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최고 용병 된 '月 180만원 내셔널리거'

임기환 2014. 10. 31. 10: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베스트 일레븐)

임기환의 인사이트

조태근. 대다수의 축구팬에겐 생소한 이름이다. 당연하다. 이제는 태국 프리미어리그(TPL) 차이낫 FC의 주전 수비수로 발돋움하며 TPL 내에서 유명한 외국인 선수로 자리를 잡았지만 국내에선 철저한 무명이었기 때문이다. 포털 사이트 검색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조태근은 <b11>과 가진 만남에서 "국내 인터뷰는 처음"이라고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축구 인생 절반을 부상으로 보냈다고 고백한다. 선수 생활 15년 중 7년을 부상으로 고생했다. 내셔널리그에서도 제대로 뛰지 못했다. 축구계에서 무수히 밟혀 꺾이는 한 포기 잡초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주대학교 동기 중에 그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인고의 세월을 거쳐 TPL에서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는 외국인 선수가 됐다. 뒤늦게 꽃망울을 틔운 '인내의 아이콘' 조태근이 굴곡진 축구 인생과 태국 이야기를 들려줬다.

▲ 시련 - 단 한 경기만 뛸 수 있다면

조태근은 성실했으나 재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아니 동기 중에 꼴찌였다. 대륜중 때는 가장 못하는 선수였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게다가 지금과는 달리 신체적 장점도 없었다. 몸이 허약해 파카를 입고 운동장을 돌거나 숙소의 보일러를 켜는 일명 '환자'였다. 대륜고 1학년이 돼서야 키가 부쩍 크면서 비로소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남들보다 늦은 중학교 1학년 때 태권도서 축구로 전향한데다 실력도 부족했던 만큼 더 악착같이 했다. 이후 그는 전주대에 입학해 주축 수비수로 성장해 나갔다. 대학 3~4학년 때는 나름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전북 현대와 FC 서울 입단 얘기도 흘러 나왔다. 실제로 전북에서 2군 경기를 뛰고 골도 넣었다. 그 역시 당시 전북을 갈 줄 알았다. 그러나 프로행은 녹록치 않았다. 결국 2008년 내셔널리그 수원시청에 1년 계약으로 입단했다. 시련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선천적으로 안 좋았던 무릎에 과부하가 걸렸다. 여기에 리그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며 무릎 내측 인대와 전후방 십자인대까지 전부 나간 것이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전북에 갈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그런 말도 있었고요. 첫 번째 좌절이었죠. 그런데 나쁜 일은 몰려서 온다고 대학교 4학년 때 악재가 한꺼번에 찾아왔어요. 집이 많이 힘들었거든요. 아버지가 택시 기사였는데 갑자기 뇌경색 증세가 와서 돌아가실 뻔했어요. 여기에 저마저 부상으로 뛰기 힘든 상황이 온 거죠. 당시 쪽방에서 살며 재활에 임했는데 내셔널리그는 지원이 없습니다. 지금은 팀에서 다 지원해주지만 당시는 병원에 입원해서 보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거죠. 월급 180만원으로는 수술비, 재활비, 생활비를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편의점에서 라면 먹고 그랬죠."

수원시청은 결국 그를 1년도 안 돼 방출했다. 선수 생명이 끝났다고 본 것이다. 수원시청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팀을 나온 그는 2008년 4월 결국 수술대에 올랐다. 오른쪽 무릎 연골을 들어냈다. 이후 약 3년간 재활에만 매달렸다. 중간 중간 계속 도전해 탈출구를 모색했다. 2010년에는 일본 J리그와 J2리그 다섯 팀에서 테스트를 봤다. 게 중에는 빗셀 고베·오이타·사간 도스 등 알려진 팀들도 있었다. 하지만 몸이 온전치 않은 내셔널리거를 불러주는 팀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귀국하니 K리그 드래프트는 끝나 있었다.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 할 수도 없었다. 악재의 연속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순간순간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조태근은 뛰고 싶었다. 단 한 경기면 됐다. 한계를 꼭 시험해보고 싶었다. 실패자로 낙인 된 인생을 살기는 싫었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평생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왔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지원한 부산교통공사 입단 테스트에서 두 자리 수 경쟁률을 뚫고 최후의 2인에 들었다.

