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 음식 왜 안 먹어? 괜찮다니까

노진섭 기자 입력 2014. 10. 24. 17:51 수정 2014. 10. 2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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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 김 아무개씨(37)는 5년 전 병원을 찾았다. 김씨는 "15년 전부터 잦은 설사·복부불편감·팽만감으로 고생했고, 소화 불량이 심해 음식을 제대로 먹기 힘들었다"며 "최근 몇 년 새 체중이 10㎏이나 빠졌고 심한 골다공증으로 인해 5개월 전엔 다발성 골절 치료를 받았다"고 호소했다.

김씨는 '셀리악병'으로 진단됐고 지난해 국내 첫 환자로 대한소화기학회에 공식 보고됐다. 셀리악병은 음식에서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는 질환이다. 영양분 흡수를 담당하는 소장의 융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출혈이 없는데도 빈혈을 느끼고 많이 먹어도 영양 공급이 안 돼서 영양실조에 걸린다. 두통·피로·근육통·관절통에서 우울증·골다공증·불임·자가면역질환·뇌질환·림프종 등에 이르는 다양한 질환을 부를 수 있는 '큰 병'이다. 김씨도 혈중 칼슘·철분 농도가 정상보다 낮았고 내시경 검사를 해보니 소장 융모가 소실됐고 점막도 위축된 상태였다.

↑ⓒ 시사저널 임준선

특정 유전자 많은 서양인 병 '셀리악병'

셀리악병은 밀·호밀·보리에 있는 글루텐(gluten)이라는 성분이 일으키는 대표적인 질환이다. 글루텐은 밀에 포함돼 있는 단백질의 한 종류다. 밀가루를 반죽하면 차지고 쫄깃거리는 게 바로 이 성분 때문이다. 밀가루 음식을 먹을 때 독특한 식감도 글루텐의 특징이다.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으면 셀리악병에 걸리는 걸까. 그렇지 않다. 이 병의 발생은 인종에 따라 다른데 특히 백인에서 많이 발생하고 동양인과 흑인에서는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특정 유전자(HLA-DQ2)에 있다. 서구인의 30~40%는 이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만, 한국·일본·중국인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주로 미국·유럽·중동·남미 지역에서 셀리악병이 많이 보고되는 이유다. 최명규 서울성모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셀리악병 환자의 95%가 특정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며 "그러나 한국인은 이 유전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밀가루 음식을 섭취한다고 한국인 건강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셀리악병에 걸린 사람은 일단 글루텐이 없는 식품, 이른바 '글루텐 프리(gluten free)' 음식을 위주로 식사한다. 셀리악병에 걸린 사람에게 글루텐은 피해야 할 성분이므로 글루텐 프리 식품은 효과가 있음에 틀림없다. 국내 유일한 셀리악병 환자인 김씨도 글루텐 프리 음식을 먹은 지 2개월 만에 체중이 늘기 시작했고 8개월 후 검사에서 빈혈이 사라지고 골밀도도 높아져 골다공증이 호전됐다.

미국 등지에서는 셀리악병 환자가 많아 글루텐 프리 식품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글루텐 프리 식품은 쌀가루·타피오카 전분·옥수수 가루 등으로 제조된다. 파스타·과자류 등이 대표적인 식품이다. 글루텐 프리 음식은 본래 오바마 미국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와 오프라 윈프리 등 유명인이 즐겨 먹는다고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국내에서도 최근 글루텐 프리 식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 이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해서 우리도 이에 편승해 글루텐 공포에 떨며 글루텐 프리 음식을 따로 챙겨 먹을 필요는 없다는 게 의학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서구식 식생활이 보편화되면서 밀가루 섭취가 늘고 있지만 셀리악병 발생률이 높아졌다거나 밀가루 성분에 의한 알레르기가 증가했다는 조사결과는 없기 때문이다. 이동호 분당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서구에서처럼 한국에서도 밀가루 음식 섭취로 인한 셀리악병 발생이 늘어날 것이라는 논리는 맞지 않다"며 "한국인의 유전적 성향은 서구인과 다른 데다 음식 종류도 판이하기 때문에 서양의 셀리악병 문제를 한국에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글루텐 프리 식품이 국내에서는 건강식이나 다이어트식인 양 둔갑해서 퍼지고 있다. 업계의 과도한 글루텐 공포 마케팅도 자제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 교수는 "글루텐 프리 식품은 셀리악병 환자에게는 치료제지만, 일반인에게는 건강이나 다이어트에 별 도움을 주는 음식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들 제품은 글루텐 함량만 낮췄을 뿐 당류·탄수화물은 되레 많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글루텐 대체재를 추가하기 때문에 글루텐 프리 식품은 일반 밀가루 식품보다 비싸다. 김상숙 한국식품연구원 유통시스템연구단 책임연구원은 "미국에서 글루텐 프리 식품 가격은 글루텐 함유 식품에 비해 1.6?1.8배 비싸다"며 "그럼에도 맛이나 식감이 글루텐 함유 식품에 비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 일러스트 정현철

"글루텐 프리 식품, 국내에선 불필요"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되거나 배에 가스가 차거나 복통·설사 등 과민성 장증후군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셀리악병은 아니지만 글루텐에 민감한 특성(비셀리악 글루텐 민감성)이다. 밀에 대한 다양한 검사(면역반응, 셀리악병 혈청검사, 십이지장 조직검사)에서 모두 정상이지만 밀가루 음식만 피하면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런 증상이 있다면 음식 섭취 일기를 써 볼 필요가 있다. 한 동안 밀가루 음식을 피해보고, 또 일정 기간 동안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서 글루텐 민감성을 점검해보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자신에게 '글루텐 민감성이 있다'고 여겨지고 영양실조·젊은 나이의 골다공증·출혈 없는 빈혈·약에 반응하지 않는 위장 증상 등이 동반되면 전문의 진료를 받아 셀리악병이나 비셀리악 글루텐 민감성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김상숙 책임연구원은 "미국식품의약국(FDA)은 '글루텐은 오래전부터 섭취해 안전한 것으로 인식된 성분에 속하며 제품에 따로 글루텐 함량 등을 표시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미국 농무부(USDA)·영국·캐나다에서는 적절한 함량 표시를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진섭 기자 / no@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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