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김] 빅초이 최희섭과 메이저리그

조회수 2014. 10. 30. 17:1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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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야구팬들에게 '빅초이' 최희섭의 메이저리그 도전은 실패로 기억되고 있다. 2002년 시즌 시카고 컵스의 최고 유망주로 평가받으며 컵스 구단의 기대 속에 화려하게 메이저리그에 데뷔했지만 그의 메이저리그 커리어는 오래가지 못했다.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메이저리그 데뷔했을 당시 대다수의 미국 현지 전문가들은 그가 매 시즌 평균 40개 홈런과 120개 타점이 가능한 거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총 4시즌을 뛰며 남긴 기록은 홈런 40개와 타점 120개가 전부였다.

< 폴 디포데스타의 남자였던 최희섭. 사진/ 다저스 구단 제공 >

하지만 그의 도전은 실패가 아니다. 투수가 아닌 야수가 메이저리그 입성에 성공한 한국 선수는 최희섭과 추신수가 전부이다. 90년대 말 이후 수많은 유망주가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이 두 선수 이외에 아직도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린 선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한국 야구보다 한 단계 위라고 평가받고 있는 일본야구도 아직 메이저리그 선발 1루수를 배출해내지 못하고 있다. 한 마디로 최희섭처럼 메이저리그에서 선발 1루수로 활약한 아시아 출신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이다. 물론 메이저리거 최희섭이 대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실패였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터닝 포인트 : The Trade

정확히 10년 전 일이다. 2004년 2월 16일 LA 다저스는 폴 디포데스타를 단장으로 선임한다. 빌리 빈 단장과 함께 오클랜드 어슬래틱스의 '머니볼' 기적을 만들어낸 디포데스타는 당시 메이저리그 프런트 세계에서 떠오르는 스타였다. 1996년 시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입사하며 메이저리그 프런트에 모습을 드러낸 그가 단장자리를 차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8년이었다. 말 그대로 초고속 승진이었다. (영화 '머니볼'에서 그는 예일 대학교 경제학을 졸업하고 이름은 피터 브랜드로 캐릭터가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클리블랜드에서 그에게 주어진 첫 직책은 전력분석 스카우트였다. 하지만 그는 당시 인디언스의 단장이었던 존 하트에 눈에 띄며 단장 특별보좌로 승진한다. 물론 클리블랜드에서 그의 커리어가 오래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곧장 빌리 빈 단장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이며 오클랜드 어슬래틱스 부단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미 영화와 책을 통해서 알려졌듯이 그가 빌리 빈 단장과 함께 설계한 '머니볼'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지만 '머니볼'의 완성은 디포데스타에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오클랜드에서의 성공 신화를 뒤로하고 그는 스승인 빌리 빈 단장의 품을 떠나 다저스의 단장으로서 홀로서기에 나선다.

2004년 시즌을 앞두고 LA 다저스의 단장으로 취임하자 그는 당시 플로리다 말린스에서 뛰고 있던 최희섭을 영입대상 1순위 후보로 점찍는다. 이유는 간단했다. '머니볼' 야구에 아주 적합한 선수가 바로 빅초이 최희섭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최희섭은 항상 출루율이 높았던 선수였다. 2002년 시즌 아이오아 컵스에서 (시카고 컵스 트리플A) 그는 홈런 26개, 타율 2할8푼7리 그리고 출루율 4할6리를 기록했다. 비록 트리플A 성적이지만 최희섭의 출루 본능은 디포데스타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충분했다. 하지만 트리플A에서의 성적이 끝이 아니었다. 2004년 시즌 개막과 함께 플로리다 말린스의 선발 1루수 자리를 꿰찬 최희섭은 높은 장타율과 출루율을 동시에 기록하는 보기 드문 선수였다. 그는 2004년 시즌 전반기에만 홈런 15개 그리고 출루율 3할8푼8리를 기록했다.

당시 메이저리그 최저연봉에 가까운 31만 달러를 받고 있었던 최희섭이야말로 바로 '머니볼' 선수였다.

플로리다 말린스에서 뛰고 있는 최희섭을 멀리서만 지켜보고 있던 디포데스타는 트레이드 마감일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움직인다. 디포데스타는 당시 다저스의 간판스타였던 폴 로두카와 모토를 말린스에 보내고 최희섭과 브래드 페니를 영입한다. 폴 로두카의 당시 인기를 생각하면 상당히 과감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머니볼'을 경험한 디포데스타에게 로두카의 인지도와 인기는 큰 의미 없는 거품이나 마찬가지였다.

