국(NSA)이 확보한 미가공 커뮤니케이션 자료를 건네받아 영장 없이 들여다보고 있다는 추가 폭로가 나왔다. 정보통신본부는 미국 국가안보국 주도로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이른바 '영미권' 국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초대형 '빅브러더' 신호정보 수집·분석 시스템인 '에셜론'의 두번째 파트너이기도 하다.

영국 정보기관의 일탈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투명성과 감독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11월 새로 취임한 앨릭스 영거 비밀정보국장의 보따리에는 "이슬람국가(IS)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고문' 문제가 들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새롭게 제기되는 안보 위협을 구실 삼아 영국 정보기관들이 비밀주의를 한층 키우는 쪽으로 오히려 역주행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냉전 이후 정보기관의 주요 목표는 테러 방지로 바뀌었지만, 최근엔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와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과거 냉전 시대 방식의 정보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첨단 신호정보 탐지 능력을 갖춘 미국과의 정보동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강해지고 있다.

그나마 영국은 행정부 내 통합감독기구인 합동정보위원회와 의회 정보보안위원회, 사법부 개인정보법원(IPT)의 삼중 통제 장치가 가동되고 있고, 시민단체의 감시 노력도 활발한 편이라는 점은 변화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정보기관도 3분할돼 내각 통제 아래 있고, 어쨌거나 세계 두번째 급의 능력은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능력과 투명성 모두에서 한층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온 한국 유일의 정보기관이자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가정보원의 미래를 구상할 때 여전히 참고할 만한 대목들로 보인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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