"힘든 재활 기간을 거치면서 축구를 접을까 하는 생각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배신감 느낀 적도 많고요. 일본 도전은 지금 생각하면 제가 능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 경기만 뛰어보자'하는 마음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같습니다. 그 한 번으로 계속 도전했어요.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3년 6개월 만에 첫 실전 경기를 뛰었죠."

▲ 희망 - 태국이 놀란 '괴물 센터백'

조태근의 부산교통공사서 뛰며 또 다른 도전을 준비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 더 지체했다가는 그저 그런 선수로 현역 커리어를 마치게 될 지도 몰랐다. 불투명한 미래. 그는 시선을 한국이 아닌 해외로 돌렸다. 도전할 수 있는 길 하나가 보였다. 태국이었다. 1년 동안 몸을 만드는 등 차근차근 TPL행을 준비했다.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도전했다. 2012년 12월, 그는 에이전시가 아닌 동료의 추천을 통해 TPL의 중소 클럽 차이낫 FC로 이적했다. 태국의 4대 명문 방콕글라스에 있던 수라차이 감독이 차이낫의 신임 감독이 되면서 조태근을 영입한 것이다.

"처음에는 가족들이 많이 걱정했어요. 부모님은 제가 그냥 부산교통공사에 있길 바라셨죠. 그러나 시간이 없었습니다. '지금 내셔널리그에 있을 때가 아니다'고 와이프를 설득했습니다. 남들은 '안 되면 태국이나 가지'였지만 전 절박했습니다. 마지막이란 심정이었죠.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짐을 한 가득 싸고 태국으로 떠났습니다. 전 딱히 내세울 만한 프로필이 없었는데 의외로 일이 잘 풀렸습니다. 수라차이 감독이 절 좋게 봤어요. 테스트를 봤지만 그 전에 내 경기 영상을 보고 이미 결정해 놨다고 하더군요. 그 자리에서 '내일부터 같이 운동하자'는 답을 들었습니다."

조태근은 3일 뒤 강호 부리람과 연습 경기서 맹활약하며 확실한 임팩트를 심는데 성공했다. 팀 내 다른 태국 선수들은 부리람의 이름값에 눌려 위축된 플레이를 펼쳤지만 조태근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펼쳤다. 경기 후 수라차이 감독이 다른 선수들을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조태근을 칭찬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계약 이야기는 일주일 동안 나오지 않았다. 다른 에이전트는 디비전 1(태국 2부리그) 팀을 지원해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러나 더 물러날 곳은 없었다. 결국 조태근은 안 되는 영어로 수라차이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차이낫은 구단주의 휴가로 결재를 올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라차이 감독은 "넌 우리가 찾는 한국적 선수"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A4 용지를 꺼내 가계약서를 조항 없이 금액과 옵션만 걸고 황급히 작성해 꼭 함께하자는 약속을 했다. 이후 약속대로 수라차이 감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조태근은 그렇게 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엔 쉽지 않았습니다. 음식부터 문화까지 모든 게 달랐죠. 숙소에서 나오는 태국 음식은 향이 강해 1,500원 짜리 길거리 노점 음식을 사먹을 정도였어요. 아주머니가 잘 먹는다고 더 주기도 하고요(웃음). 특히 기후 적응이 힘들었습니다. 이곳은 평균 온도가 38도 정도입니다. 리그 경기는 주로 저녁에 하는데 그때도 32도는 돼요. 지금은 적응됐지만 처음엔 진짜 힘들었죠. 태국 선수들이 한국 용병이라고 얕잡아 보기도 했습니다. 태국 선수들은 자신들이 싫으면 바로 따돌리거든요. 먼저 다가가려고 노력했습니다. 용병이 먼저 가서 장난치고 그러면 그들도 마음을 열고 좋아해요."