트레이드 성사 직후 그는 곧장 빌리빈 단장에게 최희섭을 영입했다며 마치 자랑하듯이 문자 한 통을 보낸다. 그리고 빌리 빈 단장은 아주 짧은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I want him too!" (나도 그를 원해!)

당시 트레이드만 놓고 생각하면 최희섭에게 LA 다저스 유니폼은 기회 그 자체였다. 단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상황에서 다저스의 선발 1루수 자리는 최희섭의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LA 다저스의 속사정은 상당히 복잡했다.

당시 LA 다저스의 감독은 짐 트레이시였다. 데이비 존슨 (전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과 플리페 알루 (전 몬트리얼 엑스포스 감독) 밑에서 감독 수업을 받은 트레이시 감독에게 비선수 출신인 디포데스타 단장의 '머니볼' 야구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론이었다. 특히 다저스의 심장으로 여겨지던 폴 로두카 선수를 일방적으로 트레이드한 디포데스타 단장에 대한 불만이 컸다고 한다.

결국 최희섭은 이 두 남자의 불편한 관계에 심벌로 전락하고 만다.

악몽의 시작 Nightmare

트레이드 당시 최희섭의 나이는 만으로 25살이었다. 메이저리그 선발 1루수로 상당히 어린 나이였다. 다저스에서의 실패 책임은 분명히 최희섭에게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선수에게 갑작스러운 변화는 곧장 슬럼프를 의미했다.

< 짐 트레이시 전 다저스 감독. 사진/ OSEN >

플로리다 말린스의 잭 맥키언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거의 매 경기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지만 다저스의 트레이시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트레이드 직후 1주일 동안 최희섭이 풀로 뛴 경기는 2경기밖에 되지 않았다. 선발 출장 경기에서도 상대 팀의 불펜이 움직이면 곧바로 교체 아웃 되고는 했다.

트레이드 직전이었던 7월까지 최희섭은 타율 2할8푼4리 출루율 4할4리를 기록했다. 상당히 좋은 기록이었다. 하지만 다저스로 팀을 옮긴 8월 이후 그는 타율 1할6푼3리 출루율 3할9리밖에 기록하지 못한다. 그리고 9월에는 10경기 (선발 3경기)밖에 나서지 못하며 정규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트레이시 감독이 최희섭을 포기하는 데는 한 달이면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시 다저스 구단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호주 개막전에서 당시 다저스를 취재하고 있었던 MLB.COM의 켄 거닉 기자를 만났다. 그는 단호하게 '초이는 단장과 감독의 파워 게임의 희생양이었다"고 말했다.

"디포데스타 단장은 트레이시 감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구단 관계자들과도 문제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외톨이었다"며 당시 다저스 구단의 속사정을 설명했다. 단장은 고집이 많았고 본인이 내린 결정에 대한 설명이나 소통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거닉 기자는 "디포데스타는 언론까지 피했으며 당시 우리는 다저스를 취재하면서 단장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기 상당히 어려웠다"며 어수선했던 구단 분위기를 전했다.

그렇다면 '현장'에서는 최희섭은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당시 다저스의 타격 코치였던 팀 월랙 다저스 벤치를 코치를 만났다.

"초이는 정말 좋은 선수였다. 하지만 타격 폼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았다. 한 차례 수정을 제시했지만, 그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듯했다가 다시 예전 폼으로 돌아가고는 했다"며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당시만으로 26살이었던 최희섭이 혼자 풀어내기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믿지 못하는 감독 밑에서 그의 슬럼프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최희섭의 외로웠던 메이저리그 도전은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내일이 있다! Tomorrow

메이저리그 최고의 단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브래드 피트, 아니 빌리 빈 단장이 간절히 원했던 선수가 바로 최희섭이었다. 하지만 다 '어제'에 있었던 일들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 최희섭에게는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2014년 시즌 1군 무대에서 최희섭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그는 끝내 챔피언스필드를 밟지 못했다.

하지만 '형님 리더십'이 트레이드마크인 김기태 감독이 KIA의 더그아웃을 지키게 된다. 어쩌면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냉정하게 이제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다. 그는 더 이상 26살이 아니다.

과연 그에게 '내일'은 무엇을 의미할까?

Twitter - @danielkimWdanielkimw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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