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 파업 참여 주부 "비정규직 현실 그대로"

2014. 11. 22.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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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우리 고생 1/10도 담지 못해.. 아직도 비정규직에 냉혹한 사회"

[CBS노컷뉴스 박초롱 기자]

이 기사는 2007년부터 500일 넘게 '비정규직 해고와 외주화 반대'를 요구하며 이랜드 홈에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에 참여했던 이선호(49·여) 씨 1인칭 시점으로 작성됐다. [편집자註]

동료 마트 직원들과 함께 영화 '카트'를 관람했다.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서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람답게 대우해달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지난날들이 생각났다.

남편은 병원 직원으로 일했다. 대한민국 서민 가정 생활하는 데 외벌이로는 빠듯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아들 학원비라도 벌자는 마음으로 2005년 방학동 홈에버의 계산원으로 취직했다.

한 달에 60~70만 원을 벌었다. 적다는 생각은 하지 않다. 하루 8시간을 계속 서서 물건을 계산하다 보면 다리가 아팠다. 하지만 가계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어깨가 들썩해졌다. 마트 유니폼을 입으면 신이 났다.

'노조'가 뭔지도 잘 몰랐다. 그냥 같이 일하던 언니가 "보험 삼아 들어 놓으면 혹시 또 아냐"며 부추겨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름을 올린 것일 뿐이었다. TV에 나오는 '빨간 띠 두른 사람들'은 남의 나라 얘기였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홈에버가 매각된다는 흉흉한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일한 지 2년이 넘으면 다른 지점은 정규직 발령을 내주기도 했는데 우리 지점은 예외였다.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7월 기간제법 시행을 앞두고 그해 4월쯤부터 홈에버 월드컵경기장점 직원 등 해고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비정규직 해고 및 외주화를 반대하며 이랜드를 상대로 파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월드컵경기장점 앞으로 하루 집회를 하러 갔던 것이 2년 동안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농성장에 갈 때 입었던 반팔 티셔츠를 2년이나 입을 줄은 몰랐다. 우리는 조를 짜 돌아가면서 농성장을 지켰다.

우리는 그냥 평범한 아줌마들이었다. 소위 '운동권'도 아니었다. '게릴라 파업'이라고 해서 장을 보는 척하다 계산대를 막아서고 업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걸 했던 기억이 난다. '이걸 해야 하나'하는 생각만 들었다. 구호는 너무 어색해서 제대로 외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용당했다'는 억울함에 중간에 그만둘 순 없었다.

농성장에는 전기와 물이 끊겼다. 우리가 일하던 계산대 앞에 박스를 깔고 고된 몸을 누였다. 이랜드 소유 강남 뉴코아를 점거했을 때는 내부가 너무 추워서 야채를 담는 커다란 비닐로 몸을 둘둘 감고 잠을 잤다. 그래도 서로 손을 잡으면서 버텼다. 물대포차가 쫓아오면 사력을 다해 도망다녔다. 영화는 우리가 고생한 것의 1/10도 담지 못한 것 같다. 그만큼 처절했고 아팠다.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 지점을 옮기며 농성을 다녔다. 휴대전화 달력을 무심히 들여다 보니 그날이 딸애의 생일이었다. 문자를 한 통 보냈다. "딸! 엄마가 못 챙겨줘서 미안해. 미역국 못 끓여줘서 미안" 착한 딸의 문자를 보고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엄마 나를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마워요"

어느 날은 남편이 찾아온 적도 있었다. "큰 애가 중학교 3학년인데 중요한 시기잖아. 이제 할만큼 했으니 돌아와야 하지 않겠어?" 집안 꼴은 엉망이었다. 아들이 고등학교 원서를 넣는 것도 전혀 도와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만두기에는 억울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래서 끝까지 해볼 거라며 남편의 부탁을 뿌리쳤다. 너무나 미안했다.

가장 슬펐던 기억을 꼽으라면 경영진이 다닌다는 강남의 한 교회에 갔을 때다. 우리는 그저 일한 데 대한 정당한 대접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그곳에 우리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전기가 모두 끊겼다. 모두를 감싸 안는다는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예쁜 트리가 반짝이다 모두 꺼졌다. 어두웠다.

1년 넘게 계속된 투쟁은 노조 집행부를 해고하고 나머지 조합원들을 받아주는 조건으로 끝을 맺었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생각에 가슴 아팠지만, 나는 생업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렇게 처절한 싸움 뒤에도 내 신분은 변함없는 마트 계산원, 여전히 비정규직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마트 계산원의 현실은 아직도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1년 일하고 잘리는 사람은 아직도 있다. 마트는 정직원 공고를 주기적으로 낸다며 생색을 내지만, 정작 종일 마트에 매달려 일하는 아줌마들은 아무도 정규직 모집 공고를 본 적이 없다. 손님과 분쟁이 발생하면 무조건 사과해야 한다. 나는 약자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비정규직에 냉혹하기만 하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영화는 나름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나의 현실도 해피엔딩일까? 영화를 보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비정규직이 아니냐?'고. 명문대를 나와도 비정규직인 인턴부터 해야 겨우 정규직으로 입성할까 말까 한 세상. '당신 부모나 자식이 비정규직일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CBS노컷뉴스 박초롱 기자 warmheartedcr@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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