그렇게 조태근은 태국 문화에 적응해 나갔다. 성실한 플레이로 입단 초기부터 감독 눈에 들어 주전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다. 중앙 수비 포지션에 그를 포함해 용병만 셋이었다. 한 명은 카메룬 청소년 대표 출신이었고 다른 한 명은 트리니다드토바고 현 국가대표였다. 게다가 다른 한 명은 용병은 아니었지만 수라차이 감독이 방콕글라스에서 같이 데려온 애제자였다. 스펙만 따지면 조태근이 가장 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태근의 입지는 굳건했다. 수라차이 감독은 유럽 선수와 붙어도 밀리지 않는 피지컬과 강한 정신력을 높게 평가했다. 182㎝로 센터백 치고는 크지 않은 신장이지만 탄탄한 체구에 비해 발이 빨라 역시 기민한 태국 선수들을 잘 잡을 수 있었다. 과거 K리그 경남에 있었던 부발로나 '악동'으로 유명한 조이 바튼 등 유럽 선수들과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태국 내에서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한때는 내셔널리그에서도 뛰지 못했던 그에게 태국 3개 팀의 오퍼가 들어왔다. 더 나은 조건도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전북 현대 최강희 감독과 이동국의 관계처럼, 자신을 믿어준 수라차이 감독에 대한 그의 의리였다. 수라차이 감독이 올 시즌 성적 부진으로 경질 돼 방콕글라스 총 디렉터로 갈 때 자신이 다시 지휘봉을 잡는다면 이적료를 물고서라도 널 사가겠다고 말했다. "수라차이 감독이 제게 내재돼 있던 것들을 많이 끌어 올려줬어요. 그간 부상으로 쉬면서 잃어버렸던 것들이 많았거든요. 볼 배급이나 리딩 등 경기 내적 부분은 물론, 감독과 선수 사이에 소통과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줬죠. 그는 '지시'가 아닌 '권유'와 '제안'을 하거든요." 아무리 믿음이 크더라도 항상 부상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서른 줄의 선수와 2년 재계약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도전 - 조태근과 차이낫의 '행복한 동행'

"구단주를 포함해 수뇌부 셋과 미팅을 했어요. 이미 수라차이 감독과 얘기 후 결심이 선 뒤였죠. '다른 팀 갈 생각 없다. 이곳에서 은퇴하겠다'고 했어요. 팀에서도 '고맙다. 은퇴 이후의 자리도 준비해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설령 부리람으로부터 오퍼가 온다 해도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예전에는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차이낫과 수라차이 감독은 그저 그런 선수였던 절 변화시켜 준 존재입니다. 그런 고마움을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순 없어요. 그렇다고 절대 안정을 택하는 건 아닙니다. 이곳이 시골이지만 머릿속에 변화가 그려져요. 부리람 이상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태근은 차이낫의 비전과 동행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드넓은 논두렁에 운동장 하나만 떡하니 있는 시골 풍경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태국 최대 설탕 회사의 막대한 스폰서링을 업고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비록 시골 팀이지만 스폰서 회장과 구단주의 축구 사랑이 대단하다. 팀이 강등되더라도 "1년 뒤에 다시 올라오면 된다"라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마인드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시골 공설운동장에서 급식을 받아먹고 경기장 화장실에서 호스를 꼽아 몸을 씻던 차이낫의 선수들은 이젠 K리그 상위권 팀 못지않은 클럽하우스에서 얼음 샤워와 뷔페를 즐긴다. 차이낫의 꿈은 태국 최고가 아니다. 가까이는 2장뿐인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따서 한국이나 일본같은 아시아 빅 클럽들을 원정 오게 하는 것이 그들의 꿈이다.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더 나아가 아시아 일류 클럽이 되는 게 궁극적 목표다. 물론 그 안에 조태근이 있다.

그의 목표는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다. 가까이는 팀의 레전드로 남고 싶지만 더 큰 꿈을 향한 청사진을 이미 품고 있다. 그것은 바로 태국 축구, 나아가 아시아 축구의 발전이다. 홍콩에서 '홍콩 히딩크'로 불리며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김판곤 홍콩 국가대표팀 감독과 비슷한 비전을 갖고 있다. 우선 5년 뒤를 내다보고 언어 등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준비 중이다. 오는 11월에는 한국에 들어와 지도자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지도자보다는 축구 행정 쪽에서 많은 기여를 하고 싶단다.

"아직 태국 리그는 인기에 비해 행정적 부분이 열악합니다. 마케팅은 활성화 돼 있어요. 텔레비전에는 축구 방송이 24시간 동안 나오고요. 그러나 아직은 직책에 맞는 행정 전문성이 부족해요. 축구 인구가 많고 선수들의 재능도 좋지만 유스 시스템 등 제반 여건이 많이 부족하죠. 행정가와 지도자의 전문성도 떨어지고요. 전 유소년 교육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정말 잘하는데 여러 이유로 프로에 못간 선수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요. 막연하게 '선수 은퇴 후 코치를 하면 되지'하는 안일한 생각은 없습니다. 지도자도 좋지만 궁극적 목표는 행정가가 되는 겁니다. 한국 축구도 중요하지만 은퇴 후 공부해서 태국 축구를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시아 축구, 그리고 한국 축구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요?"

▲ 10개의 키워드로 본 조태근의 '태국 이야기'

1. TPL: 이젠 태국 리그의 위상도 많이 높아졌다. 만만히 생각하고 왔다가 큰 코 닥쳐 돌아가는 리그가 됐다. 5년 전만 해도 한국 선수면 막말로 무조건 다 프로필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구단들의 눈높이가 많이 올라갔다. 올림픽대표와 청소년대표 등 국가대표 이력으로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젠 당당히 대표급 선수의 프로필을 요구할 정도다. 성장 속도도 매년 차이가 눈에 띨 정도로 빠르다. 불과 몇 년 전에 수 백 만원에 불과했던 국내 선수의 연봉이 스타급은 억대까지 올랐다.

2. 차이낫 FC: 한국으로 치면 읍면에 해당하는 차이낫을 연고로 2009년 창단 돼 올해로 6년 차를 맞는 햇병아리 팀이다. 창단 2년차인 2010시즌에 북부 디비전2(3부리그)에서 이듬해 전국리그인 디비전1(2부리그)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불과 한 시즌 만에 1부리그에 입성했다. 1부리그서도 초고속 성장으로 중위권 팀으로 자리 잡고 있다. 3년 내 완공을 목표로 경기장을 신축할 계획을 갖고 있다.

3. 최초 클럽 하우스: 차이낫의 클럽하우스는 태국 최초다. 겉모습은 슬레이트 철판 집 같지만 내부 시설은 K리그 클래식 상위 팀 못지않다. 차이낫의 스태프는 총 50명으로 선수 치료실에만 10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일반 트레이너, 피지컬 트레이너, 재활 트레이너 등 10명의 트레이너와 5명의 마사지사가 따로 있다. 마사지사가 운동 전후로 30분씩 근육을 풀어준다. 시설도 상당하다. 유산소 운동만을 위한 건물이 따로 있다. 이곳에선 사이클 15대가 쉴 새 없이 굴러간다. 독일에서 공수한 영하 20도 아이스 회복실은 차이낫이 자랑하는 아이템이다.

4. 코리안 리거: 태국 1부리그에는 16명의 한국 선수가 있다. 김동진(무앙통)·김형범(부리람)·김유진(방콕)·김근철·이상호(이상 타이포트)·이준기·고기구(TOT)·이현진(아미)·박정수(차이낫)가 대표적이다. 2부인 디비전 1까지 포함하면 약 40명의 한국 선수가 태국 무대를 누비고 있다. 디비전 1은 오후 4시에도 경기가 있어 주로 저녁 6~8시에 경기를 하는 TPL보다 기후적으로 더 힘들다고 한다. 태국서 선호하는 한국 선수 포지션은 중앙 수비와 빠른 윙어다. 일본은 미드필더를 선호한다.

5. 수라차이 감독: 수라차이 감독은 1998 방콕 아시안게임 때 한국을 침몰시킨 태국의 국민 영웅으로 한국 축구에 대해 능통하다. 그의 한국 선수에 대한 호감은 과거 경험으로부터 생겼다. 싱가포르 홈 유나이티드를 이끌 때도 멘털과 스피드가 좋은 한국 용병을 좋아했다. 그가 맞붙었던 역대 최고의 한국 선수는 황선홍과 홍명보가 아닌 유상철이다. "유상철같은 선수는 처음 상대한다. 체력·스피드·기술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수"라는 게 그 이유.

6. 열기: 태국의 평균 관중은 아직 K리그 클래식보다 낮지만 축구 열기는 더 낫다. 방콕 원정은 경찰이 오토바이로 선수들을 에스코트 할 만큼 열기가 대단하다. 우리나라보다 시차가 두 시간 정도 느려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등 해외 축구를 보기가 수월하다. 방콕 시내엔 축구 펍도 즐비하다.

7. 믿음: 팀 동료들은 조태근을 "수라차이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팀에서 그를 믿는다는 방증이다. 구단주와 감독 내외가 한국에서 열린 그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정도다. 결혼 2주 전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어깨를 다쳤지만 "결혼식에 휠체어를 태워 보내고 싶진 않다"며 감독이 배려를 해줬다. 수라차이 감독은 한국 가이드인 부인을 통해 김치를 직접 공수해 갖다 줄 정도로 그를 믿고 배려한다.

8. 태국 축구: 조태근은 태국 선수들의 특징으로 약한 멘털을 꼽았다. 테크닉과 스피드는 좋지만 한 번 무너지면 와르르 무너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볼 컨트롤과 기교만 따지면 한국이 뒤진다고 냉정히 평가했다. 싸움을 걸면 안 물러서는 성향도 장점이다. 한국과 일본팀들과 연습 경기에서 종종 싸움이 나서 중단되는 경우도 있다. 태국 축구는 현재보다 미래를 기대한다. 현지에선 현 국가대표보다 23세 이하 팀이 낫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9. 유소년: 태국 빅 클럽은 좋은 유스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아직은 아닌 팀이 더 많다. 그래도 진보를 위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TPL 클럽 절반 이상이 유럽과 브라질 등 외국인 감독을 앉혔다. 빅 클럽은 테크니컬 디렉터도 유럽파인 경우가 많다. 무앙통은 에릭손이 기술 고문으로 있다. 한 무앙통 유스 선수는 야야 투레가 나온 축구 스쿨에서 축구를 배웠다. 말도 안 되는 잔재주를 실전에서 마음껏 구사하는 선수들이 등장하는 이유다.

10. 부리람: 부리람은 태국 내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다. 조태근의 말을 들어보자. "부리람은 클래식 중위권 팀보다는 나은 듯해요. 실제로 K리그나 내셔널리그 팀들이 태국에 전지훈련을 와요. 내셔널 팀은 일반 태국팀도 버거워해요. K리그 팀들은 전반적으로 우위에 있죠. 그런데 부리람은 달라요. 나고야도 부리람에 지고 저희랑 비겼죠."

글=임기환 기자(lkh3234@soccerbest11.co.kr)사진=조태근 페이스북 화면 캡처

축구 미디어 국가대표 - 베스트 일레븐 & 베스트일레븐닷컴저작권자 ⓒ(주)베스트 일레븐.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www.besteleven.com

Copyright © 베스트일레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